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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센 백인종을 닮고 싶다”

등록 2004-04-22 15:00 수정 2020-05-02 19:23

화이신화의 위기와 몰락을 대체한 백인신화, 한국인들의 서구중심주의 세계관을 완성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보통 교과서들이 ‘근대 계몽기’의 성과를 나열할 때 꼭 들어가는 대목은 이른바 화이(華夷)적 세계관의 해체, 즉 근대적 세계관의 성립이다. 근대화야말로 우리 역사의 귀착점이라는 방식의 목적론적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이 ‘근대적인 세계관’을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한다. ‘근대적’ 세계 지리와 세계사 교과서들이 보급되어 한국인들이 드디어 “중국이 문명의 중심”이라는 케케묵은 관념을 버리고 세계 전체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서삼경, 서구 · 일본 저술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 교과서적인 역사 인식은, 개화기의 세계 역사·지리 교과서들이 세계 전체를 어떤 분류법으로 묘사했는지, 화이 질서라는 중세적인 지리적 위계 의식을 대체한 것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새롭게 위계화했는지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세계관’이라는 것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도 일종의 ‘의사(擬似) 종교’의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왜인가? 종교가 경험 밖의 영역에 대한 선험적인 믿음을 기초로 하듯, 세계관은 우리가 가보지도 못한 지역에 대해서까지 가치 판단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도들이 경전을 토대로 하여 지옥·천당과 같은 체험 불가의 설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듯, 사람들은 신문·잡지·교과서 등의 권위적인 저술을 통해서 외지에 대한 ‘믿음’과 같은 식의 의견을 갖게 된다.

근대가 ‘합리성의 시대’로 불리지만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신문들의 ‘인도 탐험 이야기’를 보고는 인도를 ‘거지와 구도자의 신비스러운 낙토’로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 정보력이 좋아진 오늘날 상황이 그 정도인데, 구한말의 상황은 어느 정도였겠는가? ‘근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중화(中華)주의를 대체한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은 서구·일본 저술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교과서와 일본 신문들은 믿고 따라야 할 ‘새로운 사서삼경’이 돼 미지 영역의 길잡이가 됐다.

‘근대화’라고 부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전범(典範)의 교체’와 함께 세계의 위계적 분류법도 아울러 교체됐다. 중화를 둘러싸 그 ‘덕화’(德化)를 입는 ‘사방의 오랑캐’(동이·서융·남만·북적) 자리를 ‘우월적인 백인’과 그들에 의해 정복되거나 멸종당하는 ‘유색 인종’들이 차지하게 됐다. ‘화이 신화’의 위기와 몰락은 ‘백인 신화’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백인 신화…. 100년 전에 아무 거부감 없이 썼던 백인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선진국 시민 내지 구미인 등의 동의어로 대체되곤 한다. 우리의 대미 인식은 증시를 엎치락뒤치락하고 북핵을 빌미로 한반도의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를 그들의 재력·무력에 대한 두려움·경계심과, 그들의 권위를 빌려 영어공부나 유학을 통해 출세하려는 욕망 등 여러 콤플렉스들의 복합체이다. 우리의 눈은 백인종을 100년 전에 봤던 ‘신지식인’들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0년 전에 백인을 선망하는 목소리만큼 백인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역사의 중심에 선 ‘힘센 백인종’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은 친미적인 백인우월주의자와 친일적인 ‘황인종 연합론자’들의 공통분모였다.

무서워라, 백인 러시아!

오늘날의 백인 숭배는 대개 ‘선진국의 전례’를 운운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지만, 100년 전에는 인종주의의 광풍에 휩싸였던 당대의 유럽이나 일본 못지않게 ‘백인종의 천부적 우월성’을 노래하는 것이 ‘문명 개화적’ 세계관의 중요한 표현이었다. 친미파가 발간한 이 “백인이 인종 중에 제일 영민하고 부지런하고 담대하다”(1897년 6월24일치 논설)는 백인 찬가를 부른 것은 서재필 등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놀랄 일이 안 되지만, 미국에 가본 일 없던 친일적 성격의 개신 유림들이 모인 에서도 백인들을 “정신적·신체적 최상위를 점하고 전 세계를 가득 메운 인종”( 제15호, 1909년 4월)으로 부르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백인 따르기’는 친미·친일적 논객만의 특성이었을까? “황인종 연대론대로 서로 연대해야 할 황인 중에서 과연 백인처럼 남을 침략하는 자가 없는가?”라며 일본의 침략성을 지적했던 재일 유학생은, ‘생존을 위한 민족 집단들의 세계적 경쟁’을 이야기하면서 독립전쟁 시대의 미국인들을 ‘애국적인 분발의 모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미국인들의 인종주의적인 ‘황인종 배척’을 ‘인종 보호의 본능’이라고 변호해주기도 했다(포우생 ‘경쟁의 근본’, 제22호, 1908년 6월).

강력한 항일적 성격의 도, ‘자기 민족에 대한 소속감이 없는 한국인들의 사상적 유치함’의 근원으로 ‘벽안의 백인으로 찬 런던·베를린으로 나가보지 못한 것’을 들거나(1909년 9월18일치 논설, 사상 변천의 등급) 만주로 이주 가는 한국인들도 미주·오스트레일리아·아프리카로 이민간 백인이 토인을 박멸해 강력한 나라들을 세웠던 것처럼 ‘정치 능력을 배양’하길 바라는(1910년 1월22일치 논설, 만주 문제에 대해서 재론함) 등 백인을 모델로 삼은 차원에서 기타의 개화기 매체와 별 차이 없었다. 전 세계에 ‘문명’을 가져다준 백인종은 중국 고대 성현을 대체한 ‘새 시대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세계는 민족·국가간의 경쟁의 무대’가 그 당시 개화적 지식인의 상식이었던 만큼, 동시에 백인종이 강하고 우월할수록 위협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이 넘치면 밖으로 흘러내리듯이 힘이 넘치는 집단이 곧바로 약한 집단을 침범하는 것이 약육강식·우승열패”라는 것은 유교를 대체한 사회진화론의 중심 원칙이었기에 ‘모범’은 곧바로 ‘위협’이었다. 특히 한반도에 인접하고 실제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해 침탈의 야욕을 가졌던 ‘백인의 러시아’에 대한 공포증은 남달랐는데, 친일적 성격의 개화파 인종주의자의 경우에는 이 ‘공로증’(恐露症·러시아에 대한 맹목적 공포)은 곧바로 일본을 맹주로 하는 ‘황인종의 연합’ 논리로 이어지곤 했다.

러시아에 기대려 했던 민씨 척족의 정적들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제1세대의 개화파들이 “러시아 백인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같은 황인종인 일본의 도움이 필수”라는 논리를 전개하여 정치적 부일 협력의 뒷받침으로 삼았다. 그 뒤 윤치호가 편집한 시절의 에서는 ‘황인종의 보루 일본’을 “황인종이 앞으로 나아갈 움싹이며 법률과 정치를 바르게 할 거울이며 도적을 물리칠 장성”이라고 극찬했다(1899년 11월9일치 논설).

일본은 황인들의 보호자?

고종 측근의 일부 친러·친미적 계통의 정객(이용익·이범진·민영환 등)을 제외한 대다수 개화기 인사들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을 ‘백인 호랑이 러시아’를 물리치는 ‘황인들의 보호자’로 인식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가 십분 이용한 이같은 ‘백인 공포증’은 제국주의 세력의 세계 지배에 대한 원론적인 부정이나 백인우월론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다. 세계라는 싸움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도 백인의 문명을 전부 받아들여 백인처럼 강해지든지 아니면 이와 같은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친 일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득책이라는 것은, 윤치호와 같은 그 시대의 대표적 ‘황인종 연대론적’ 인종론자들의 정론(政論)이었다.

미국과 유럽이 과거의 요순 시대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고, 백인의 상(像)이 과거의 성인군자 상을 밀어내고 우월적인 모델로 부상됐던 100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화기의 표면적인 키워드는 자유와 독립이었지만 중화주의의 정전(正典) 대신에 서구 중심주의의 정전에 포획된 것은 결코 자유도 독립도 아니었다. 자유와 독립은 억압적인 세계 체제의 코드를 내면화하여 그 속에서 틈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독립은 그 체제를 조감하면서 상대화한 채 그 모순을 먼저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요즘의 이민과 조기유학 붐, 원정 출산, 유아 영어교육 등의 병리적인 증후군을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아직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가 거의 종교와 같은 열정의 대상이지 독립적인 상대화·문제화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인은 세계에서 제일 영민한 인종”이라는 식의 표현 방식이야 고쳐졌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를 넘어선 ‘지구의 짓밟힌 자들과의 연대’를 이미 1970~80년대에 함석헌 선생과 같은 분들이 외쳤지만 우리 마음속의 서구 중심주의적 전범을 깨고 나서야만 우리의 세계관은 집단주의적 ‘의사 종교’에서 이성적·자율적 세계인식으로 발전될 것이다.

[읽을자료]
-고미숙, , 책세상, 2001.
-김도형, 한말 계몽운동의 정치론 연구 - , 54호, 1986.
-박찬승, , 역사비평사, 1992.
-유영렬, , 한길사, 1985.
-정창렬,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 - , 일조각,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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