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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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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학자의 한글연구

등록 2001-03-21 00:00 수정 2020-05-03 04:21

책으로 보는 세계/

파리시 퐁피두센터 앞에는 항상 10여명의 중국인들이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이름을 한자로 써준 뒤 1천원 정도의 돈을 받는 장사를 하고 있다. 이들 앞에 줄지어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에서 ‘생소한’ 문자에 대한 그들의 높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한글로 이름을 써주면 호기심과 흥분에 이리저리 돌려보고 몇번을 그림 그리듯 따라 써본 뒤 보물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보관한다.

파리8대학 교수이며 언어학자인 장 폴 데스구트가 한글을 철학적,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책 (L’ criture du cor en, l’harmattan 출판사, 2000년)을 펴냈다. 번역된 문학작품과 실용회화를 위한 책을 제외하고는 한국 관련 서적이 드문 상황에서 한글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책이 나온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역사와 더불어 한글이 만들어지게 된 정치적·사상적 배경을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 언어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기원과 출현’ ‘훈민정음’ ‘용의 눈’(용비어천가) 등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 이 책은 먼저 세종과 정인지가 펴낸 텍스트의 번역을 통해 한글 자모 34자에 대한 기초적 설명과 한글의 사용에 관한 구체적 설명과 예를 보여줌으로써 그 다음에 나올 분석적인 글 읽기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 프로방스 대학의 명예교수인 장 도누가 쓴 ‘한글수업’이라는 장은 다른 언어와의 비교 속에서 한글에 대한 분석을 더욱 심화하고 있으며 최근 한글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도 소개하고 있다. 데스구트의 ‘한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기호학적 도전’이라는 글은 인도유럽어 전통과 중국어 전통을 구체적으로 비교·분석하면서 한글의 언어학적 의의를 다루고 있다.

데스구트는 문법학자, 음성학자, 음운학자가 다같이 언어와 문자의 정확하고 밀접한 소통을 꿈꿔왔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한글의 선포를 언어역사 일반에서 중요한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세종과 문법학자들이 한글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상반된 중국의 종합어와 몽골, 산스크리트의 분절어를 하나의 언어체계 속에 어우르는 언어학 이론을 발전시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게다가 이 이론이 그로부터 5세기 뒤 로만 야콥슨의 주도로 형성된 프라하 서클의 음운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는 것은 세종의 놀라운 식견과 한글의 과학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책은 한글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푸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

신순예 통신원 soonye.sin@libertysurf.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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