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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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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여 안녕!

등록 2002-12-05 15:00 수정 2020-05-02 19:23

대통령의 비공식적 제1참모,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말한다

“여자는 보는 대상이지 듣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A lady isn’t to be heard, but to be seen) 대한민국 첫 번째 대통령인 이승만씨가 집권 초기 부인 프란체스카를 두고 한 말이다. 건국 이래 8번째 대통령 부인이 된 이희호씨는 취임 뒤 “대통령이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감시할 것이다”라며 ‘청와대 안의 야당’ 역할을 자임했다. 50년 세월을 지나오며 대통령 부인의 역할과 임무는 이처럼 달라졌다.

그래도 육영수가 좋다

대선전이 불붙으며 각 후보자 부인들의 발걸음도 바쁘다. 5년 전 대선을 앞두고 여성 유권자의 54.7%가 ‘대통령 후보 부인을 보고 대통령을 선택하겠다’고 응답했듯이 대통령 후보 부인은 사실상 선거의 러닝메이트 역할을 맡고 있다.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후보 부인들이 내세우는 활동목표는 ‘적극적 내조자’에서 ‘정치적 동반자’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국민의 다양해진 눈높이를 반영한 결과다.

그러나 각 후보 부인의 선거전략은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아온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 부인 한인옥씨는 이 후보의 딱딱한 이미지를 보완하기 위해 ‘온화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하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인 권양숙씨의 선거전략은 서민후보 부인의 이미지를 살리며 안정감과 포용력, 신중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두 후보 부인 모두 소외시설 봉사활동을 중요한 활동상으로 내세운다. 대통령 부인에 대한 국민정서와 기대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 정서와 심리의 한 가운데에는 따뜻하고 사려깊은 이미지로서 육영수씨가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이화여대생과 수도권 주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여자 대학생의 51%, 주부의 78%가 ‘가장 마음에 드는 대통령 부인’으로 육영수씨를 꼽았다.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7.3%가 육영수씨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변했다. 육영수씨가 대한민국 국민 마음속의 영원한 대통령 부인으로 머물러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권위적·독단적·남성적 권력의 그늘이 크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사람의 무의식에는 평형작용이 있다. 자율적으로 심리적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박탈감이 크면 환상이 커진다. 가난한 집 아이들일수록 동전을 더 크게 그린다는 실험결과처럼,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의 반대급부로 따뜻하고 사려깊은 대통령 부인상을 찾는 것이다. 서구의 대통령 부인들이 전업주부 내조형 이미지를 벗어난 까닭은 국가 지도자의 권력이 분화돼온 덕분이다.” 정 박사는 한국에서는 대통령 권력이 독단적인 가부장적 범주에 머물러 있는 탓에 대통령 부인의 이미지도 고정돼 있다고 해석한다.

권한과 책임을 사회적 의제로 설정하자

심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제도적으로도 대통령 부인의 역할은 ‘청와대의 안주인’으로서 전통적 내조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대통령 부인의 지위와 임무에 관해 별도의 법규도 없다. 대통령 부인은 월급은 물론 활동비도 받지 않는다. 청와대 제2부속실을 비서실로 쓰면서 부속실장 1명, 행정관 2명, 여직원 2명 등 5명을 비서진으로 두고 있다. 국가 원수의 동반자 자격으로 해외방문을 할 경우를 빼고, 단독으로 출장을 갈 때는 별도의 의전절차가 없다. 이희호씨가 지난 5월 유엔아동특별총회에 참석했을 때 외교통상부의 예산을 사용했듯이 국가 대표 자격으로 움직일 경우 정부 예산의 범위에서 사용하고, 개인 자격으로 움직일 경우 경비는 개인돈으로 지출해야 한다.

미국은 이미 1967년, 1993년 두 차례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지원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다. 대통령 부인은 6명의 행정보좌관과 8명의 비서를 둘 수 있으며, 대통령 부인이 됐을 경우 어떤 일을 할지 밝히는 페트 프로젝트(Pet Project)를 내놓고 이에 필요한 지원을 받는다. 이에 따라 낸시 레이건은 마약추방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힐러리 클린턴은 국가 의료정책의 큰 개혁을 일으켰다. 1998년에는 백악관 인터넷에 미국 퍼스트레이디 기념 도서관을 설립해 역대 대통령 부인들의 활동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막대했지만 ‘보이는 영향력’은 작았던 것이 역대 한국의 대통령 부인들의 지위였다. 과거 대통령 부인들이 재단을 세워 로비 창구나 비자금 창구로 활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히 비공식적인 통로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대통령 부인의 역할과 임무는 무엇일까.

윤정숙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 부인의 역할은 과도기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재임 기간 당대 여성의 지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리에 있으면서도 누구의 아내라는 역할에 매여 있다. 선출직은 아니지만, 정치적·국민적 영향력이 큰 만큼 대통령 부인의 권한과 책임을 사회적 의제로 설정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런 딜레마를 반영하듯 여성단체의 방송 모니터팀에서도 최근 이뤄진 각 방송사의 대통령 후보 부인 초청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가 갈렸다. 한 모니터팀 관계자는 “대통령 부인도 검증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살린 것은 좋으나, 신변잡기적인 내용으로 채워넣은 점은 유감이다. 또한 검증의 경험이나 기준이 없어 더 유감이다.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내조의 덕목을 평가해야 할지, 정치·정책적 비전을 검증해야 할지 모니터팀에서도 고민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11월12일 한국여성언론인연합이 주최한 ‘대통령 부인 역할 달라져야 한다’ 세미나에서 고려대 행정학과 함성득 교수는 대통령 부인의 지위와 역할을 “대통령의 비공식적 제1참모이자 여권신장의 상징적 대변인”이라고 정의했다. 1997년 YWCA가 바람직한 영부인상 토론회를 마련해 바람직한 대통령 부인상으로 전통적 주부형 육영수씨와 적극적 활동가형 힐러리를 합친 절충형을 내놓은 것과 비교할 때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시각으로 평가받는다. 이 세미나에서 김원홍 한국여성개발원 정책실장은 “대통령 부인의 역할을 공식화하고 관심분야에 정책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정옥 효성가톨릭대 교수는 “대통령 부인의 공식적·비공식적 영향력이 또 다른 권력남용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할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2월19일은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그날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 부인도 얻게 된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통령 부인의 역할모델을 만들어갈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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