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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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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클리셰

등록 2011-12-16 01:55 수정 2020-05-02 19:26

지난 추석 때 외가에 갔더니 막내이모가 물집 잡히고 엉망이 된 손을 자랑스레 보여줬다. 골프 연습하느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울 강서 지역의 만만해 보이는 아파트에 사는 착실한 월급쟁이 독신녀인 막내이모에게 에어로빅이나 요가는 어울려 보였지만 골프는 도무지 매치가 잘 안 되는 것이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 이정아 기자

그건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골프에 대한 이미지를 확고히 해준 탓이다. 의 한 장면을 보자. 오현아(이미숙)는 골프를 칠 때마다 남편 노 회장(박영규)에게 핀잔을 준다. 남편이 에티켓을 지키지 않고 ‘양아치처럼’ 자꾸 공을 건드리면 자기가 ‘쪽팔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의 꼭대기에는 노 회장이 있으므로 노 회장은 다른 사람 눈치 같은 건 보지 않는다. 그를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가정에서 권력의 우위에 있는 오현아뿐이다. 역시, 취미로 하는 골프는 공정하게 몰입하는 스포츠라기보다는 과시와 친목 도모에 더 목적이 있는 스포츠라는 이미지를 준다. 우리나라 드라마에는 재벌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고, 그들이 치는 골프란 대개 이런 식이다. “사장님 나이스샷~” 클리셰랄까.

영화에 나오는 골프는 어떨까. 영화 에서 골프장과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에게는 돈줄인 동시에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동네 바보 도준(원빈)을 벤츠로 치고 뺑소니를 쳐서 도준과 그 친구가 골프장 안까지 쫓아 들어갔을 때, 거꾸로 그 공간에서 도준과 친구는 이방인이 된다. 골프장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에서는 건설회사 회장이 검사에게 ‘골프 접대’를 한다. 그리고 은밀한 이야기가 오가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회장이 살해됐을 때, 그들의 안전성이 위협받는 충격적인 느낌이 더욱 커진다.

에서 병운(하정우)은 옛 연인인 희수(전도연)의 돈을 갚으려고 한 여사(김혜옥)를 찾아가 돈을 빌린다. 병운은 돈을 빌리는 대가로 한 여사가 시키는 일들을 해줘야 한다. 둘의 돈-권력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한 여사의 골프 연습이다. 한 여사는 희수와 병운을 앞에 두고도 무심히 골프 연습을 하고, 병운은 한 여사의 자세를 바로잡아주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돈을 목적으로 하든,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하든, 골프를 잘 치는 것이 돈 없는 젊은이의 무기가 될 수 있구나 싶기도 하다. 우디 앨런의 영화 에서 주인공이 테니스를 가르치는 것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듯이.

큰맘 먹고 골프를 한번 배워보면, 나도 골프를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려나. 그러고 보니 골프를 순수한 스포츠로 보게 하는 드라마가 딱 하나 있었다. 미국 드라마 에서, 섬에 불시착한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으로 예민해져 있을 때 의사인 잭은 간이 골프장을 만든다. 사람들은 팀을 짜거나 내기를 하며 즐겁게 골프를 친다. 처음으로 그들이 웃는다. 전쟁터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나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축구처럼, 골프 역시 사람임을 느끼게 해주는 진정한 스포츠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도 스트레스를 풀려다 오히려 공을 넣느냐 못 넣느냐에 집착해 “왜 난 햄보칼 수 업써!”라고 외치는 한국인 ‘꽈찌쭈’(곽진수)가 있긴 하지만.)

김지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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