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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그늘, 또 피지 쿠데타

등록 2006-12-14 15:00 수정 2020-05-02 19:24

집권하도록 도와준 카라세 총리를 몰아낸 바이니마라마의 역설적 쿠데타…영국 식민지 시절에 잉태된 토착민과 인도계 주민 사이의 갈등이 주원인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서 또 쿠데타가 벌어졌다. 지난 1987년 이후 벌써 네 차례다. 피지 육군 참모총장 프랭크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은 지난 12월5일 라이세니아 카라세 총리를 축출하고 군사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수도 수바의 거리엔 개인 화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대거 배치됐고, 군부의 검열을 우려한 현지 언론은 스스로 문을 닫아 걸었다.

1987년 이후 벌써 네 번째

쿠데타 세력이 내놓는 ‘명분’은 지구촌 어디서나 닮은꼴이다. 쿠데타를 주도한 바이니마라마 장군은 “카라세 총리 정부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분열주의 때문에 위기에 빠진 피지를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군대를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쿠데타 성공 직후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임시 대통령 자리를 꿰찼다. 고작해야 90만여 명의 인구에, 유인도 106개를 포함해 모두 322개의 섬으로 이뤄진 피지에서 군사 쿠데타가 빈발하는 이유는 뭘까?

1874년 영국의 식민지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피지는 남태평양의 다른 섬나라와 마찬가지로 부족 자치사회였다. 3500여 년 전에 이주해온 멜라네시아인들과 500여 년 전 옮겨온 폴리네시아인들이 수많은 섬에 흩어져 다양한 종족으로 분화했다. 식민지배를 시작한 영국은 중앙 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면화와 사탕수수를 중심으로 집단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혜의 기후 조건과 자연환경으로 나름대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토착민들은 영국인 농장에서 일하려 들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이런 토착민들을 ‘게으르다’고 비난했고,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또 다른 식민지인 인도에서 1879년부터 이주 노동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도계 인구는 급격히 불어났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해갔다.

1970년 10월10일 피지는 96년간의 식민지배를 끝내고 마침내 독립국가가 됐다. 전체 인구의 40% 안팎인 인도계 주민들은 피지 경제를 완전히 장악했고, 50% 남짓인 토착민들은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두 진영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차 저변을 넓히던 인도계 정치세력은 독립 17년여 만인 1987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피지 사상 첫 쿠데타는 그 한 달여 뒤에 벌어졌다. 또 같은 해 9월 두 번째 쿠데타가 이어졌다.

세 번째 쿠데타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1999년 선거에서 인도계 정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마헨드라 차우드리가 첫 인도계 총리로 취임하자 토착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이듬해 5월 토착민 주도로 ‘민간 쿠데타’가 벌어졌고, 총리를 포함한 각료들이 56일 동안 억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무혈 진압하는 데 성공한 바이니마라마가 임시정부 총리로 지목해 이어진 총선에서 집권의 길을 터준 인물이 다름 아닌 카라세 총리라는 점은 지독한 역설이다.

쿠데타의 원인 ‘퀄리퀄리’ 법안

사실 이번 쿠데타는 이미 지난해 여름께부터 예견돼왔다. 카라세 총리 정부가 입법을 추진해온 일부 법안에 대해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극렬 반발해온 탓이다. 그러나 올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카라세 총리는 이들 법안 도입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지난달엔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중동을 방문한 사이 그를 해임해버렸다.

귀국한 바이니마라마는 해임 조처에 불복하는 한편 법안 도입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카라세 총리 정부 전복에 나설 것임을 공언했다. 그리고 카라세 총리의 협상 제안도 마다한 채 그는 자신이 정한 법안 철회 시한이던 12월5일을 기해 군대를 움직였다.

바이니마라마가 문제를 삼은 법안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법안은 이른바 ‘화해·관용 및 단합 법안’으로, 지난 2000년 5월 최초의 인도계 총리인 마헨드라 차우드리 정부를 붕괴시킨 쿠데타 관련자에 대한 사면과 당시 쿠데타로 입은 피해를 보상해주는 것을 뼈대로 한다. 당시 쿠데타를 진압한 당사자로, 이 때문에 암살 위기까지 겪었던 바이니마라마로선 좌시하기 어려운 일이다.

두 번째 법안은 ‘퀄리퀄리’(현지어로 ‘어업이 가능한 해안지대’라는 뜻) 법안으로 불린다.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해안가의 토지 소유권을 토착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뼈대다. 토착민들에게 전통적 어업권을 돌려주는 게 입법 목적이라곤 하지만, 해안가 대부분이 호텔과 리조트 등 관광지역으로 개발돼 있어 토착민들에게 ‘토지 사용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조처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음에도 최근 피지 곳곳에서 토착민들이 호텔 운영자들에게 토지 사용료를 요구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결국 이번 쿠데타 역시 피지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토착민과 인도계 주민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라는 점에선 앞선 세 차례 쿠데타와 마찬가지다. 앞선 쿠데타 세력을 토착민 계열이 주도했다면, 이번 쿠데타는 인도계 주민을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경제적 불평등에서 기인한다. 그 핵심이 토지 소유권 문제다. 갈등의 뿌리도 깊어, 피지의 경제적 불평등이 제도로 굳어진 것은 영국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레 라카이 멜버른대 교수(부동산개발학과) 등이 지난 1995년 내놓은 ‘피지의 전통 토지 소유권’이란 제목의 논문을 보면, 피지의 토지 소유권은 영국이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만들어놓은 대로 크게 △사유지 △국유지 △토착지 세 가지로 나뉜다. 현재 피지 전체 국토의 58.21%는 순수 토착지다. 토착지를 개인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면적도 25.61%나 된다. 반면 국유지와 사유지는 각각 8.12%와 8.06%에 불과하다.

토착지가 전체 국토의 약 84%에 이르는 상황임에도 토착민들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토착지 가운데 약 31%만이 경작이나 개발이 가능하며, 나머지 면적은 너무 외지거나 험한 지형 탓에 개발이나 경작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경작·개발 가능지 대부분은 이미 인도계 주민을 중심으로 한 개인이 임차해 사용하고 있고, 사유지도 대부분은 경제력이 있는 인도계 주민이 소유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고리 만드는 차별

개발과 투자는 국유지와 사유지, 그리고 개인이 임대한 토착지에 집중된다. 국유지와 개인 소유지가 전체 면적의 약 16%에 불과하지만 도시와 상업지역, 산업·농경지 대부분이 이들 지역에 몰려 있다. 때문에 이들 토지가 피지 부동산 자산 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금융기관의 차별도 토착민의 경제적 도약을 제도적으로 가로막는다. 씨족·부족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토착지는 담보대출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개발도 투자도 사실상 어렵다. 반면 토착지를 임대해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거나 휴양지로 개발할 경우 그 임대권은 담보로 인정된다. 부익부 빈익빈의 고리다.

쿠데타로 좌절된 ‘퀄리퀄리’ 법안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독립 36년째, ‘식민의 그늘’은 여전히 피지 사회를 옥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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