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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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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찍고 빅리그 간다

등록 2001-01-03 15:00 수정 2020-05-02 19:21

한국축구 유망주들 진출 잇따르는 기회의 땅… 유·청소년 선수들도 ‘벨기에 드림’ 대열에 합류

벨기에는 원조 붉은 악마의 땅. 요즘 그 벨기에가 한국축구선수들에겐 ‘기회의 땅’, ‘도전의 땅’으로 주목받고 있다. 새 천년 첫해 한국축구는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에 이어 청소년대표까지 잇따라 국제무대에서 침체와 부진의 나락에 떨어져 위기를 맞았다. 그 와중에 벨기에를 해외진출의 새로운 개척지로 찾아 떠난 한국선수들이 많았다. 낯선 땅에서 외롭게 자신과의 싸움을 꿋꿋이 이겨내면서 유럽의 큰 무대 진입을 위한 야망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내에선 무명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기회의 땅에 발을 내딘 뒤엔 왜곡된 한국축구에선 발견되지 못한 잠재력을 높게 인정받아 스타의 꿈을 키워가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설기현의 성공적 데뷔… 스타의 꿈 키운다

지난 7월 대한축구협회가 2002년 한일월드컵 전력향상을 위해 직접 추진한 해외진출선수 1호 설기현(21)이 로얄 앤트워프에서 성공적인 데뷔무대를 치르고 지난해 12월22일 금의환향했다. 리그 초반 허리부상으로 2년간 벼르던 시드니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데 이어 레바논아시안컵에서 무득점으로 부진하자 머리를 짧게 자르고 “적응하기 전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고 뛴 결과, 12게임에서 4골 1어시스트로 주전 스트라이커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해 5월 귀동냥으로 전해들은 벨기에가 너무 좋아 혼자 입단테스트를 받고 합격해 몇달만 참으면 손에 쥐게 될 대학(중앙대) 졸업장도 포기한 채 지난해 8월 버베런에 입단, 1군 공격수로 도약한 이상일(21)은 새해 1월21일 설기현과의 라이벌전으로 재개되는 후반기부터 본격 도약을 노리고 있다. 최근엔 대표경력이 하나없는 무명의 연세대 스트라이커 김창오(22)가 3차례의 입단테스트에서 빠른 스피드와 선이 굵은 파워공격이 코칭스태프의 15쪽 합격리포트로 이어져 벨기에 주필러리그(1부) 1위클럽 브뤼헤 입단이 초읽기에 들어가 있다. “한국에선 무명선수라도 기회의 땅인 벨기에에선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고 싶다”는 각오다.

지난해 10월 호남대 1학년으로 학업을 접고 로얄 앤트워프에 입단한 신영록(19)은 1군 도약을 꿈꾸고 있다. 최근 전북 현대의 연고고교(경희대) 지명선수 김현기(18)와 남궁도(18)의 로얄 앤트워프 입단(임대)은 국내구단들이 유망주의 해외축구유학을 위해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관례를 깨고 선수들이 월봉을 받고 해외실전경험을 늘려가는 새로운 모델이어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오장은(15)과 윤상민(16), 임철민(14) 등도 각각 중·고교를 중퇴하고 2부 몰렌벡클럽 유·청소년팀에 입단해 청운의 꿈을 안고 새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하루 7시간의 학교공부를 마치고 저녁 때 야간훈련으로 1시간 반 동안 운영되는 유소년팀에서 이들은 ‘공부하고 생각하는 축구’를 배우고 있다. 최근엔 안양LG에서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유진오(24)도 2부 몰렌벡에 입단해 재기를 꿈꾸고 있다.

이로써 벨기에에는 1부리그에 6명, 2부리그에 4명의 한국선수들이 포진하게 됐다. 과연 벨기에는 어떤 곳이고 한국축구에 어떤 지향점을 제시해주기에 이처럼 러시를 이루는가.

왜 벨기에인가? 그 질문에 올림픽대표를 거친 국가대표 공격수 설기현은 당당히 답한다. “벨기에가 목표가 아니에요. 새해 6월까지 한 시즌 기량을 연마하고 제 가치를 알려 유럽의 큰 무대로 나가기 위한 교두보일 뿐입니다.” 그는 벨기에에서 내조해온 예비신부 윤미(20)씨에게 “새해 가을 더 큰 무대로 진출한 뒤에 결혼하자”고 약속했다.

그렇다. 벨기에는 유럽 빅리그 진입을 위한 전진기지다. 98프랑스월드컵 때 한국의 ‘붕대투혼’에 1-1로 비겨 한국팬들에게 낯익은 조르주 레켄스 전 벨기에대표팀 감독의 대답도 같다. 자신이 지도하는 로케런 클럽에서 기자를 만났을 때 그는 “나카타를 보라. 만일 한국선수들이 35, 36번째로 이탈리아나 스페인리그에 진출했다고 치자. 어떻게 경기에 뛰겠는가. 한국선수들이 수준차가 큰 빅리그에 직접 가기도 힘들겠지만 가서도 주전을 따내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한국선수들은 벨기에 같은 곳에서 능력을 발전시킨 뒤 진출하는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빅리그 진출 노하우 탁월한 ‘가공무역리그’

벨기에리그는 이탈리아, 스페인, 잉글랜드, 독일, 프랑스 등 ‘빅5리그’ 바로 밑의 수준으로 ‘가공무역리그’로 유명하다. 나라 자체가 가공·중계무역이 번성해 유럽연합(EU) 본부까지 여기에 있다. EU 내 축구선수 자유이적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보스만판결’의 진원지도 이곳이다. 유럽축구 전문가들은 벨기에를 유럽리그에서 8위로 꼽지만 유망주를 키워 빅리그로 진출시키는 노하우나 선수마케팅에선 네덜란드와 더불어 일급으로 평가한다.

벨기에 클럽은 돈이 많지 않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선수마케팅에 전력을 기울인다. 1부리그 18개 클럽에서 뛰고 있는 외국인선수는 162명. 1군선수만으로도 EU권을 제외하고 동유럽(58명), 아프리카(36명), 남미(23명) 순으로 많다. 반면 벨기에선수는 네덜란드(37명), 잉글랜드(12명) 등 유럽 11개국에 모두 89명이 진출해 있다. 이런 활발한 ‘선수장사’가 클럽 생존력의 핵심이다. 클럽 1년 예산으로는 가장 많은 클럽이 안더르레흐트로 9억프랑(이하 벨기에프랑·240억원). 평균치에선 2억9127만프랑(77억9천만원)으로 한국구단들과 큰 차이가 없다. 2부클럽은 재정이 더 열악해 평균 3262억프랑(8억7300만원)으로 국내실업팀 수준이다.

그렇다면 벨기에의 성공적인 ‘선수가공무역’의 원천은 어디인가. 첫째는 해외 유망주의 스카우트와 해외클럽과의 자매결연을 통한 판로개척, 둘째는 자국 꿈나무의 집중육성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무역항 앤트워프를 연고지로 한 두 클럽 중 120년의 최고(最古)역사를 자랑하는 로얄 앤트워프는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선수교류협정을 맺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했고, 베르숏은 네덜란드 아약스에 51%의 지분을 내주면서까지 선수교류는 물론 공동마케팅으로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설기현이 로얄 앤트워프를 택한 것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빅클럽으로 이적할 기회가 높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로케런 클럽 같은 경우 아이보리코스트의 한팀을 정해 흑인유망주들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있다.

벨기에는 또 클럽당 400∼600여명의 5∼19살 유·청소년팀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2000년 벨기에축구협회로부터 유소년육성 최우수클럽으로 선정된 몰렌벡의 샤레 레두안 유·청소년팀 총괄코치는 “아약스의 유소년지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아약스의 재정능력을 믿고 몰려오는 1년에 2만명 정도의 유망주 중에서 가려 뽑아 길렀기 때문”이라며 “1년에 200명 정도 몰리는 우리 클럽도 내용적으로는 아약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몰렌벡은 네덜란드 1위를 달리고 있는 페예노르드와 자매결연을 맺은 팀으로, 몰렌벡 클럽이 “큰 선수로 키워보겠다”고 해서 외국인선수로는 처음 뽑은 오장은 역시 그런 믿음 속에 브뤼셀에서 학업을 병행하며 벨기에 드림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선수인가? 로얄 앤트워프의 에디 워터스 회장은 “한국선수들의 강한 정신력과 강인한 체력,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인상적이어서 한국선수를 4명이나 뽑았다”며 “한국의 대기업과도 상업적인 (스폰서) 관계를 갖고 싶다”고 교류확대를 원했다. 오장은은 지난해 10월 FIFA에이전트가 운영하는 (주)하나스포츠가 마련한 유·청소년유망주 벨기에연수 기간중에 ‘흙 속의 진주’로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됐다. 하지만 레켄스 감독은 “한국선수들은 공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동작을 판단하고 동료들과 협력하는 플레이가 부족한 만큼 그런 장점을 갖고 있는 벨기에선수들에게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종착지 아니다, 배움의 기회를 잡아라!

하지만 최근 올림픽대표 수비수 박재홍(22)이 로얄 앤트워프에서 3주간 입단테스트 끝에 좌절하고 돌아온 실패 사례도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에이전트의 전문영역인 해외선수 이적추진의 관행을 깨고 대한축구협회가 직접 나서다보니 판단 미스와 준비 소홀로 실패를 불렀다. 특히 벨기에가 ‘상품가치’가 낮은 수비수들의 스카우트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모르고 뛰어든 뼈아픈 좌절이기에 분위기에 휩쓸리는 무작정식 벨기에 진출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벨기에 진출 한국선수들 중 대우는 설기현이 받은 계약금 25만달러와 연봉 10만달러가 최고다. 벨기에는 한국선수들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시장은 못된다. 단지 기회와 도전의 땅이다. 레켄스 감독의 충고는 그래서 의미있다. “벨기에는 돈벌러 오는 곳이 아니다. 배우러 오는 곳이요, 더 큰 곳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다.”

김한석/ 스포츠서울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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