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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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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베트남

공항에서 갑작스레 ‘한국인 입국자 격리’ 통보받은 전순예씨 기고
등록 2020-03-07 05:46 수정 2020-05-02 19:29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서 대기 중인 한국인의 모습. 한겨레 자료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서 대기 중인 한국인의 모습. 한겨레 자료

에 ‘내가 사랑한 동물’을 연재하는 전순예씨는 베트남 하노이에 살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있는 한국과 베트남을 자주 오갑니다. 언제나 수시로 넘나들던 국경에 갑자기 높은 벽이 들어섰습니다. 한국에서 급속하게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국가들이 하나둘 한국인 입국 금지를 발표하던 때, 베트남에 갔다가 ‘국경’을 실감한 전순예씨가 글을 써서 보내왔습니다.

신문 에 “이러다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라는 말이 인용되기도 한 ‘전아무개’입니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신문기자의 전화를 받고 내 말이 신문에 나가는 경험도 했습니다. 어리둥절 겪은 일이라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당시 상황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지난 2월12일 가족이 있는 한국에 다니러 갔습니다. 가지 말라는 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2월28일 저녁 6시40분 비행기로 하노이로 돌아왔습니다. 하노이에 있는 남편이 소식을 전하기를, 내가 베트남 가면 14일 동안 자가격리될 거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안 나가면 되지 그게 뭐 어렵겠냐고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현지시각으로 28일 밤 10시30분에 도착하니 자가가 아닌 시설로 보내 14일 동안 격리시킨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오늘부터 법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항공사 직원이 입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은 여기서 선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을 넘으면 베트남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순간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기는 아쉬웠습니다. 설마 여기도 사람 사는 나라인데 죽이기야 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선을 넘었습니다. 항공사 직원들이 화물을 갖다주었습니다. 마중 나온 남편은 새벽까지 나를 기다리다 집에 돌아갔습니다. 베트남 공안들이 여권을 압수했습니다. 70명 정도가 자기 짐을 안고 무한정 기다렸습니다. 하노이에서 사업하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는, 대부분 베트남에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들 나처럼 14일간 자기 집에서 격리하면 되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냐고 물으면 검역 대기 중이라고만 합니다. 조금 있으면 열을 재러 올 거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열을 재러 오지도 않고, 물으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시간쯤 기다렸을까, 호명하는 대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호명되는 대로 공항 건물 한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한방에 남녀노소, 어린아이까지 오글오글 집어넣습니다. 거기가 격리실이랍니다. 대사관 사람들도 격리실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먹을 거라곤 물 몇 통과 샌드위치 몇 개뿐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한국 뉴스에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주었다고 했는데 우유는 구경 못했습니다. 의자 하나를 차지한 사람은 행운아였습니다. 대부분 자기 짐에 의지해 바닥에 앉고 누워 있기도 했습니다. 기내에서부터 울던 아기들이 있었습니다. 녹초가 된 엄마 품을 파고들며 우는 모습이란 모든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밤중이 되자 호명하는 대로 짐을 가지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곳은 공항 지하 주차장이었습니다. 녹슨 군용 트럭이 덜덜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부대로 간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들어온 베트남 사람들과 분리해서 트럭에 태웠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타는 대로 어디론가 갔습니다. 한국 아이 하나가 트럭을 보자 무섭다고 기절하기 직전까지 울었습니다. 이게 뭐 하는 거냐고 인권유린이라고 소리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아이와 엄마만 입국장으로 올라갔습니다. 시동을 걸어놓은 채 떠나지 않고 덜덜거리며 한 시간도 넘게 있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도로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격리실로 올라왔습니다. 문은 아주 걸어 닫은 채 나가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 간다고 하면 열어주고 물 먹으러 간다고 하면 열어주었습니다. 닫아건 문밖에 대사관 직원이 보입니다. 우리를 위해 밤을 새웠구나 생각하니 무척 든든했습니다. 나중에 딸과 통화해보니, 한국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베트남 부총리와 통화했다고 합니다. 격리실에는 세수할 물은 고사하고 양치할 소금도 없어 한 봉지 달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스크를 쓰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기내에서 한국 주소와 여권번호를 다 적어 제출했는데, 조금 있다 대구 살았냐 어디 살았냐 하며 또 조사합니다. 이틀째 점심이 되어 베트남 샌드위치인 반미를 주었습니다.

마침 한국으로 갈 사람은 오후에 갈 수 있다고 신청을 받았습니다. 열이 나는 것 같아 남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돌아가야지 하고 신청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항공사 직원이 여권을 들고 와 호명하는데 내 이름은 없었습니다. 당황해하는데 하노이에 사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격리하라고 신청을 받습니다. 다행히도 맨 나중에 집으로 간다고 신청했습니다.

하노이 내에서 14일 동안 자가격리하는 조건이어서, 외곽 지역에서 일하는 한국 남자들 열 명이 방을 하나 얻어서 가기로 하였답니다. 만약 회사로 들어가면 회사 전체가 폐쇄되기 때문에 못 가는 사람 4명은 경찰병원 시설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격리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분은 이웃집으로 가기로 하였습 니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고, 대사관에서 보낸 음식이 왔습니다. 김밥과 과자, 칫솔, 치약도 가져왔습니다. 이틀 만에 이도 닦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을 먹었습니다.

대사관에서 차 일곱 대를 동원했답니다. 소형차라 한 차에 지역으로 나눠 댓 사람씩 타고 떠났습니다. 대사님과 영사님이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사람들이 떠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보냈습니다. 우리가 떠나기 조금 전,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한국을 거쳐 온 사람들을 한방에 몰아넣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가격리 기간은 입국일로부터 14일이라고 합니다. 3월1일 일요일 저녁 공안들이 집에 찾아와서 온 가족 여권을 복사하고, 격리를 잘하고 있나 조사했습니다. 화요일엔 보건소 여직원이 와서 그냥 보고만 갔습니다. 같이 격리됐던 사람들에게 연락해보니, 경찰병원 시설로 간 사람들은 시설도 괜찮고 자기네 회사에서 돌봐줘 잘 있다고 했습니다. 불편은 겪었지만 험한 소리 들리지 않고 모두 다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집으로 돌아오니 너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무심히 생각했던 주위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힘을 보태준 대사관 직원과 여러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일선에서 일하시는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천재지변은 남의 일만이 아니라 나도 당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남은 격리 시간을 잘 보내려 합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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