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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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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친딸’이어도 좋아, 김연아라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무결점 소녀,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전성시대
등록 2008-11-21 07:23 수정 2020-05-02 19:25

무결점 소녀가 나타났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 보인다. 한마디로, ‘엄친딸’(엄마 친구 딸)이다. 그런데 조금 얄미운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밉지가 않다. 오히려 남녀노소 성별과 나이를 넘어서 사랑을 받는다. 마치 ‘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인기가 한창이었던 때처럼 아무도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의 공부는 피겨스케이팅.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 김연아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김연아 선수. 연합

김연아 선수. 연합

원정 응원, 반복 재생… 헌신적인 팬덤

대학생 김수린(20)씨는 급기야 김연아의 경기, 아니 ‘연기’를 보러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지난 11월6~9일 베이징에서 열린 2008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컵 오브 차이나’에 출전한 김연아 선수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누구에 대한 ‘팬질’도 해보지 않았던 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07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 나와 를 연기하는 김연아 선수를 보고 ‘확’ 빠져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에 김연아 선수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간적 매력도 느꼈다. 김씨는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해 부상도 극복하고 한국의 열악한 피겨 환경도 딛고 일어선 얘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통해 성장한 김연아 선수의 성공담은 감동의 가족 드라마를 연출하고 가족 성공신화를 현실에서 재현한다. 한국인이 대부분 공감할 만한 가족사다.

김씨는 지난여름에 일찌감치 김연아 선수가 참가하는 대회를 확인하고 원정 응원을 떠날 결심을 했다. 여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비용을 모았다. 잠시 베이징올림픽에 갈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엔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택했다. 그렇게 떠난 3박 4일 베이징 원정 응원. 그는 “김연아 선수가 빙판에 있을 때 많이 보자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보고 또 보고. 김씨의 하루는 김연아 선수의 연기가 담긴 동영상을 보면서 시작된다. 그는 아침에 학교로 가면서 노트북에 담긴 김연아 선수의 동영상을 한 번은 본다. 그렇게 보아도 볼수록 새롭다. 그리고 이따금 디시인사이드 김연아 갤러리 등에 들어가 정보를 확인하고 팬질을 계속한다. 그는 불과 나이차가 두어 살에 불과한 김연아 선수에게 ‘자식’ 같은 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다른 연예인을 좋아할 때 살짝 느끼는 질투도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는 전혀 없다”며 “오히려 다른 나라 남자 선수들이 연아 옆에 더 많이 서성거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연아가 더 예뻐지고 더 잘했으면, 광고도 많이 찍어서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연아 선수. 연합

김연아 선수. 연합

그러니까 김연아 선수는 한국인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를 뒤엎는 방증이다. 같은 동작을 해도 다른 나라 선수에 견줘 팔다리가 길어서 아름다고 우아한 김연아를 보면서 우리는 한국인의 몸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조금은 벗어난다. 박태환 선수가 수영, 그것도 자유형 종목의 세계 제패를 통해 동양인, 특히 남성의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은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김연아 선수는 한국인의 강한 정신력을 증명한다. 그는 위기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컵 오브 차이나 쇼트 프로그램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지적받지 않았던 트리플 플립 점프에 ‘롱 에지’(스케이트 안쪽 에지를 사용해 점프를 해야 하는데 바깥 에지로 했다는 지적) 판정을 받았지만, 이틀 뒤에 열린 프리스케이팅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압도적인 점수차로 우승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김씨 같은 팬들은 말한다. “김연아는 자신이 뭐가 부족한지, 뭘 잘하는지 안다. 더구나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자기가 무엇을 잘했는지 생각하기보다는 무엇을 못했는지 항상 점검한다. 잘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모습이 팬심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정말로 완벽한 모습을 보일 때는 얼마나 환상적일지 기대된다.”

피겨 공부하며 ‘고급 스포츠’에 쾌감

디시인사이드 김연아 갤러리에서 닉네임 ‘MeiRyn♡’을 쓰는 김혜린(26·경기 부천시)씨도 해마다 발전하는 김연아의 모습에 놀랐다. 김씨는 “사실 이번 시즌 전에 팬들 사이에 김연아 선수가 더 이상 발전한 모습을 보이기 힘들다, 지금도 거의 완벽한데 발전을 기대하긴 무리라는 의견이 상당히 있었다”며 “그런데 놀랍게도, 올해 프로그램에서 기술적인 발전도 이뤘고 여성적 매력도 강해졌다”고 말했다. 그도 김연아 선수를 “자신과 경쟁하는 고집쟁이”라고 평가한다. 세상엔 대략 두 부류의 선수가 있다. 자신과 경쟁하는 선수와 라이벌을 의식하는 선수. 김연아 선수는 전자에 가깝다. 그는 평소에 라이벌이 자신보다 어떤 면에서 나은지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김연아 효과는 피겨팬의 층을 두껍게 했다. 이제 김연아는 단순히 한 명의 선수가 아니다. 김연아 선수를 통해 피겨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팬들이 빠르게 늘었다. 그들은 “김연아 선수는 자신을 넘어서 그 종목도 사랑하게 만든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요즘 피겨스케이팅을 ‘공부’하는 팬들이 적잖다. 김혜린씨도 이제 절반은 피겨 전문가가 됐다. “올해는 김연아 선수의 스파이럴(한쪽 다리를 드는 기술)이 유연해졌다. 하체 유연성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레벨을 받아도 가산점이 지난해보다 훨씬 올랐다. 캐나다에서 훈련하면서 아이스댄싱 선수들의 기술을 배워서 에지를 깊게 파니까 스텝도 좋아졌다.” 김씨가 술술 풀어놓는 전문가급 평가다. 그는 “김연아 선수 이전에 딱히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는 없었다”며 “피겨는 다른 종목과 다른 쾌감을 안긴다”고 말했다. 피겨는 경기가 아니라 연기로 불린다. 그만큼 운동능력뿐 아니라 예술성이 중요한 종목이란 것이다. 지금껏 한국이 강했던 격투기·구기에서 느끼지 못했던 ‘고급 스포츠’의 쾌감을 피겨는 한국인 팬들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한국이 저개발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사회적 맥락을 은유한다.

예브게니 플루셴코, 다카하시 다이스케, 제프리 버틀…. 김씨를 비롯한 팬들이 이제는 줄줄이 읊는 외국 피겨선수 이름이다. 이제는 어떤 점프를 할 때는 어떤 에지를 써야 하는지, 도저히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점프 기술도 ‘척 보면 딱 아는’ 경지에 이른 팬들이 적잖다. 김씨는 “이제는 방송으로 봐도 어떤 점프인지, 에지를 제대로 썼는지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아사다 마오 선수는 3회전 연속 점프에서 두 번째 트리플 루프 점프를 제대로 돌지 못한다”며 “머리는 세 바퀴 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왼쪽 다리가 늦게 떠서 다리는 두 바퀴만 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명백한 감점 요인에도 마오는 감점을 받지 않는다고 김연아 팬들은 우려한다. 세계 피겨계에서 일본빙상연맹의 입김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 선수와 경쟁하는 김연아 선수가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나라가 지켜주지 못하니 우리가 지켜주자”는 심정으로 김연아의 동영상을 유튜브 등 여기저기 퍼나른다. 김연아 선수의 본격 팬질을 한다면, 10개국 언어로 중계하는 동영상 정도는 보고 또 본다. 여러 나라의 중계 내용을 보면서 김연아 선수에 대한 평가를 살핀다. 물론 10개국 언어를 모두 할 필요는 없다. 이미 김연아 팬들이 각국의 중계를 한글 자막으로 번역해 올려놓는다. 이렇게 피겨는 다른 스포츠 종목에 견줘 보고 또 보게 되는 종목이다. 그러니까 김연아 선수는 인터넷으로 보고 또 보는 사용자제작콘텐츠(UCC) 시대에 적합한 스타다.

2006년 시니어 대회에서 처음 우승하고 돌아온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왼쪽). 2008년 컵오브차이나에서 우승한 김연아 선수. 그 사이에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연합

2006년 시니어 대회에서 처음 우승하고 돌아온 김연아 선수와 어머니(왼쪽). 2008년 컵오브차이나에서 우승한 김연아 선수. 그 사이에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 연합

이렇게 노력한 팬들은 비로소 행복하다. 올해는 외국 언론에서 김연아 선수에 대한 평가가 좋기 때문이다. 불모의 분야에서 한국인이 도저히 오르지 못했던 경지에 오르는 김연아를 보면서 한국인은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기적이다” “기특하다”라는, 감정이 깊이 투사된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하필이면’ 일본인 마오가 라이벌. 다른 종목에 견줘 심하진 않지만 팬심을 자극하는 민족주의 코드도 없지는 않다. 게다가 김연아 선수는 유명세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다른 스포츠 스타들이 이따금 연예인과 관련된 소문에 휩싸여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있지만, 김연아 선수는 방송 출연도 자제하면서 냉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어린 나이답지 않은 철저한 자기관리는 팬들을 매료시키는 또 하나의 장점이다. 더구나 김연아 선수는 자신의 재능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대로 선보인다. 피겨에서 점프 경쟁이 날로 심해져서 트리플 악셀(공중 3회전 반) 점프를 해야 마치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 같은 압력이 있지만, 김연아는 냉정하게 트리플 악셀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트리플 악셀을 뛰다가 잦은 부상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정확한 3회전 점프를 연습하고 구사한다. 약점으로 지적됐던 체력도 ‘스폰서의 후원’이 뒷받침된 뒤로 시즌마다 좋아지고 있다. 예전엔 연기를 하다가 한번 실수를 하면 실수가 잇따라 나왔지만, 이제는 한번 실수를 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경제위기 상황, 제2의 박세리?

헌신적인 부모의 뒷받침으로 성공한 가족 드라마, 불모의 종목에 첫 등장한 한국 선수, 여기에 경제위기 상황까지. 10여 년 전 누군가가 떠오른다. 2008년의 김연아는 1998년의 박세리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국민에게 주었던 위로를 어떤 면에서 재현한다. 1998년의 박세리에 2005년의 문근영을 더하면 2008년의 김연아가 나온다. 그렇게 국민 여동생 김연아는 남녀노소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체육학)는 그들을 이렇게 비교한다. “IMF 당시 박세리는 나라를 구한 잔다르크 같았다. 국민들, 특히 성인 남성의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아주었다. 그래서 그는 국회의원 같은 ‘어른들’ 행사에 자주 불려다녔다. 그리고 박세리 열풍에는 상금과 함께 경제적 효과가 운운되면서 국가주의 요소가 강했다. 하지만 상금이 없는 대회에 나가는 아마추어 김연아 선수에겐 경제효과 운운할 여지가 적다. 열성팬의 나이도 젊다. 그래서 국가주의 분위기가 상당히 탈색돼 있다. 하지만 오늘의 김연아도 당시의 박세리처럼 비판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IMF 외환위기 10년이 지나고 국제 금융위기가 닥쳤다. 박찬호는 박태환으로, 박세리는 김연아로, 우리를 위무하는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들이 주는 위로는 어쩌면 비슷하다. 1990년 경기 부천시에서 태어나 군포 수리고를 다니는 여고생은 그렇게 우리의 행복한 영웅이 되었다. 김연아가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하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잖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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