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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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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참골단 권투인생

13년 만의 복귀전 승리한 WBA 슈퍼페더급 전 세계챔피언 최용수
등록 2016-05-12 17:21 수정 2020-05-03 04:28
*육참골단(肉斬骨斷)·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의도’가 ‘각인’된 ‘몸’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를 규율과 훈련을 통해 ‘특정한 의도를 띠게 된 몸’이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운동선수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여기 ‘본능’이 ‘각인’된 ‘몸’이 있다. 권투선수 최용수(44). 그는 “상대가 아무리 빨라도 주먹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 순간, 몸이 반응한다. 먼저 피하고, 내 주먹으로 상대를 때리면 이기는 게 권투”라고 했다.

일곱 방 성공, 두 방 은퇴

최용수는 국내에서 복싱의 인기가 대단했던 1990년대에 ‘슈퍼스타’였다. 2남7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는 1989년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그저 공부하기 싫어서 큰형님이 있던” 서울로 올라왔다. 우연한 기회에 동네 체육관에서 권투와 인연을 맺었다. 뒤늦게 만난 권투와의 궁합은 환상적이었다.

18살에 뒤늦게 시작했지만, 4년 만에 한국챔피언에 올랐고, 3개월 뒤 동양챔피언 벨트마저 가져왔다. 다시 2년 뒤인 1995년 10월, 아르헨티나 원정에서 우고 파스를 10회 KO로 꺾고 세계권투협회(WBA) 슈퍼페더급 세계챔피언이 됐다.

이후 3년간 무려 7차례 챔피언 방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가 방어전에 성공할 때마다 언론들은 ‘다섯 방(5차 방어전) 성공’ ‘여섯 방 성공’ 같은 말을 쏟아냈다. 세계권투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조인주와 함께 한국 권투에서 ‘마지막 복수 챔프 시대’를 만들었던 선수이기도 하다.

“그때라고 두려운 게 왜 없었겠어요? 링에 올라가기 전에는 항상 무섭고, 긴장되죠. 하지만 일단 올라가는 거예요. 그 위에서는 상대방한테 어떻게 하면 이길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공이 울립니다. 그럼 싸우는 거죠.”

전성기 시절, 그의 강력한 오른 훅과 연타 능력은 대단했다. 게다가 몸의 반응 속도, 상대 주먹의 움직임을 헤아리는 ‘동체 시력’은 타고난 것이었다. 특히 상대만 보고 달려드는 ‘인파이터’의 전형에 팬들은 환호했다.

“스텝을 뛰면서 링을 돌다가 공격 기회를 엿보는(아웃복싱) 대신 스텝을 많이 밟지 않아요. 내 자리에서 상체 움직임만으로 상대 주먹을 피하고, 내 주먹은 빠르게 날리는 겁니다. 그렇게 압박해서 상대가 지치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게 진짜 인파이터인 거죠. 복싱에서 풋워크(발놀림)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난 후배들에게도 ‘인파이터’는 기본적인 풋워크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편이에요.”

힘겨운 계절이 찾아왔다. 1998년 5월 일본의 하타케야마 다케노리에게 패해 챔피언벨트를 내놔야 했다. 국내에 ‘IMF 한파’가 닥쳐 제대로 시합조차 잡기 힘겨웠던 시절이다. 이듬해 1999년 12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권투를 시작한 지 10년째, 27살 때였다.

2001년 그는 첫 번째 복귀를 선언했다. 곧바로 두 경기 연속 KO승을 거뒀지만, 2003년 1월1월 WBC 슈퍼페더급 타이틀매치에서 타이의 시리몽콜 싱마나삭에게 패하며 챔피언의 꿈이 무산됐다.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경기가 잡히지 않았어요. 국내에서 권투 인기가 완전히 식었고, 경제가 어려워 기업 후원을 찾기도 어려웠지요. 프로모터와 매니저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시절이니까, 타이틀 없이 권투선수로 남아 있을 의미가 없었어요.” 한국에선 세계챔피언조차 한 해 수입이 1천만원을 넘기기 어려웠을 만큼 힘든 시절이었다. 통산 전적 34전 29승(19KO) 1무 4패.

몸에 새겨진 저돌성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서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2006년엔 이종격투기의 일종인 ‘K1’ 선수로 ‘외도’를 했다. 격투기 선수로 첫 3경기에서 2승1패를 거뒀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신생 격투기 업계에서는 계약금과 대전료 같은 돈 문제로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그는 “K1 얘기는 빼고 해달라. 한때 선수로 뛰었지만, 정이 가지 않는 운동”이라고 했다. 결국 2009년 선수생활을 접었다. 이후 선수로서 ‘주먹’을 아예 쓰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난 4월16일 권투링에 돌아왔다. 2003년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한 뒤, 무려 13년 만에 다시 치른 권투경기였다. 상대는 프로 통산 9승(7KO승) 5패 1무의 중견 복서 나카노 가즈야(30·일본). 충남 당진 호서고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특설링이 ‘7방 세계챔피언’의 복귀 무대였다. 초라해 보였다. 전성기 시절이 아니다. 때린 만큼 많이 얻어맞았다.

그러나 그의 몸에 각인된 ‘저돌성’만큼은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자기 몸을 일단 내주고, 상대 주먹이 나오는 틈을 노려 더 많이 때리는 특유의 ‘인파이팅’에 상대가 무너졌다. 8라운드 1분35초 만에 심판이 경기를 멈추고, 최용수의 오른손을 들었다. 앞서 최용수가 두 차례나 링 바닥에 나카노의 무릎을 꿇게 한 상황이었다. 그는 “물론 승패가 중요하다. 그러나 지더라도 링에서 팬들에게 욕먹지 않는 경기를 하는 게 나한테는 더 중요하다”고 했다.

5월4일 경기도 시흥시 ‘최용수복싱체육관’에서 만난 최용수는 “복귀전에서 6라운드쯤 경기가 끝날 듯하면서 안 끝나니까 살짝 짜증이 나더라. 7라운드에 다운을 뺏었는데, 엉덩이가 안 닿고, 무릎을 꿇기에 가서 한 대 더 때려줬다”며 웃었다.

그는 ‘말이 짧은, 게다가 장난기를 잔뜩 품은 동네형’ 같았다. 그러나 이내 눈매에서 매서운 빛을 냈다. 그는 “KO로 이겼다거나, 몇 년 만에 복귀해서 이겼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내가 다시 복싱에 돌아왔고, 이게 이벤트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끝을 보기 위한 시작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끝을 보기 위한 시작

30대 초반 떠났던 링에 40대 중반이 돼서 다시 돌아왔다. 내 몸의 모든 허점을 노출시킨 채, 먼저 상대를 무릎 꿇려야 한다. 고통스런 주먹이 기다리는 곳이다. 힘겨운 체중 감량도 다시 이겨내야 한다. “시합을 앞두면 누가 말만 걸어도, 아무 이유 없이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괴로운 일”이라는 과정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다시 링으로 돌아왔을까?

최용수는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다. 운동을 안 해서 맞는 주먹이 있고, 운동을 열심히 해도 못 보고 맞는 주먹이 있다. 결국 권투란 내 살을 내주고 상대 뼈를 취해서, 승리라는 결과물을 얻는 과정이다. 대개 다른 인생살이와 비슷한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무려 44살이다. 흔한 말로 ‘운동선수로는 환갑, 진갑 모두 지난’ 나이다. 신체적 능력에서도 젊은 선수들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용수는 “운동선수로서 나이가 든다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실제 스파링을 하거나 경기를 해봐도 밀리지 않는다. 결국 정신력 싸움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20년 전 인터뷰에서도 “승부는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이미 50%가 갈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디까지 가볼 생각인지’ 물었다. 그는 “끝을 보려고 시작했고, 시작했으니까 끝을 볼 것”이라고 답했다. 세계챔피언을 노린다는 뜻이다. 국내에는 2007년 7월 지인진이 WBC 페더급 타이틀을 자진 반납한 뒤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 경기는 9월쯤으로 예상하고 있다. 올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이 8월에 있는 만큼, 이 시기를 피해야 방송 중계를 따내기 수월할 것이란 계산이 작용했다. 몸을 더 정교하게 만들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다. 최용수는 “앞으로 2년을 잡고 있다. 그 안에 세계챔피언 타이틀전을 치르든, 은퇴 경기를 치르든 승부를 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대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그냥 인파이팅

이날 인터뷰는 애초 ‘취중 토크’로 진행됐어야 했다. “딱딱한 인터뷰보다 술자리에서 얘기를 잘하는 편”이라는 그와 인터뷰 뒤 ‘낮술’을 걸쳤다. 소주잔이 여러 순배 돈 뒤 ‘무뚝뚝한 동네형’은 말과 표정을 풀었다. 오래된 유행어 “헐”을 연발하던 그가 밝힌 복귀전의 ‘비밀’은 이랬다.

“평생을 인파이팅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이번 복귀전에서는 원래 아웃복싱을 하려고 했어요. 나이도 있고…. 그런데 링에 올라갔더니 그냥 인파이팅이 되더라고요. 앞으로도 화끈한 경기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웃음)”

인문학으로  본   권투


불한당의  시대에  날리는  펀치


민족권혼(民族拳魂). ‘권투’(拳鬪)라는 낱말은 에 처음 보인다. “중국군은 권투라는 놀이가 있어, 어깨와 무릎을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天兵有拳鬪之戱 肩博膝未嘗少休, 1594년 4월24일) 병조판서 한음 이덕형이 선조에게 아뢴 말. 왜란으로 신음하던 조선 조정의 근심이 묻어난다.
‘조선의 주먹’(조권·朝拳)은 일제강점기 민족혼·애국심과 동의어였다. 유각권(유도·씨름·권투)의 하나였던 과도기를 지나, 1936년 일본 밴텀급 챔피언에 오른 현해남이 수상식에서 한복을 입고 등장한 순간, 권투는 스포츠 오락을 넘어 조권의 혼을 드러내는 절정이었다. 이후 한국 권투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만능, 승리지상주의에 휩쓸리면서 점차 혼을 잃고 돈에 탐닉하고 만다. 1960년대 1만 명을 훌쩍 넘었던 아마추어 등록 선수는 2000년대 들어 2천 명 수준으로 추락했다.
독일의 시인·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그는 한 노래극에서 육체의 기쁨을 넷으로 압축했다. 먹기, 사랑하기, 술 마시기. 그리고 권투하기.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유명한 그는 권투광이었다. 권투선수를 주인공 삼은 소설도 썼던 그는 작업실에 펀칭볼을 걸어두기도 했다. 브레히트는 권투 시합이라는 싸움을 생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무산계급)의 투쟁으로 읽었다. 그에게 권투의 사각링은 연극 무대의 지향점을 은유하는(“매혹적인 사실성”) 강력한 공간이었다. 브레히트는 권투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권투는) 거대한 호수의 저편에서 건너온 위대한 오락거리 중의 하나.”
극기복례(克己復禮). 권투의 근본은 뻗어치기(스트레이트)·돌려치기(훅)·올려치기(어퍼컷). 여기서 90가지가 넘는 연결동작이 나오고, 상대와 맞서는 공격·방어에서 1500가지의 기법이 나온다. 극한에 가깝게 몸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하는 권투. “제대로 운동을 배우면 어디 가서도 욕을 안 먹는다.”(최용수 선수) 이 말은 자신의 삿된 욕망을 넘어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는 극기복례( 안연 편)에 다름 아니다. 주먹을 가리키는 한자 ‘권’(拳)에는 정성껏 소중히 받들다라는 뜻도 있다.
너클파트(knuckle part). 잘 쥔 주먹의 중심, 정권(正拳). 땀을 폄훼하고 노동자를 핍박하는 불한당(不汗黨)이 권력을 쥔 현실. 땀 흘리지 않는 불한당의 정권(政權)이 판을 치는 시대. 민중이 날릴 수 있는 너클파트 펀치는 과연 무엇일까.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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