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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유적 버릴까 지킬까

친일파 윤덕영 집터에서 건축 부재 발굴로 ‘부정적 유산’ 논란 재점화 조짐
등록 2020-04-28 12:05 수정 2020-05-09 05:57
최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서 일제강점기 때 친일반역자인 윤덕영의 저택 ‘벽수산장’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 부재가 여럿 발견됐다. 벽수산장 유적과 유물(점선 안)이 새로 발견된 옥인동 47-16번지 모습. 박승화 기자

최근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서 일제강점기 때 친일반역자인 윤덕영의 저택 ‘벽수산장’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 부재가 여럿 발견됐다. 벽수산장 유적과 유물(점선 안)이 새로 발견된 옥인동 47-16번지 모습. 박승화 기자

지난 3월 서울시 종로구청은 종로구 옥인동 47-16번지 일대의 5개 필지 1109㎡(336평)를 공영주차장으로 쓴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 터엔 지하 40~50m를 지나는 수도권급행철도(GTX)-에이(A) 노선 관련 시설과 함께 공영주차장이 들어서게 된다.

이곳 집터 가운데 한 채의 마당과 뒤뜰에서 눈길을 끄는 돌들이 발견됐다. 모두 16점인데 하나같이 정교하게 조각된 건축 부재다. 어느 건축물에 사용된 것인지는 부재에 표시돼 있지 않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과 전문가들은 이 건축 부재가 1917년부터 1973년까지 존재했고,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서양식 저택이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윤덕영의 ‘벽수산장’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발견된 곳이 과거 윤덕영의 벽수산장 터이고, 이미 주변에 벽수산장의 여러 건축 부재가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집터 바로 남쪽 ㅅ아파트 주차장엔 벽수산장 터 안을 흐르던 옥류동천 위에 설치됐던 것으로 보이는 다리 난간 기둥과 난간 가로대 받침이 2점씩 놓여 있다. 또 그곳에서 바로 남쪽 골목엔 벽수산장의 정문 기둥 2점이 서 있고, 1점은 한 공동주택 외벽에 박혀 있다.

현장을 찾은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벽수산장은 건물이나 터가 어마어마하게 컸고, 터 안에 2~3개의 다리와 연못도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돌 부재는 이 다리나 건물 입구 계단의 기둥과 난간, 지붕 장식 등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돌 부재 사진을 살펴본 안창모 경기대 교수도 “벽수산장 대문이나 건물 출입문, 건물 앞 자동차 정차 공간 등에 사용된 장식 돌들로 보인다. 일본식은 아니고, 벽수산장 양식처럼 서양식”이라고 했다.

윤덕영 집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한옥 별채. 박승화 기자

윤덕영 집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한옥 별채. 박승화 기자

일제 때 서울 옥인동 절반이 집터… 1973년 철거

벽수산장(양관)은 일제강점기 한국에 지어진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개인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1913~17년 지하 1층, 지상 3층의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는데, 건축 연면적이 795평에 이르렀다. 1910년 운현궁에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위해 지은 지상 2층 양관의 연면적이 248평이니 왕가 주택보다 3배 이상 크다. 벽수산장은 압도적인 규모와 화려한 외관으로 인해 ‘한양 아방궁’이라고 불렸다.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1910년대엔 서양식 건물을 짓는 게 유행이었고, 당시 서촌은 서울에서도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 벽수산장 건물은 아주 아름답고, 프랑스에서 그려온 설계도면도 남아 있는 드문 근대 건축물이다. 벽수산장 주변은 자연환경도 아름답고 다른 역사 유적도 많다. 역사와 건축, 경관에서 의미가 큰 건물”이라고 평가했다.

이 거대한 주택은 일제 말기 일본 기업에 팔렸다가 해방 뒤 덕수병원, 미군 장교 숙소, 한국통일부흥위원단(언커크) 청사 등으로 쓰였다. 1966년 화재로 크게 탔으며, 1973년 완전히 철거돼 대형 주택과 길이 들어섰다. 이번에 발견된 돌 부재를 포함해 벽수산장의 많은 건축 부재가 화재와 철거 과정에서 주변 지역으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윤덕영의 집터는 1927년 기준으로 1만9468평이었다. 이는 당시 종로구 옥인동 전체 면적 3만6362평의 53.5%에 이르는 것이다. 윤덕영의 집엔 벽수산장 외에 ‘일양정’이란 한옥 본채와 소실 이성녀의 한옥 별채, 딸과 사위에게 준 2층 양옥 등이 있었다.(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 정원의 조영 기법 해석’, 2016) 현재 벽수산장과 일양정은 사라졌고, 한옥 별채와 2층 양옥만 남아 있다. 한옥 별채는 낡고 허물어진 상태이며, 딸 부부에게 지어준 2층 양옥은 뒤에 박노수 화가에게 넘어가 현재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쓰인다. 서울시 주거환경개선과는 소유자가 8명인 한옥 별채를 매입해 이 지역을 재생하는 데 활용할 계획이다.

일제강점기 때 가장 큰 서양식 주택이던 벽수산장 모습. 한겨레

일제강점기 때 가장 큰 서양식 주택이던 벽수산장 모습. 한겨레

문화재청은 “발굴 뒤 문화재 등록 여부 검토”

이 거대한 터를 사들이고 저택을 지은 비용은 윤덕영이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총독부로부터 받은 46만원의 공채증권에서 주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지은 집이다. 윤덕영은 순종의 둘째 부인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이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 때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고 옥새를 빼앗았으며,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로 꼽히기도 한다. 일제 때 가장 악질적인 친일반역자 가운데 하나다.

윤덕영의 집이 들어선 곳은 조선 때 맑은 냇물이 흘러 ‘옥류동’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병자호란 때 강경파 지도자였던 김상헌과 조선 후기 최대 권력 가문이던 그의 후손 장동 김씨(신안동 김씨)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조선 말기엔 역시 권력자였던 여흥 민씨가 그 터를 차지했고, 결국 윤덕영에게 넘어갔다. 윤덕영의 벽수산장 부근엔 친일파의 대명사라고 할 이완용의 집도 있었다. 이완용은 자하문로와 종로구 보건소 사이 옥인동 터 3743평에 2층 양옥을 지어 살았다. 말하자면 이곳은 조선 때는 권력자의 터전이었고, 일제 때는 매국노들의 소굴이었다.

종로구청은 윤덕영의 벽수산장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 부재를 현장 조사해 서울시와 문화재청에 보고할 계획이다. 종로구 문화재관리팀 강영식 주무관은 “표본 조사나 발굴에서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면 보존 의견을 내려 한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문화재 전문가들과 문화재청에서 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좀더 신중한 의견을 보였다. 김동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장은 “발굴해서 중요 유적이 나오면 보존 방안을 마련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여기서 나오는 유적이나 유물의 가치에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친일 인사의 유적이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 등록은 신중히 검토할 것이다. 문화재를 판단하는 데는 문화재적 가치뿐 아니라 인물의 공과, 역사적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윤덕영 집의 주요 건물과 유적 발견지

서울 종로구 옥인동 윤덕영 집의 주요 건물과 유적 발견지

총독부 건물·옛 서울시청 철거 때도 논쟁

일제나 친일 인사의 유산, 독재 정권과 독재자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오랜 논란거리다. 학계에서는 이런 역사 유산을 ‘부정적 유산’(네거티브 헤리티지)이나 ‘어두운 유산’(다크 헤리티지)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부정적 유산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 흥례문 일대를 파괴하고 1926년 완공된 총독부 건물은 당시 일본 본토와 식민지, 동아시아 전체에서 최대의 근대 건축물이었다. 해방 뒤엔 미군정 청사, 제헌국회 개회장, 중앙청(정부중앙청사), 인민군 청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제 통치의 중심이었다는 점과 악의적 위치, 지나치게 큰 규모, 경복궁과 백악(북악)을 가리는 경관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철거 주장이 나왔다. 결국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이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경복궁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에도 이전 복원과 현상 유지 주장이 만만치 않아 논란이 컸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1995년 광복절에 전격적으로 돔 꼭지를 철거했고, 1996년 11월 지상 철거를 완료했다.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는 “총독부는 위치나 모양 때문에 그 자리에 남겨두긴 어려웠다. 그러나 다른 일제강점기 건물들은 굳이 헐어버릴 이유가 없다. 한국에서 난 건축 재료로 한국 노동자들이 지은 것이고,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경교장도 친일 사업가가 지은 건물이지만, 아무도 그 사실 때문에 헐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윤덕영 집의 대문 기둥들. 박승화 기자

윤덕영 집의 대문 기둥들. 박승화 기자

윤덕영 집에 있던 다리의 난간 돌. 박승화 기자

윤덕영 집에 있던 다리의 난간 돌. 박승화 기자

“제자리 남겨 치욕의 역사 잊지 않게 해야”

역시 1926년 완공된 서울시청(일제 때 경성부청) 건물도 철거를 둘러싸고 큰 논란이 벌어졌다. 오세훈 시장 시절인 2007년 서울시는 건물 전면과 중앙 돔을 제외하고 이 건물을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가 반대하자, 오 시장은 2008년 유걸 건축가가 설계한 새 청사를 짓겠다는 명분으로 대회의장인 태평홀을 전격적으로 부쉈다. 문화재위는 태평홀 외에 더 이상 철거를 허용하지 않았고, 옛 서울시청은 옛 모습에 가깝게 서울도서관으로 살아남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과거엔 일제나 친일 인사 관련 유적이나 유물은 폐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2000년대 이후엔 보존하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해방 이후 시간이 꽤 흘렀고, 이젠 역사적 교훈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덕영의 집터에서 나온 건축 부재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황평우 소장은 “윤덕영의 건물이나 유적을 제자리에 남겨서 사람들이 과거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잊지 않게 해야 한다. 역사 유적에서 장소성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우용 교수는 “현재 자리에 남겨두기 어렵다면 박노수미술관이나 옥인동 대공분실, 자수궁터(군인아파트)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옮겨서 전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건물을 모두 없애면, 우리의 식민지 시대뿐 아니라 일본의 잘못된 과거도 모두 사라진다. 건축물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다양한 역사가 담겨 있다. 자칫 역사적 건축물과 공간을 없애서 우리 역사를 지워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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