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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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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우리처럼 춤 못춰!”

등록 2001-03-13 00:00 수정 2020-05-02 04:21

세계 최대 동성애자 축제 마디그라 탐방기… ‘한국대표’ 홍석천 열렬한 환호성 속에 입장

지난 3월3일 서울 거리에 때아닌 눈발이 날리고 있을 무렵, 지구 반대편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한 거리에선 50여만명의 인파가 몰려 열광의 도가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유명 팝가수의 대형 콘서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승 트로피를 내건 축구 시합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고, 민감한 주제의 정치집회가 열린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 오로지 즐거워지기 위해 전세계에서 여기로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Happy Mardi Gras!”

격려의 함성에 눈시울 붉히며…

‘시드니 게이 레즈비언 마디그라’(Sydney Gay+Lesbian Mardi Gras)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성애자 축제이다. 보통 2월 초순에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개막식을 가진 뒤 3주 동안 시드니 전역에서 크고 작은 문화행사들이 계속되다가, 행사 마지막주 토요일 저녁의 퍼레이드와 밤샘 파티를 절정으로 마감된다. 축제 기간에 열리는 문화, 예술 행사는 동성애 관련 영화제, 연극, 전시회, 토론회, 음악회, 파티 등 굉장히 다채롭고, 게이바 등에서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고객의 입맛을 당기니 그야말로 동성애자라면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할 꿈의 향연인 셈이다.

올해는 2월9일에 개막해서 3월3일에 폐막하는 일정이었다. 게이들의 거리라 불리는 옥스퍼드 거리(Oxford Street)를 중심으로 해서 시드니 시내는 대형 레인보 깃발로 물결치고 있었다. 마디그라의 꽃인 퍼레이드는 독특하게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 7시30분부터 시작된다. 4시부터 차량이 통제되고 행렬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자마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로 거리는 금세 발디딜 틈 없이 붐볐다. 전망좋은 방들은 이미 수개월 전에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앞자리를 놓친 이들은 우유박스를 쌓고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50여만명이란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음에도 혼란스럽고 난잡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마디그라를 반대하기 위해 나온 보수 종교인들조차 도로변에 ‘God Forgive Sydney’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얌전히 서 있을 뿐이었다.

퍼레이드의 시작은 해마다 멋지게 가죽옷을 입은 레즈비언 100여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을 내며 질주하는 것으로 신호를 울린다. 그뒤로 지역별, 취미별, 연령별, 직업별로 결성된 수많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동성애자 단체들과 세계 각국 대표로 결성된 팀들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꾸민 요란한 행렬이 이어지는데,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의상과 잘빠진 몸매를 드러내는 섹시한 춤동작들이 구경꾼들의 눈을 호사스럽게 만족시켜준다. 올해는 175개팀, 7500여명이 참석했는데 행렬이 모두 지나가는 데만 꼬박 3시간이 걸렸다.

이번 ‘시드니 게이 레즈비언 마디그라’는 특히 한국에게 공식적인 첫 참가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물론 우리 정부쪽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지만). 같은 아시아권에서도 중국이나 일본은 이미 몇해 전부터 화려하게 그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국가별 대항이 아닌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의 성격이므로 괜한 자존심 싸움을 벌일 건 없지만,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드러내는 척도는 될 법하다. 성적 소수자로서 게이, 레즈비언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흥겨운 파티에 주체로 참여해 자신있게 웃음지을 여력이 아직 없다는 뜻도 되니 말이다.

퍼레이드 입장 순서로는 63번째에 드디어 ‘KOREA’라는 푯말이 등장했다. 30여명이 북적거리는 일본팀 바로 뒤를 이은 우리 팀의 참가자는 겨우 한명. 짙은 남색 개량 한복에 한지 부채를 펼쳐들고 환한 웃음으로 관중의 환호에 일일이 답을 보낸 용감한 한국의 게이는 바로 홍석천이었다.

“연기자이기 앞서서 한명의 동성애자로서 이런 자리에 한번 서보고 싶었어요. 동성애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거 아닌가요? 제가 처음이라는 것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무척 기대되고 긴장됩니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어떻게 나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참 간단하다. ‘커밍아웃 연예인 1호’라는 타이틀 덕에 잘 나가던 밥줄이 끊긴 처지에 ‘시드니 마디그라 공식 참여 1호’라는 명함까지 달면 방송생활만 더욱 어려워질 텐데, 그의 이런 우직한 성격이 안쓰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외국의 낯선 화려함 속에 혼자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내심 앞서기도 했는데, 현지 반응은 오히려 떼거리로 나온 다른 팀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몰려드는 취재진으로 몇번이나 걸음이 멈추어져 뒤쪽 행렬은 서서 기다려야 했고, 한국 유학생과 교민들은 반가운 환호성을 질렀다. 에 기사가 나간 탓인지 홍석천을 알아보는 외국인들도 많아 “Hong! Hong!”을 외치는 따뜻한 격려의 함성은 끝내 홍석천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말았다.

우리는 기형아가 아니다!

퍼레이드가 끝나자 옥스퍼드 거리는 바로 거대한 노천 카페와 나이트클럽으로 변했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받침대로 썼던 우유박스는 그대로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는 의자가 되었다. 그런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순간 탁 트인 자유를 느낀 건, 너무나도 꽁꽁 금지된 것이 많은 땅에 사는 한국인이라서 더 유난했을지도 모르겠다.

마디그라에선 사람들끼리 만나면 “Happy Mardi Gras!” 라고 인사를 주고받는다. 실상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인간으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작은 행복감이 아니던가? 동성끼리 키스를 하든 사랑을 하든 아무도 “넌 왜?”라고 묻지 않는, 그 소박한 행복감을 누리기 위해 비싼 비행기값을 들여서 여기 시드니에 모여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개막식 때 의 칼럼니스트이자 저명한 작가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데이비드 마르가 했다는 연설 한 부분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우리(동성애자)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고, 가장 재치있고 인정도 많으며, 가장 멋진 품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도 우리처럼 춤 못 춰!(No one can dance like us!) 우리는 기형아가 아니고 단정치 못한 사람들도 아니며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한’(ordiary) 오스트레일리안이라는 것이다”(자료인용: http://user.chollian.net/~ttose).

한채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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