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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팬에 무릎 꿇어야

2008년 올림픽 이후 급증한 여성팬 덕분에 성장한 프로야구… KT 장성우의 일탈에서 드러난 삐뚤어진 여성관, 실종된 소통능력
등록 2016-03-10 13:06 수정 2020-05-02 19:28

30년 전 야구장은 남근들의 광장이었다. 대부분의 관중이 ‘난닝구’ 차림으로 경기를 보며 뿜어대는 담배 연기에 야수들의 시야가 흐려질 정도였다. 한국어로 조합 가능한 모든 욕설이 난무했고, 소주병과 오물이 그라운드 안으로 날아들었다. 등 뒤에서 야유를 보내는 관중과 발끈한 외야수가 욕설을 주고받으며 설전을 벌였고, 선수단 버스는 자주 점령당하거나 급기야 화염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어쩌다 남자친구에게 이끌려 야구장에 온 젊은 여성은 3시간 동안 등 뒤에서 쏟아지는 아저씨들의 시선과 음담패설을 견뎌야 했다.
한국 프로야구 시장이 도약한 계기는 전문 스포츠 채널 출범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획득이었다. 집에서 야구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야구는 선수의 특징과 종목의 매력에 대한 범국민적 접근이 가장 용이한 스포츠가 되었다. 만화 같았던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획득 과정은 이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여성팬은 늘었으나 여성팬에 대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인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용일 기자

여성팬은 늘었으나 여성팬에 대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인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용일 기자

어떤 종목보다 다양한 캐릭터를 매일 밤 3시간씩 만날 수 있는 야구에 여성팬들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난닝구’ 대신 응원팀의 티셔츠를 입은 관중이 야구장을 메웠고, 욕설과 음담패설은 응원가와 함성으로 대체됐다. 남자친구 따위가 없어도 여성들끼리 야구장을 찾아갔고, 공수 교대 시간은 치어리더의 역동적인 율동으로 끓어올랐다. 선수들은 연예인이 되어갔고, 자유계약(FA) 선수의 몸값은 비정상적으로 폭등했다. 2015년 한국 프로야구가 76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원년 대비 500% 이상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배경은 무엇보다 여성팬의 급증이다. 한국 프로야구 종사자 모두가 여성팬들에게 무릎 꿇고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말, 한국 프로야구는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삼성 라이온즈 주축 투수들의 해외 원정 도박의 여파도 컸지만,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KT 위즈 포수 장성우의 일탈이었다. 장성우가 여자친구에게 늘어놓았던 동료 야구인에 대한 음해와 여성팬에 대한 모욕, 치어리더에 대한 음담패설은 어떤 언론사도 그 워딩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저열했다. 홧김에 그 내용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폭로한 여자친구의 행동도 상식적인 성인의 사고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것이었지만, 농담이든 진담이든, 장성우의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입으로 표현된 그 발언들은 자칫 한국 프로야구 전체를 공멸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장성우의 사례는 자기관리 실패가 아니라 자기관리 개념이 아예 실종된 경우였다. 자신의 연봉과 생계가 누구의 응원과 후원에 기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다. 이미 우리는 프로야구에 여성팬과 여성인력이 대거 유입되면서 야기된 몇 가지 비극을 알고 있다. 장성우 문제에 묻히긴 했지만, 한국 프로야구에는 선수들의 크고 작은 사생활 문제에 대한 루머가 차고 넘친다.

결국 이것은, 한국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밟아야 하는, 건전한 상식과 소통의 훈련으로부터 유리된 성장 과정의 문제로 보인다. 학교 수업에서 배제되고, 남자들로 가득한 합숙과 훈련으로만 이루어진 청소년기를 거쳐, 프로야구 선수가 된 이후에야 사회와의 소통을 시작하니, 상식과 동떨어진 서툴고 거친 사건·사고들이 터져나온다.

어린 선수들에게 또래 학생들이 받는 교육과 생활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비단 선수 개인의 인격화뿐만 아니라 한국 프로야구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올림픽 금메달로 힘들게 얻을 수 있는 팬의 수보다, 사건·사고로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팬의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급격하게 유입된 여성팬들에 의해 쉽게 스타가 되어버린 선수들의 폭주는 한국 프로야구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다.

지난 2월 24일, 수원지방법원은 장성우에게 명예훼손 혐의로 700만원의 벌금을 선고했고, 검찰은 너무 적은 형량에 항소를 해놓은 상태다. 그러나 법적 판단과 무관하게 그는 이미 야구장이라는 법정에서 1천만 명의 배심원으로부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태다. 명심해야 한다. 한국 프로야구의 끝은 여성팬들이 등 돌릴 때 온다. 무엇보다, 야구선수든 그 누구든, 자신의 연봉이 누구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사랑받는 사람들이 어떤 예의를 갖추며 살아야 할지 뼈저리게 성찰해야 한다.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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