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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앞에 이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김초엽의 소설이 좋았다면 다음엔 무엇을 읽어야 할까…
이다혜 기자가 권하는 한국SF 6
등록 2020-02-04 19:31 수정 2020-05-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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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SF라는, 자생력을 일군 장르에는 당신이 그 존재를 잘 인지하지 못했던 때부터 꾸준한 활동을 보여준 뛰어난 작가군이 있다. 한국SF 작가들의 소설을 접해온 시간을 지난 10여 년을 중심으로 돌아보면 창작하는 문화가 시장을 만들기까지 필요한 요소들이 보인다.

십중팔구 사랑에 빠질 것

첫째는 뛰어난 작가들이 필요하다. 이 지면에 소개하는 김보영을 비롯해 배명훈, 김창규, 정소연, 김이환 등은 직접 창작을 했고, 해외SF를 번역했고 또한 비평을 했다. 둘째는 글을 발표할 지면이 필요하다. 창작은 예술활동인 동시에 생업으로 기능해야 지속 가능해진다. 한국SF 작가들은 을 비롯한 앤솔러지(선집)를 구성하고, 텀블벅 등의 펀딩을 받아 글을 돈으로 환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같은 전문 무크지 창간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전문지 창간은 심완선()을 비롯한 관련 ‘전문’ 비평가를 더 키워낼 수 있게 한다. 아작, 허블, 구픽, 그래비티북스처럼 한국SF를 내는 출판사들이 생기는 일 역시 중요하다. 여기에 한국과학문학상 같은 신인을 발굴하는 통로와 작가들의 구심점이 되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의 활동, 김초엽()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탄생은 이 모든 일이 한 흐름으로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제 와서 한국SF가 궁금해졌다면, 또 어떤 책을 먼저 읽어볼까.
김보영이란 이름은 한국SF 독자에게 언제나 유효한 이름일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들이 마음에 들었다면, 십중팔구 김보영과도 사랑에 빠질 것이다. SF와 신화(와 판타지)를 우주 스케일로 풀어낸다. 는 웹진 에 발표했던 동명의 중편 연작을 새롭게 작업한 글로, 과학적 사고방식이 적용되는 저승의 삶을 보여준다. 저승에서는 존재가 불멸한다. 이승처럼 성장하고 사멸하는 과정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온라인에 게재한 판본의 개정판이자 확장판으로,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은 비슷하지만 해석이 많이 다른데, 나 자신이 변화한 결과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과 비슷한 흐름의 작품이다. 김보영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단편집도 꼭 읽어야 하는데 같은 초기 단편집은 절판됐다. 이후 쓰인 작품들은 어서 한 권으로 묶이기를 기대한다. 는 팟캐스트 에서 전문 낭독을 들을 수 있으니, 김보영의 단편이 궁금한 이는 그 작품을 먼저 들어보기를 권한다.
장편SF에서 기억해야 할 이름 중에 문목하를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를 발표한 문목하의 데뷔작 은 끝까지 읽을 때까지 (과장을 보태면) ‘멱살을 잡혀 끌려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중간에 놓기 어렵다. 국내외에서 영상화할 예정이라는데, 마지막에 전율을 느낄 때까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쌓아가는 솜씨와 구구절절하지 않고 효율적인 대화가 매력적이다. 매우 현실적 사건인 싱크홀이 문제의 발단이다. 수도권 도시에 산 하나가 사라질 정도로 거대한 싱크홀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이 사망에 이르자 도시는 텅 비어버린다. 그 도시의 생존자 윤서리는 수사관이 되어 비원이라는 범죄조직의 뒤를 캔다. 윤서리는 결국 유령도시가 된 그곳으로 돌아가는데 거기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과거의 싱크홀, 범죄조직, 국가와 수사조직,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합쳐지면서 서스펜스(긴박감)를 빚다가 신묘할 정도로 낭만적인 결말을 맞는다. 최근 발표한 는 갈등하고 연민하는 인공지능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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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에 관한 질문
이경희의 는 사이버펑크를 좋아한다면 실망하지 않을 작품. 작가 소개에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프로그래밍을 배웠고, 철학을 좋아했지만 결국 경영학을 전공”했다며 타협을 거듭해온 삶이 부끄럽다고 했는데, 는 그 타협과 갈증이 효과적으로 결합한 소설이다. SF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이것인데, 작가들의 이력이나 전공 분야가 극대화되는(상상을 구현하는 사고실험을 논리를 바탕으로 진행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덕분에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조차 완전히 다른 전개가 될 수 있다. 거대 기업의 회장 진환은 사고 이후 온몸이 기계로 대체되어 정신을 차린 뒤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SF영화에서도 반복해 제기되는데, 선명한 답이 있을 리 만무하니 역시 재미있는 길을 간다. “네가 마주쳤다는 또 한 명의 너 말이야? 어떤 느낌이었어?” 같은 질문이 어느새 현실이 되어 있을 때를 상상하게 한다.
박해울의 는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이다. “인간이 시중을 드는 세계 말이야.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등장시킬 무대로 그런 세계가 제격이지 않겠어?” 미래 사회는 과거의 이상향일까 개량된 지옥일까. 미래의 가난과 차별은 어떤 모습일까. 초호화 우주크루즈 오르카호가 난파된다. 의사 기파의 활약상이 지구에까지 알려지자 그는 추앙의 대상이 된다. 아픈 딸의 수술비를 위해 충담은 오르카호에 올라 기파를 찾으려 한다. 우리가 인간답다며 추앙하는 가치를 얻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

SF와 페미니즘의 만남
에는 SF소설이 어떻게 페미니즘을 상상하고 실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웃기고(박소현의 ‘기사증후군’), 경이감 속에 공감하고(전혜진의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 고민하고(남유하의 ‘국립존엄보장센터’), 아득하고(박애진의 ‘토요일’), 감탄하며 즐거워지는(양원영의 ‘신의 별’) 이야기들이 실렸다. 책 말미에는 심완선 비평가의 글 ‘반례와 증명’이 실렸는데, 이 글 역시 놓치지 마시길.
마지막으로는 곽재식의 소설집 를 소개한다. ‘종말 안내문’ ‘다람쥐전자 SF팀의 대리와 팀장’ ‘지상 최대의 내기’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 등의 작품이 실렸다. 곽재식 작가의 단편은 사회인들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감각과 그럼에도 잃지 않은 낙관과 인간애, 다소의 체념이 드러날 때 특히 재미있어진다. 는 그의 다른 책들로 이어지는 매력적인 다리 구실을 하리라. 여기 소개된 책 중 한 권이라도 꼭 읽어보시길. 분명 한국SF 작가들의 신간 소식을 몹시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다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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