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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정치권, ‘이라크 대논쟁’ 점화

등록 2007-09-06 15:00 수정 2020-05-02 19:25

국가정보평가서 발표 뒤 공화당 중진의원도 비판에 가세… 초안의 비관적 전망 수정했다는 의혹도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최선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자. 우선 이라크 치안 상황이 향후 6~12개월 동안 조금씩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라크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혈사태는 여전히 불을 뿜을 것이다. 이라크 정부는 더욱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고, 국정 장악력도 갈수록 떨어질 것이다. 시아-수니파 간 폭력사태는 계속될 것이고, 모든 정파가 궁극적으로 미군 철수를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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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시나리오는 한 번도 맞지 않았다”

미국 는 지난 8월24일치 기사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에게 남은 선택지가 많지 않으며, 이라크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고 지적했다. 전날 발표된 미 국가정보국의 이라크 상황 관련 국가정보평가서(NIE) 내용을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이 신문은 “문제는 이라크에서 최선의 시나리오가 들어맞은 일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 정가가 다시 이라크 문제로 들썩이고 있다. 올 초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치안 확보를 위해 2만8천여 병력을 증강 배치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중간평가 보고서 제출 시한이 9월 중순으로 다가온 탓이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의 중진 정치인들까지 나서 ‘철군 불가피론’에 힘을 싣기 시작하면서, 9월 한 달 미 정치권에 불어닥칠 것으로 예견돼온 ‘이라크 대논쟁’이 벌써부터 본격 개막한 모양새다.

“치안 상황은 조금 나아졌지만, 정치적 화해 가능성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논쟁에 불을 지핀 도화선은 8월23일 발표된 정보평가서였다. 중앙정보국·국방정보국 등 미 연방정부 산하 16개 정보기관이 공동으로 작성한 정보평가서 최신판의 내용을 두고, 이라크 정책 찬반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과 반응이 쏟아져나왔다.

백악관 쪽에선 “미군 증파계획을 통해 유혈사태가 진정 기미로 돌아서는 등 이라크 치안 안정화에 전기가 마련됐다”며 “이런 마당에 미군을 철수시킨다면 이라크에 혼란만 가져다줄 뿐”이라고 주장했다. 고든 존드로 백악관 국가안보 담당 대변인은 에 보낸 기고문에서 “지난 1월 나온 평가서에서 이라크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 반면, 이번 평가서는 미군 증파계획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폭력사태가 줄어들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이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쪽에선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가서 내용만 보더라도 이라크에서 정치적 진전을 이루기 위해 병력 증파가 필요하다는 백악관의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라크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꿀 시점이 다가왔다”는 반박에 무게가 실렸다.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해리 라이드 의원은 의회 전문지 과 한 인터뷰에서 “이번 평가서는 미 국민이 모두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부시 행정부가 무시해온 현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며 “미군은 이라크 내전에 휘말려 있으며, 증파계획은 백악관이 약속한 정치적 결과물을 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초안에는 18항목 중 3개만 진전 평가

그동안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정책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온 공화당 중진의원들이 하나둘씩 비판 대열에 가세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공화당 중진 존 워너 의원은 평가서가 발표된 직후 의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다가오는 연말까지 이라크 주둔 미군 5천 명을 철수시키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제한적 수준의 병력을 철수시킴으로써 이라크 정치권에 자국 치안유지를 위해 좀더 책임 있는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게다.

이를 두고 는 “상원 국방위원장 출신인 워너 의원 같은 중진이 부시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이라크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뤄질 것임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로버트 홀스워스 버지니아코먼웰스대학 교수(정치학)의 말을 따 “부시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민주당과 입장을 같이할 수 없는 공화당 의원들로선 중간지점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며 “워너 의원과 입장을 같이하는 공화당 의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흥미로운 점은 정보평가서 내용이 관련부처 회람 과정에서 “비관적 내용에 대한 수위가 일부 조절됐다”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는 8월30일 이라크 상황에 대한 분석을 담은 미 회계감사원(GAO)의 보고서 초안을 단독 입수해 공개하면서 “정보평가서 초안엔 비관적 전망이 더 많았지만, 회람 과정에서 일부 수정됐다”며 “회계감사원 보고서도 관련부처 회람 과정에서 수위가 조절될 것을 우려한 내부인사가 초안을 전달해줬다”고 폭로했다.

실제로 회계감사원이 평가한 이라크 상황은 정보평가서 내용에 비해 훨씬 비관적이다. “미 의회가 이라크의 정치·군사적 상황에 대한 평가지표로 제시한 18가지 항목 가운데 이라크 의회 내 소수정파 배려 조치 등 단 3가지 분야에서만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는 게 회계감사원의 평가다.

“바그다드 병력 증파 작전의 목적은 종파 간 유혈사태를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방정부 산하 각 기관별로 이라크에서 실제 유혈사태가 줄어들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엇갈리고 있다. 미군을 겨냥한 공격은 주춤했지만, 이라크 민간인을 겨냥한 공세는 여전히 격렬하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라크 치안병력의 업무수행 능력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회계감사원은 또 “이라크 의회는 핵심 입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이라크 정부가 이미 제공한 100억달러의 재건예산을 계획대로 집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민간인을 겨냥한 하루 평균 유혈폭력 사건 발생 건수는 지난 2월25일부터 7월26일까지 6개월 동안 거의 변함없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AP통신〉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각종 유혈사태로 목숨을 잃은 이라크인은 하루 평균 33명이었지만, 올해는 지난 8개월 동안 하루 평균 62명으로 늘어났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라크인 하루 사망 지난해 33명, 올해 62명

“9월 중순으로 예정된 이라크 전략평가회의 때 미군 지휘부는 통일된 의견을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각 지휘관들이 생각하고 있는 최선의 정책 방향을 부시 대통령에게 개별적으로 제시할 계획이다.” 제프 모렐 미 국방부 대변인은 8월29일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미군 지휘부 내부에서조차 이라크의 현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정책 대안에 대한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 게다. ‘오른팔’이던 칼 로브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에 이어 ‘왼팔’ 격이던 알베르토 곤잘레스 법무장관마저 사임한 지금, ‘레임덕’ 부시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결정의 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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