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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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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등록 2002-10-02 00:00 수정 2020-05-02 04:22

개구리 소년들의 죽음을 둘러싼 몇가지 의문… 경찰 설명에도 석연치 않은 타살 의혹

대구 ‘개구리 소년’들은 어떻게 죽어갔을까? 아이들이 11년 만에 싸늘한 유골로 돌아옴으로써 사인 규명이 과제가 됐다.

91년 3월26일은 기초의회 선거날이라 임시 공휴일이었다.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우철원(당시 13)·조호연(12)·김영규(11)·박찬인(10)·김종식(9)군 등 5명이 동네 뒷산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집을 나선 것은 이날 오전 9시께. 날씨는 초봄이라 아직 쌀쌀한 편이었다. 최고기온은 12.3도, 최저기온은 영상 3.3도였다. 오후 6시께부터 8.2mm의 비가 내렸다.

“총으로 살해됐다” 제보 들어와

아이들이 사라지자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연인원 32만명의 경찰 인력이 동원됐고, 810만장이 넘는 수배전단이 전국에 뿌려졌다. 하지만 아이들은 정확히 실종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26일 오전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중턱에서 한꺼번에 유골로 발견됐다.

관심은 아이들이 어떻게 숨졌는지에 모아졌다. 수사 관계자들은 사인은 “조사 중”이며 사고사인지 타살인지 여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도 목격자나 제보, 결정적 물증이 발견되지 않으면 사인 규명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수사 관계자는 “타살이라 볼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동네 근처 산에서 한꺼번에 죽었다니 유족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고민을 밝혔다.

애초 경찰은 아이들의 유골을 찾은 9월26일 오후부터 사인을 탈진과 추위로 인한 ‘저체온’ 현상에 의한 사고사로 ‘성급하게’ 추정했다. 유골 발견 초기 경찰이 추정한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이들은 이미 두끼를 거른 상태에서 길을 잃고 비를 피하기 위해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 모여 있다가 기온이 급히 떨어지므로 저체온 현상으로 사망 또는 암벽이 무너져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골도 발견되었고 경찰이 ‘사고사’란 잠정 결론을 내리자 11년 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던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경찰이 초기 수사 잘못을 덮기 위해 사고사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김영규군의 아버지 김현도씨는 “처음에는 가출로 몰아 수색을 제대로 안 하더니 이제는 사고사로 몰고 있다”고 말했다.

91년 수사 초기에 경찰은 가출쪽에 비중을 두는 바람에 수사 범위를 와룡산에서 대구로, 다시 대구에서 전국 일원으로 넓혔다.정작 와룡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작업은 사건 발생 7개월 만인 같은 해 10월 중순께야 이뤄졌다.

유골 발견 이틀째인 9월27일 유골 옆에서 탄두와 총알들이 발견되면서 타살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아이들의 두개골 2개에서 함몰된 부위와 구멍이 발견됐고, 발견된 옷소매가 묶여 있는 등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9월30일 “소년들이 총으로 살해됐다”는 제보도 들어왔다. 구두닦이 한아무개(43·대구 달서구 월암동)씨는 “지난 7월30, 35살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죽였다’는 말을 했다”고 제보해왔다. 한씨의 이야기는 구체적이다. “이 남자가 ‘사격 중 5명의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이 가운데 1명이 숨지고 1명은 다쳤으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으로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또 경찰은 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에 에 “대구 와룡산에 개구리 소년들이 한꺼번에 묻혀 있다”는 제보전화를 한 정아무개(40)씨를 조사했다. 정씨는 30일 오전 경찰에 스스로 나와 “6공 정권이 강경대·김기설씨 사건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개구리 소년’을 죽여 암매장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노숙을 하며 사는 곳이 일정치 않은 정씨가 근거 없는 추측성 제보전화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실종사건(3월26일)은 강경대군 사망(4월26일), 김기설씨 분신(5월8일)보다 1달가량 먼저 발생했다.

의혹과 설명들

사인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커지자 수사본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인 규명에 나설 것이며, 제기된 의혹을 중점적으로 수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의혹과 경찰 설명 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이들은 근처 지리에 익숙하다. 높은 산도 아닌데 초등학교 3∼6학년 다섯명이 왜 길을 동시에 잃어버렸나.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평시보다 일찍 해가 떨어졌다. 최저 온도는 영상 3.3도였지만 산속에서 체감온도는 영하였을 것이다.봄비로는 많은 편인 8.2mm의 비가 내렸고, 최대 풍속이 초속 19.2m로 조난 가능성이 높은 조건이었다. 법의학자들은 저체온으로 인한 사망은 영상 5도 이하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상황에서 저체온사의 가능성은 있지만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또 어린이라도 자기 보호 본능이 있어 서로 껴안고 있으면 체온을 유지할 수도 있다.

둘째, 마지막에 발견된 유골(김영규군 추정)의 윗도리가 완전히 뒤집어진 채 팔부분이 묶여 있다. 누군가 강제로 묶었다.

팔은 빠진 채 옷만 느슨히 묶여 있었다.매듭의 조인 정도가 약하고 저체온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착란상태에서 소매를 묶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추워서 덮기 위해 옷을 뒤집어쓴 뒤 팔부분을 묶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조금 더 단단히 묶인 바지의 매듭은 여전히 의문이다.비에 젖어 춥거나 착란상태에서 바지를 벗을 수 있다지만, 왜 매듭까지 지었을까.

셋째, 지난 94년 말까지 유골 발견현장에서 남서쪽으로 250m(직선거리) 떨어진 곳에 군 사격장이 있었다. 유골 발견현장에서 탄두와 실탄 등이 발견되었다. 유탄에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지방선거일이라 임시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격훈련이 없었다. 설사 유탄에 맞았더라도 한꺼번에 5명이 맞아 사망할 가능성은 적다.

군 관계자는 사격훈련 관련 부대일지 보존 연한이 5년이어서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군에서 장부상 탄환 수량을 맞추기 위해 남은 탄환 등을 사격장에서 임의로 발사해 소진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한아무개씨의 제보 내용과 같은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넷째, 유골이 발견될 당시 30∼40cm 크기의 네모난 돌에 눌려 있었다. 범인이 아이들을 죽이고 암매장했다는 증거다.

처음 유골을 발견해 신고한 사람이 돌을 지팡이로 밀어도 흔들릴 정도였다.주위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다섯째, 누군지 알 수 없는 한명의 두개골 왼쪽 귀 위에 100원짜리 동전만한 구멍, 오른쪽 귀 옆에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구멍이 있다. 또 김영규군의 두개골 목 왼쪽 위가 가로 4cm, 세로 5cm 정도 찢어져 있다. 총상이나 외부 충격으로 생긴 것이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두개골 구멍 옆에 파열선이 없는 점 등으로 봐서 총에 맞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왜 두개골에 구멍이 생겼는지는 “부패과정에서 그랬는지 외부충격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직 의혹만 무성하고 확증은 없다.11년 동안 아이들이 돌아올까봐 이사도 못하고 밤에 대문도 열어두고 잠을 잔 부모들의 마지막 소망은 “자식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경찰은 예단과 책임회피란 내부의 벽부터 넘어야 한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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