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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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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현암 앞에서 나는 왜 작아지는가

등록 2010-12-15 02:25 수정 2020-05-02 19:26

연습 3주차. 내 실력은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늘었지만, 향상되는 정도를 그래프로 그린다면 수평에 가까울 것이다. 선생님은 내 실력이 향상되기를 기대하느니 차라리 자연 암벽을 타게 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내게 “이번주 일요일에 간현암으로 나오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매일 악몽을 꿨다. 밑에서 줄을 잡아주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지 못해 떨어지다가 얼굴을 암벽에 부딪혀 피가 철철 흐르는 꿈이었다. 상해보험을 들려고 해봤지만 암벽등반이 취미인 사람은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선생님에게 실내 암벽만 체험해봐도 칼럼 쓰기에는 충분할 것 같다고 우겨도 봤다. 한데 선생님은 “가야지”라고 말할 뿐, 바위처럼 묵묵.

김지현 제공

김지현 제공

일요일 오후, 강릉행 새마을호를 타고 1시간 남짓 걸려 간현역에 도착했다. 날렵해 보이는 산사나이들이 나와 같이 그곳에 내렸다.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등교용 백팩을 멘 나는, 힐끗 쳐다보는 시선에도 주눅이 들었다. 맥없이 평지를 20분쯤 걷자 간현암이 보였다. 우뚝 솟은 암벽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높이, 믿을 수 없이 높이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가자 널려 있는 장비들, 바닥에 빼곡한 암벽화들과 드럼통에 피운 모닥불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암벽은 사람들이 손에 묻힌 초크 때문에 드문드문 하얗게 칠이 되어 있었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선생님은 일단 ‘확보’하는 방법부터 가르쳤다. 암벽에 올라가는 사람의 안전을 위해 허리에 고리를 달아 줄을 매고, 풀어주거나 고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줄을 수직으로 꺾어서 잡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떨어져 다치진 않는다.

나랑 동갑인 미국인 빌리가 초보자 코스에 먼저 올라갔다. 나는 밑에서 한 발을 바위에 단단히 딛고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줄을 풀었다. 손이 느리고 익숙지 않아 빌리는 한참씩 기다렸다 올라가야 했다. 내려올 땐 손을 떼고 무게를 뒤로 실은 채 전적으로 줄에 의지하며 발로만 암벽을 디뎌야 하는데, 아래에 있는 사람은 줄을 적절한 속도로 풀어주면서 추락하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줄을 단단히 잡지 못해서 고정하는 쇠붙이에 손이 자꾸 말려 들어갔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연한 살이 물려서 찢어졌는데도 아프기보단 빌리가 위험해질까 걱정이 됐다. 하중을 이기지 못해 도르래처럼 내가 공중에 붕 떠서 전혀 지탱이 안됐다. 선생님은 자꾸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나는 땅에 발 붙이는 것만도 어려워 땀을 뻘뻘 흘렸다.

초보자 코스는 한 피치(20~30m) 높이에 비교적 큰 홀드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보기엔 밋밋하고 높은 암벽이다. 드디어 내가 올라갈 차례. 암벽화를 신고, 안전벨트를 허리에 차고, “출발!”이라고 복창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목표점은 보이지도 않았다. 두 발을 모두 바위에 딛고 나니 벌써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다음번에 계속)

김지현 시나리오작가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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