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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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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임대아파트·콜센터에 여성이 있었다

코로나19가 드러낸 ‘젠더 불평등’
등록 2020-03-21 04:53 수정 2020-05-02 19:29
재가 요양보호사가 아파트 안에서 돌봄 할머니와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재가 요양보호사가 아파트 안에서 돌봄 할머니와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콜센터 노동자, 녹즙 배달원, 청소부, 조리원, 요양보호사…. 코로나19 유행으로 평소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일상이 공개되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이 누구를 만났고 어디에 갔는지를 추적한 내용은 그 자체로 한국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의 기록이다. 바이러스는 불평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연기처럼 스며들어, 우리 앞에 드러난다.

마스크 지급 사업에 빠진 돌봄 노동자

코로나19가 보여주는 불평등 중에서도 ‘젠더 불평등’은 우리가 꼭 톺아봐야 한다. 한국의 코로나19 감염자는 총 8413명(3월18일 기준)이고, 이들 중 여성이 5173명으로 전체 확진자 중 61.5%를 차지한다. 여성 감염자가 남성보다 많은 것이 세계적으로 독특하다. 코로나19가 유행한 중국(남성 51.4%, 여성 48.6%)과 싱가포르(남성 57.5%, 여성 42.5%), 유럽의 이탈리아(남성 59.7%, 여성 40.3%) 등을 보면 남성 감염자가 더 많았다.

한국은 신천지 교인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생기면서 여성 감염자가 크게 늘었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신천지라는 특수 감염 경로를 제외해도 코로나19 감염의 젠더 불평등은 뚜렷하다. 35살 이하 여성만 입주할 수 있는 근로임대아파트, 아파도 쉴 수 없는 콜센터, 요양보호사가 다수 감염된 요양병원 등 집단감염이 발생한 장소는 코로나19가 젠더 불평등을 흔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이 남성보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응대하는 일을 맡으며, 이런 업무 특성은 높은 감염 위험으로 이어진다. 코로나19 감염자를 치료하는 음압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에게서 볼 수 있듯, 병원에서도 이런 위기 상황에 환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여성이다. 코로나19가 처음 발병한 중국 후베이성에선 간호사의 90%가 여성이었다.

가정에선 여성들의 ‘세끼 지옥’

공식적인 보건의료 체계라고 여겨지지 않는 간병과 재가서비스, 장애인 활동지원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3월6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는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배달업과 택시·버스 등 운수업 노동자, 취약계층에 대한 마스크 지급 사업에 돌봄 노동자가 빠져 있음을 지적하는 성명을 냈다. 개인보호장비는 고사하고, 최후의 보호 수단인 마스크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전세계 104개국에서 보건·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비율은 70%로 다수를 차지하지만, 이들의 급여는 남성보다 11% 적었다. 여성화된 돌봄 노동이 얼마나 천대받는지를 보여준다.

정부와 언론은 감염 전파를 줄이기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고하지만, 사회적 거리를 둘 수 없는 여성들은 황망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2017년 8월 기준 남성 임금노동자 중 정규직 노동자는 73.6%를 차지했지만 여성은 58.9%였다.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시기에도 해고당하지 않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남성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역할이 자리잡은 가정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는 그대로 여성들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학교가 개학을 미루고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면서, 많은 여성이 “세끼 지옥”에 빠졌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호소한다. 소셜미디어에 괴로움을 토로하지 못하는 나이 든 여성들은 더 심각할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경제적 보상 없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의 76.2%를 여성이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선 그 수치가 80%까지 치솟는다.

감염병이 보여주는 젠더 불평등은 역사가 깊다. 2016년 WHO가 공중보건 위기를 선포하게 했던 지카바이러스 유행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은 임신부였다.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보통 증상이 없거나 가벼운 발진과 두통 정도만 겪었지만, 임신 중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된 여성은 소두증을 동반한 선천성 지카신드롬에 걸린 아이를 낳았다. 브라질에서만 2700건 확인됐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 브라질에서 임신과 모기를 피할 수 있었던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격차는 컸다. 브라질 정부는 가임기 여성에게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피임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임신중지는 ‘불법’으로 유지했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 브라질에서 모기를 피할 안전한 집은커녕 피임약도 구하지 못했던 여성들은 지카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며 낙인찍히고 비난받아야 했다.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바이러스가 유행했을 때도 여성들은 가혹한 상황에 내몰렸다. 내전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황에서 감염자 둘 중 하나가 죽는 바이러스가 유행했다. 여성들은 아픈 가족을 돌보고 친척의 주검을 처리하는 일을 떠맡으며 더 많이 감염되고, 더 많이 죽었다.

지침과 달리 자가격리된 임산부

페미니스트들은 감염병 유행 같은 재난 상황에서 젠더가 사라진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위기에 맞서 싸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성별에 따른 위험과 자원의 불평등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신부 같은 여성의 특수한 필요조차 잊힌다. 부산에서 임신부 감염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뒤늦게 대구시는 임신부 감염자가 7명이나 있었고, 이들 중 한 명은 이미 출산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행히 증상이 심한 사람은 없었지만, 노인과 기저질환자, 임신부를 ‘고위험군’으로 분류해 감염시 입원치료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질병관리본부의 지침이 무색하게도 임신부들은 자가격리 중이었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하혈로 유산 방지약을 먹고 있었음에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팬데믹(세계적 전염병 대유행)으로 나빠진 경제는 원래도 불안정했던 여성들의 삶에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것이다. 한국의 코로나19 유행은 큰 고비를 넘긴 모양이지만, 세계적으로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모든 사회적 활동과 접촉을 막을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고, 산발적인 유행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가장 취약하고 불안한 곳을 살피고 서로를 돌봐야 한다. 그다음엔 앞으로 닥쳐올 재난에서 이런 불평등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리하고, 대비하며,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젠더와건강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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