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독한 허리케인, 더 독한 정부

버마 수해 현장 이리와디 르포①… 주민들은 죽어가는데 군경이 구호의 손길 막아
등록 2008-09-26 08:41 수정 2020-05-02 19:25

버마(현 미얀마)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방콕발 랑군(현 양곤)행 비행기 티켓 넉 장이 휴지조각이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했다. 그중 두 장은 예기치 않았던 사이클론 나르기스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카트만두의 버마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들고 다시 방콕을 거쳐, 지난 5월 말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만신창이가 된 랑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해 20여 일 만이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길에는 병력을 가득 채운 군용트럭과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즐비했다.

랑군 시민들은 전기가 끊어져 호롱불 신세를 지고 있는데, 복구가 이뤄지는 곳은 사원뿐이다. 사이클론 피해를 입은 랑군의 한 가족.

랑군 시민들은 전기가 끊어져 호롱불 신세를 지고 있는데, 복구가 이뤄지는 곳은 사원뿐이다. 사이클론 피해를 입은 랑군의 한 가족.

사원에서만 이루어지는 복구

“그래요? 별일이네요.”

도착하자마자 만난 민족민주동맹(NLD) 관계자 A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지난해 10월의 승려 시위도 유혈 진압 뒤 유야무야되었고, 서글픈 일이지만 랑군에서는 눈을 까뒤집고 찾아봐도 무장한 군인들이 출현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별일’의 정체는 곧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도착한 날은 공교롭게도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씨가 나르기스 구호지원을 협의하기 위해 새 수도인 내피도에서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 위원장인 탄슈웨를 면담하는 날이었다. 공항로에 늘어선 군 병력은 버마 군정의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괴팍한 환영식일 것이었다.

안 그래도 이상한 나라인 버마에서는 몹시도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이른바 서방은 나르기스로 빚어진 비참한 재해를 구호하기 위해 협박과 공갈 그리고 사정을 퍼붓고 있었으며, 버마 군정은 뒷짐을 진 채 유엔 사무총장에게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버마 초유의 대재앙인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은 20여 일이 지난 뒤 랑군에서도 역력했다. 시내의 대로변에서는 아름드리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전신주들은 세워져 있었지만 전선이 없는 것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대로의 이면은 사정이 더욱 나빴다. 쓰러진 전신주들을 세우고 있는 것은 주민들이었다. 랑군의 상징인 슈웨다곤 사원의 맞은편 주거지 골목에서 전신주를 세우고 있던 한 주민은 정부가 전선을 이어주겠다고 했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랑군 외곽에 사는 우탄소에(31)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과 호롱불 신세를 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슈웨다곤 인근의 한 사원에서는 경내의 쓰러진 나무들을 치우기 위해 군인과 경찰 그리고 군용트럭이 동원되고 있었으며, 대로변의 전신주와 전선 복구사업에는 중장비와 인력이 동원되고 있었다. 버마 군정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국민이 아닌 불심에 기대고 있다는, 널리 알려진 사실을 증명하는 듯했다.

버마 군정의 대변지인 (The Light Of Myanmar)은 연일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위원장 탄슈웨와 군정의 장군들이 재해지역을 방문했다는 기사와 사진들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랑군의 시민들은 군정이 자신들을 도우리라는 기대는 일찍 버린 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입을 모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군정의 재해복구 사업은 ‘무’에 가깝다고 말했다.

도착한 첫날부터 나는 버마 초유의 대재앙이 덮친 이라와디 삼각주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사이클론이 휩쓸고 지나간 지 3주가 지난 시점이었지만, 양곤강을 넘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다. 랑군의 민간 무상 의료기관 한 곳이 일요일에 재해지역으로 진료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가기를 부탁했지만 피차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가실 수는 있겠지만 문제가 되면 남은 저희가….”

보안대 신세를 져야 한다는 말이어서 더는 부탁할 염치가 없었다. 누군가를 소개받아 방도를 의논했다. 방법을 바꾸어서 이라와디 삼각주 위쪽에 위치한 서부의 파텡으로 간 뒤 남진할 계획을 세웠지만 그도 무망했다.

“지금은 외국인에게 차표를 팔지 않는데요.”

“내 생김새가 버마 사람 같지 않습니까?”

“파텡까지 가는 길에는 검문소가 수도 없이 많은데….”

그는 내가 검게 그을려서 “버마 사람처럼 보이기는 한다”고 말했지만 ‘당신이 그렇게 운이 극도로 좋은 사람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버마 군정과 대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뇌물을 쓸까요?”

“그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 부자예요…. 돈 때문에 위험을 불사할 가난한 사람을 찾으세요.”

이재민 캠프는 전시용

그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생김새는 버마 사람으로 우겨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으니 입만 열지 않으면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니 대신 말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문제가 생기면 그도 보안대 신세를 지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위험수당으로 해결하라는 말이었다.

묵언(默言)의 서약을 가슴에 품고 지난 5월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이라와디에 잠입했다. 흐린 탁류가 일렁이는 양곤강을 넘는 페리를 타고 서안의 달라에 도착했다. 이재민을 수용했다는 달라의 한 불교사원은 고적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 뒤에 나타난 동자승은 이재민들이 2주 전에 인근의 달라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고 했다. 그러나 학교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때 300여 명의 이재민이 있었지만 지금은 세 가구만이 교실 하나를 지키고 있었다. 달라 주변 지역에서만 2천~3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 수도 랑군 중심가의 슈웨다곤 사원 부근에서 군인과 경찰 등이 동원돼 재해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버마 수도 랑군 중심가의 슈웨다곤 사원 부근에서 군인과 경찰 등이 동원돼 재해복구 작업을 벌이고 있다.

“6월에 학기가 시작되니 비워달라고 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우 흘라 아웅(59) 노인은 지난 3주 동안 정부로부터 네 차례 쌀과 콩을 한 줌씩 배급받은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은 월말까지는 학교를 떠나야 하지만 돌아간 뒤 집을 다시 지을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 머무르고 있었다. 수도인 랑군을 코앞에 둔 달라의 이재민 수용소 사정은 그랬다.

검문소를 통과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이유로 오토바이의 뒷자리에 몸을 싣고 랑군 지역에서 5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 사이클론의 피해가 심했던 곳 중 하나가 된 남부의 쿵양곤으로 가는 길은 바람에 휘어지는 야자나무를 빼고는 온전한 나무들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한눈에 피해가 두드러졌다. 콘크리트 전신주들은 하나같이 허리가 부러지거나 쓰러져 굵은 고압송전선들이 길가에 흉물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부러진 전신주에 매달린 1.5cm 굵기의 송전선으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사원의 불탑은 달라 인근에서는 첨탑의 장식물들이 꺾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이후로는 첨탑이 아예 부러진 모습이 보였다. 도로변의 집들은 그나마 온전하게 보였는데 그건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야자잎으로 벽과 지붕을 만드는 집들이기 때문에 빠르게 복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주민들이 모두 길가에 나와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목을 빼고 있는 이유는 가끔씩 나타나는 구호차량들이 던져주는 옷가지나 식품들 때문이었다.

“랑군에서 개인적으로 구호품을 전달하기 위해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있고 기업에서 오는 경우도 있어요.”

말하자면 비정부 구호였다. 도로변에 아이를 안고 서 있던 한 아낙은 주민들이 도열하듯 길가에 서 있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면서 정부 구호품이나 외국에서 온 구호품은 아직 구경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길가에는 심심치 않게 군인과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그들의 임무는 출입을 통제하고 이른바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지 구호와는 무관했다. 랑군에서 쿵양곤에 이르는 사이에 유일하게 나타난 정부 이재민 캠프에 멈추었다. 15개의 텐트가 세워져 있는 캠프는 텐트당 한 가구씩 고작 15가구를 수용하고 있어서 전시용일 뿐이었다. 정부 이재민 캠프는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구호물품을 전달한다는 이유로 캠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나의 가난한 가이드는 그나마 장교가 없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도로 안쪽 마을의 한 사원 역시 이재민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달라의 사원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은 200여 명의 이재민들이 의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침이면 나가서 해가 져야 들어옵니다.”

사원은 거처를 제공할 이상의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은 해가 뜨면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끼니를 해결하거나 길가에서 구호품을 기다리고 해가 지면 사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사원을 지키고 있는 젊은 승려의 대답이었다. 청년임에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 승려는 그 또한 지난 3주 동안 정부 구호품이나 외국 구호물자는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군경이 때때로 구호품 압수”

랑군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3번에 걸쳐 이라와디의 재해지역에서 개인적으로 구호품을 나눠주었다는 중년의 버마 사업가 B를 만났다.

“검문소의 경찰이나 군인들은 자신들이 나눠주겠다며 구호품을 달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물건을 넘기면 정작 이재민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없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에게 물건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직접 들어가 음식이나 옷가지들을 나눠줬지요.”

“개인적인 구호활동을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최근에는 막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물건을 압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며칠 전 1t 트럭에 구호품을 싣고 이라와디로 들어가던 한 회사의 물품을 군인들이 압수했다고 하더군요.”

이라와디 삼각주의 하류인 피아뽀강 인근의 사정은 목불인견이었다. 도로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강변에는 어선들이 뒤집혀 있거나 땅 위로 올라가 있었다. 지류인 놋이얀또 강변의 한 마을 사원에서 만난 이재민은 3200명의 지역 주민들 중에 191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여 명은 실종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바람은 생전 처음이었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해일처럼 밀려든 강물에 익사하거나 나무 위로 피했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랑군·이라와디=글·사진 유재현 소설가 hyoooo@hanmail.ne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