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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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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여, 우리를 돌보소서”

등록 2005-06-29 15:00 수정 2020-05-02 19:24

뜻밖의 1차선거 결과가 나온 이란 대통령 선거 현장을 가다
하메이니 신정독재 체제에 대한 염증에 투표소는 텅텅 비었네

▣ 테헤란= 글·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1979년에 일어난 이란혁명은 당시 중학생이던 나의 뇌리에 ‘호메이니’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남겨놓았다. 그 뒤 이란은 호메이니와 일치했고, 호메이니가 죽고 난 뒤에는 이란이라는 나라 전체가 잊혀졌다. 그만큼 호메이니가 나에게 남겨놓은 인상은 깊었다. 이번에 치러진 이란 대통령 선거는 여전히 살아 있는 호메이니를 겪을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제공한 셈이었다.

“고등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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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에 도착하자마자 호메이니와 맞닥뜨렸다. 바로 호메이니가 그려진 이란 돈 때문이었다. 미화로 1달러가 조금 넘는 가치의 지폐가 1만리알인데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이 지폐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위였다. 택시 운전사가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뒤 택시요금을 요구했다. 내가 이란의 지폐 단위를 잘 이해하지 못하자 “호메이니 두장”을 달라고 했다. 이때부터 모든 것이 쉬워졌고 이란인들과의 흥정에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호메이니가 몇장인지만 얘기하면 모든 게 술술 풀렸다.

테헤란에 도착한 날(15일)은 이란 대통령 후보들의 합법적인 선거운동이 허가된 마지막 날이었다. 공항에서 테헤란 도심지까지 들어가는 길거리의 벽에 후보들의 홍보지가 도배돼 있었고, 후보들의 사진이 새겨진 현수막이 거리를 가로질러 걸려 있어 대통령 선거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더구나 번잡한 길거리 곳곳에서 홍보지를 돌리는 선거운동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나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통령 선거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종교의식처럼 치러지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거리가 어두워지면서 테헤란의 중심가인 발리아스르 거리에는 각 후보 진영의 선거운동원들을 비롯해 1만명이 넘는 시민이 모여들었다. 거리에는 차량이 완전히 통제되고 더 많은 시민들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서서히 마지막 밤의 열기가 고조됐다. 한 후보 진영의 젊은 운동원들이 목청이 터져라 후보의 이름을 외쳐대면 다른 후보 진영의 젊은이들도 경쟁적으로 더 큰 소리로 자신의 후보를 외치면서 세를 과시했다.

이날 밤, 선거운동에 참가한 많은 앳된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15살 이상이면 누구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받기 때문에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이란의 선거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새삼 실감났다. 통계상으로 보더라도 4600만명의 전체 유권자에서 30%를 차지하는 1500만명이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다. 이런 현실은 어느 후보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날(16일) 유력한 후보인 라프산자니 후보의 선거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어린 학생들이었다. 많은 운동원들이나 방문객들이 어린 학생들이었고, 이들은 선거사무실에서도 각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와 함께 각 후보들이 학생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쏟는 정성도 각별하다고 이곳의 무스타파 청소년담당위원이 말했다. 후보들은 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을 직접 만난다거나 교육환경을 개혁하겠다는 공약을 학생들에게 직접 설명한다고 했다. “8년 전 무명의 하타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젊은 학생들이었는데 나도 그 속에 있었다”면서 무스타파는 자랑스러웠던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정독재의 성

대선의 막이 오르고 후보 등록이 시작되면서 1천명 이상이 대통령 후보로 등록해 이란인들의 높은 정치적 관심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고감시위원회를 통해 1천명에서 8명으로 대통령 후보가 최종적으로 압축됐다. 젊은 층에서 대통령 선거를 보이콧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도 피선거권의 자유를 박탈당한 허탈감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슬람 신정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한데 대체적으로 두 가지다. 신정독재를 지지하는 쪽은 최고 종교지도자인 하메이니를 신이 임명했다고 믿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지식인들이나 학생들은 신정독재에 엄청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독재정권은 이들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를 한시도 늦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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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대학에서 강의하는 사비르(가명) 교수는 필자와 함께 찻집으로 발길을 옮겨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의 이름을 가명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그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선거는 선거가 아니다. 누군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놓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선거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현재의 선거제도를 비판했다. 대화 도중, 누군가 우리 옆자리에 앉자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찻집을 도망치듯 떠났다. 많은 반체제주의자들은 사비르 교수처럼 선거를 보이콧할 것을 호소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국민들 속에 들어가기 전에 차단되기 때문에 유언비어인 양 호도됐다.

이란의 정치제도는 절대적인 신정독재 체제다. 이슬람교의 성직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란혁명의 상징인 지도자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후계자인 지도자 하메이니가 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권위의 성을 쌓아왔다. 이란의 신정독재를 옹호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알라가 그를 지도자로 임명했다고 믿는다. 하메이니는 종교지도자이지만 항상 현실정치에 개입해왔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는 8명의 후보 중 모인 박사가 감시위원회에서 후보로 승인받지 못하자 감시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그의 권위는 호메이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호메이니 체제에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반체제 시위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교내에서 일어난 적도 있다.

선거가 시작된 날 아침, 필자는 테헤란 북쪽에 위치한 자말란 모스크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대선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인 라프산자니가 투표하기 위해 행차한다는 정보가 있었다. 자말란 모스크로 가는 길은 부촌으로 가는 길이었다. 인구가 1200만명인 테헤란의 시내 중심가는 이미 포화 상태가 되었고, 변두리 지역이 개발되면서 작은 규모의 현대식 신도시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특히 테헤란의 남과 북의 빈부격차는 겉으로도 금방 드러났다. 대규모 오피스텔이나 호텔, 아파트촌들은 모두 북쪽 지역에 들어서 있어 테헤란 남쪽의 조악한 환경과는 비교가 비교됐다.

하타미의 실패, 선거보이콧으로 이어져

자말란 모스크에는 현직 대통령의 행차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경호원들이 동원돼 있었다. 모든 차량이 통제됐고 입구에는 중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서 있었다. 수십명의 경호원과 경찰의 매서운 눈초리를 통과해 모스크로 들어섰다. 모스크 안은 TV 방송요원들과 카메라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잠시 뒤 라프산자니가 입장해 기표한 뒤 투표함에 용지를 넣고는 곧바로 단상에 올라 기자회견을 했다. 유럽의 방송사 기자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핵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예정인가?”라고 물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란의 대통령 선거 결과가 앞으로 서방세계의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라프산자니는 이란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최고 종교지도자인 하메이니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방세계와의 마찰을 가장 효과적으로 풀어갈 유력한 인물로 꼽힌다. “이란의 평화적인 핵개발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너지 개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누차 밝힌 대로의 답변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질문도 있었다. 미국과의 조건부 관계 정상화가 그의 입장이다. 그는 “1979년의 혁명 뒤 미국 은행에 동결된 이란 정부의 돈을 돌려준다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밝혔다. 라프산자니가 모스크 내에서 외신과 회견을 하는 동안 모스크 대문 앞에서 헤자브로 머리를 가린 10여명의 이란 여성들이 “라프산자니, 우리의 지도자!”를 열광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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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퇴임하는 대통령 하타미가 투표를 하는 내무부로 달려갔다. 하타미는 이란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지만 대통령으로 재직한 8년간 종교지도자들이나 군부지도자들에게서 많은 압력을 받으면서 제대로 개혁정책을 펴지 못했다. 그가 정책추진 과정에서 보여준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은 반체제 인사들과 젊은 지식인들이 대통령 선거를 보이콧하는 근거가 됐다. 하지만 하타미 대통령의 높은 대중적 친화력은 이란 언론인들의 반응에서도 확인됐다. 그가 들어서자 기자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는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내무부 청사를 뒤로 하고 조금 내려가자 파테미 광장이 나왔다. 텅 빈 거리를 건너자 갑자기 어디에선가 한 청년이 다가와 자신이 투표소로 안내해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이전에 비하면 투표소가 거의 텅텅 빈 상태”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스스로 열을 받은 듯 “이게 무슨 선거냐?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아예 후보로 나설 수도 없고 종교지도자가 정해준 사람들만 투표해야 한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길을 걸으면서 갑자기 높아진 그의 목소리로 인해 이방인인 내가 오히려 그의 열을 가라앉혀야 할 처지가 됐다. “아마 대선에 투표하는 사람들은 50%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선거 보이콧의 목표를 묻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 종교지도자인 하메이니를 국민들이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개투표… 누구를 찍는지 다 안다

현대식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는 비밀기표소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곳에서 서성이는 선거관리인들은 유권자들이 누구에게 기표하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투표소 안에서 가족과 함께 투표함에 표를 던지고 나오는 아쉬프 교수(아자르대학 전산학과)에게 조용히 누구를 찍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라프산자니를 찍었다고 떠들었다. 라프산자니를 찍은 이유를 묻자 그는 당황하며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가장 강한 후보이니 지지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테헤란의 중심가 페르두시 광장의 한 모스크에 설치된 투표소에서는 군경이 삼엄한 경계태세를 펼치고 있었다. 중무장한 세명의 군인과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이 투표소에 입장하는 남성 유권자들 중 의심이 가는 사람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6월12일), 남부의 석유 생산 도시인 아흐바즈에서 폭탄이 폭발해 8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어 선거 당일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이란의 전 경찰력이 동원돼 비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헤자브를 둘러쓴 여성 유권자들은 모두 가족 친지들과 무리를 지어 투표소에 들어왔다. 이 투표소는 다른 투표소와는 달리 여성과 남성의 기표소와 투표소가 완전히 분리돼 있었다. 선거관리위원들도 여성쪽은 여성위원들, 남성쪽은 남성위원들로 갈려 있었다.

내가 투표소인 모스크의 대문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두명의 70대 노인에게 다가가 투표에 참여했느냐고 묻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아주 저조한 상태”라고 말했다. 투표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투표를 해봐야 바뀌는 게 없는데…” 하면서 하늘에 눈을 던졌다.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고스란히 배어나왔다. 잠시 뒤 나를 향해 중무장한 병사가 농담을 걸면서 다가오자 그들은 날씨 얘기로 말머리를 돌렸다.

별 성과도 내지 못했던 대통령 라프산자니가 다시 강력한 후보로 출마하자 지식층이나 젊은이들은 선거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선거를 통해 이란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라프산자니의 재출마와 당선은 “국민들에 대한 모독이자 이란의 정체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1979년 이란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세속정치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 사사건건 개입해왔다. 이로 인해 당시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세대들조차 이제는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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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투표가 있던 오후, 페르두시 광장에서 만난 테헤란의 한 병원 내과의사가 현실정치를 부정하는 근거는 좀 달랐다. “하메이니는 호메이니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지만 나는 절대로 그를 인정할 수 없다. 호메이니가 죽을 때 하메이니가 후계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증거도 없다. 당시 대통령이던 라프산자니와 몇명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메이니를 최고 종교지도자로 만들었다”고 현재의 정치체제를 강력하게 부정했다.

아흐마디네자드, 650만표의 충격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결과 팔레비왕 체제를 붕괴시키고 이란의 혁명을 이끌었던 호메이니는 여전한 권위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메이니에 대해서는 누구도 드러내놓고 비판하지 않았다. 반면 내과의사의 말처럼 제2의 호메이니이자 최고 종교지도자인 하메이니의 권위는 이미 금이 갔다. 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은 최고 종교지도자도 국민투표로 뽑아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체제에 대한 부정은 2년 전 테헤란대학의 학생시위를 통해서도 표출된 바 있다. 혁명 초기에도 이란의 신정 체제를 부정하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호메이니의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혁명 뒤 26년이 지난 지금 이란의 젊은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각지에서 보이콧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이란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투표가 끝난 뒤 4600만명의 유권자 중 단지 2400만명만이 투표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50%가 조금 넘는 투표율은 이란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서구 세계의 저조한 투표율은 정치적 무관심에서 나온다지만 높은 정치적 관심을 가진 이란인들의 자발적인 투표 불참은 그 의미가 다르다.

집계 결과 예상대로 라프산자니가 700만표로 선두를 지켰지만 2등은 뜻밖이었다.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650만표로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선두인 라프산자니와 2위인 아흐마디네자드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한달이나 뒤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던 결선 투표는 24일 이루어진다고 공식 발표됐다. 사상 첫 결선 투표인 것이다. 모인 등을 지지하던 좌파는 중도파인 라프산자니 지지를 표명했고, 보수파는 아흐마디네자드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6월24일 오후2시 현재, 누가 대통령이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어쨌든 저조한 투표 참여율은 이란에서는 꽤 의미심장한 일일 수밖에 없다.



12명의 후보, 그들은 누구인가

극좌 모인 - 중도 라프산자니- 보수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대부분의 후보들은 종교지도자들이거나 종교권에 속한 인물들이다. 후보를 승인하는 최고감시위원회의 12명의 위원들 중 6명이 이슬람 성직자이며 나머지 6명은 법률가다. 대부분의 이란 국민들은 성직자 출신 위원들에 의해 모든 결정이 좌지우지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1979년 이란혁명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공통의 합의하에 정치권은 여러 색깔을 띠고 있다. 전 교육부 장관인 모인은 극좌인데 개혁 성향의 젊은 층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으며, 라프산자니와 함께 2차 선거의 경쟁상대로 유력하다고 예상됐지만 탈락하고 말았다. 모인 다음으로 우파쪽으로 가면 칼루비를 들 수 있다. 칼루비도 개혁파에 속하는 종교 지도자지만 무인과 함께 단일 후보를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좌파는 정치 개혁과 서구 세계와의 관계 개선이라는 개혁정책을 주장한다. 하타미의 정책 기조도 개혁과 개방이었지만 사실상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이슬람 성직자들과의 빈번한 마찰로 인해 개혁정책은 거의 실행될 수 없었다.
다음이 중도 성향의 라프산자니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미 혁명 초기부터 권력의 핵심에 있었고 하타미 대통령 이전에 이미 대통령직을 8년(1989년~97년) 동안 수행했다. 라프산자니는 이슬람 성직자로서 혁명 당시 지도자 호메이니의 가장 충실한 측근으로 이란 내에서 수행한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3년간 옥살이한 경력도 있어 호메이니 혁명을 계승한 적임자로 자처하고 있다.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국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지 못했다는 여론이 형성돼 있지만 ‘구관이 명관’이란 식의 맞불 여론도 형성돼 있었다. 1차 투표에서 21%를 기록하며 제일 많은 표를 얻었다.
다음은 우익 후보들로 이슬람 국가라는 지상목표를 내걸고 더 강력한 신정 체제를 주장하고 있다. 칼리바프와 라리자니, 아흐마디네자드 등이 이에 속한다. 이번에 결선 투표에 오른 이란의 우파를 형성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 성직자들이며 서구 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절대적 경계를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다. 예상과 달리 테헤란 시장 아흐마디네자드가 결선에 오르면서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은 귀환을 꿈꾼다

호메이니 혁명으로 축출됐지만 석유에 대한 미련은 남아…

팔레비왕조가 몰락하고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지나친 국고 낭비와 이슬람교에 대한 경시, 서구지상주의를 들 수 있다.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많은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으나, 당시 팔레비 국왕은 석유를 판 대금을 대부분 미국의 무기를 사는 데 사용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자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거기다 팔레비왕은 미국에 아예 선금을 걸어놓고 무기를 구입할 정도였다. 팔레비왕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고초를 겪었던 이슬람 성직자가 바로 호메이니였다. 1963년 이후 세 차례나 체포됐고 1964년에는 터키로, 이후에는 이라크, 프랑스 파리로 망명을 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는 망명 중 여러 차례 “팔레비가 있는 이란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위와 파업이 계속됐고, 팔레비왕은 1970년대 중반기부터 서방세계의 지원만을 기다리는 식물인간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시위에 대한 유혈진압은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대중적인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1977년 팔레비왕이 미국 카터를 방문했을 때 6만명의 이란 미국 유학생들이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한 것은 전세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공동성명을 읽던 팔레비왕과 카터 대통령이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던 장면은 TV를 통해 전세계인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됐다. 미국에서 돌아온 팔레비왕을 기다린 것은 국민들의 전국적 항쟁이었다. 1년 조금 더 지난 뒤에는 혁명세력에 항복하고 이란을 떠나는 비운의 왕이 되어야 했다. 팔레비왕이 떠나면서 파리에 망명했던 호메이니가 귀국했고 다음날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이자 정치지도자가 됐다. 팔레비왕이 축출되면서 서방세계의 모든 관공서와 기업들, 외국인들도 함께 이란에서 축출됐고, 서방과의 모든 외교관계도 전격적으로 단절됐다. 이 상태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미국은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고 항상 귀환을 꿈꿔왔다. 미국은 실리적인 면에서도 이란을 포기할 수 없었다. 미국은 여러 차례 이란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를 했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을 통해 8년간 이란-이라크 전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군사적으로 이란을 압박하고 있으며, 핵 문제를 통해 이란과의 전격적인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 서방 언론을 통해 핵 문제를 전면적으로 이슈화하면서 이란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도 사실은 이란을 군사적으로 공격해 파탄에 빠뜨리기보다는 이란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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