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를 쓰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 유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질 수 없다.”
홍콩이공대학(이하 이공대)에서 점거시위를 하다 11월18일 오전 가까스로 학교를 탈출한 대학원 1학년생 라이언(가명)을 11월21일 메신저로 인터뷰했다. ‘어떤 내용의 유서를 쓰고 시위에 참가했는지’를 물었다. 11월4일 오전 홍콩과학기술대학 컴퓨터과학과 2학년생 차우츠록이 시위 중 3층 높이 건물에서 추락해 사망한 뒤, 시위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유서를 쓰고 집회에 나선다는 기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언은 “아직 쓰지 않았고, 쓰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끝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위 참가한 친구, 징역 14년형 받을 수도</font></font>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9월4일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밝혔으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시위대는 △송환법 완전 철회 △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과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6월9일부터 거의 모든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는 라이언이 말했다. “처음에는 홍콩 시민을 무시하고 송환법 통과를 강행하는 홍콩 정부에 분노해 시위에 나섰지만, 정당한 요구를 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체포됐으며 기소됐다. 정당한 요구를 외치다 구속된 동지들이 석방될 때까지 우리는 시위를 멈출 수 없다.” 라이언은 친구 두 명이 체포돼 구속 기소됐는데, 최근 수감된 한 친구가 보낸 편지를 읽고는 오열했다고 했다. 지난 6개월의 투쟁 중 그가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편지에서 친구가 ‘나를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대목에서 눈물이 터졌다. 그는 운이 나쁘면 14년형까지 선고받을 수도 있다. 남은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시위자의 체포와 구속, 폭동 혐의 기소는 시위대를 더욱 자극하지만 홍콩 경찰 당국은 막무가내다. 11월19일 새로운 홍콩 경찰 총수로 임명된 크리스 탕은 19일과 20일 이틀에 걸쳐 이공대와 그 인근에서 시위하던 중 경찰에 체포된 1100여 명 중 213명에게 폭동죄를 적용해 기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11월21일 현재 100여 명의 시위대가 남아 경찰의 봉쇄 작전에 맞서 ‘공성전’을 벌이는 이공대에 라이언이 들어간 것은 열흘 전인 11일이었다. 이공대 인근 크로스하버 터널에서 ‘여명 작전’으로 불리는 도심 교통 마비 시위를 하던 중 경찰과 맞닥뜨렸다. 크로스하버 터널은 홍콩섬과 주룽반도를 잇는 터널로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최루탄과 고무탄을 쏘며 진압에 나서는 경찰에 밀려 라이언을 비롯한 시위대가 학교로 쫓겨 들어갔다. 시위대는 경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았다. 이번 시위 중에 캠퍼스 안에 최루탄이 날아든 것은 이공대가 처음이었다. 시위대는 공성전을 펼치고, 인근 도로를 수시로 봉쇄하는 ‘여명 작전’을 펼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후 ‘LIHKG 포럼’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공대는 지리적으로 여명 작전을 펼치기 좋다. 홍콩중문대처럼 이공대를 공성전을 펼치는 장소로 쓰려고 한다. 도움을 요청한다. 마술사를 모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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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경찰을 저지하기 위해 쓰는 화염병을 ‘마술사’ 또는 ‘마법의 묘약’이라고 한다. 홍콩 소셜미디어인 LIHKG 포럼은 이번 시위 국면에서 학생들이 시위 정보를 공유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글을 읽은 학생 2천여 명이 이공대로 모였고, 화염병과 음식 등 시위 물자가 조달됐다.
여명 작전과 경찰과의 신경전이 계속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한 건 11월17일 오전이었다. 친중파 성향 시민들이 몰려와 이공대에서 점거농성 중이던 시위대와 충돌했고, 이날 밤 홍콩 경찰은 캠퍼스 고립 작전을 시작했다. 경찰은 물대포 차량 두 대를 동원해 시위 진압에 나섰고, 시위대는 벽돌과 화염병 등을 던지며 저항했다. 일부 시위대가 활을 쏘았는데 진압에 나선 경찰 한 명이 종아리에 화살을 맞으면서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졌다. 경찰이 쏜 물대포에 흠뻑 젖은 시위대 중 일부는 설상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기온에 ‘저체온증’을 호소했다. 라이언은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경찰이 언제 학교로 진입할지 몰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당시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고 말했다.
시위대는 학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실내 체육관에서 잠을 자면서 점거시위를 이어갔다. 11월18일 오전에는 이공대 정문 출입구에 폐품 등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텅진광 이공대 총장은 학생들에게 “경찰서로 함께 가 사건이 공정하게 처리되도록 하고, 법률 지원까지 하겠다”며 학교 밖으로 나올 것을 설득했지만 학생들은 응하지 않았다. 캠퍼스를 나가는 순간 경찰에게 체포돼 ‘폭동죄’로 기소될 것이라 믿었다. 이공대 학생 대표인 오완리는 인터뷰에서 “텅진광 총장은 무책임했으며, 학생들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경찰에 투항하라는 말만 반복했다”고 말했다.
라이언은 “곳곳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비축해둔 음식물이 떨어지면서 학교를 나가고 싶어 하는 학생이 속출했지만, 모든 출입구를 경찰이 차단해 떠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부 학생은 하수도로 탈출을 시도했다. 11월18일부터 19일 오전까지 시위대는 일곱 차례 탈출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400명 이상이 경찰에 체포됐다고 홍콩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20일에도 600명 넘는 시위대가 캠퍼스를 떠나 21일 현재 100여 명만이 점거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11월16~17일 이공대 캠퍼스에 들어가 학생 21명을 인터뷰한 전명윤 여행작가는 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안에 있는 학생들과 연락해보니, 지금은 교내에 전기까지 끊어진 상황이어서 시위대와 연락도 잘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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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대 점거시위의 한계는 뚜렷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홍콩 경찰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홍콩 현지 언론과 여러 외신은 “홍콩 경찰이 대학교 점거시위의 최후 보루인 이공대 시위 진압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계가 이렇게 명확한데 이공대에 남아 있는 시위대는 무엇을 위해 캠퍼스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버티는 이유는 11월24일 치를 예정인 홍콩 지방선거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전 작가는 “이공대 내부에서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들은 24일까지 점거시위를 이어가야 지방선거에서 압승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선 18개 선거구에서 구의원 452명을 선출하는데, 6개월 가까이 이어진 시위로 반중 정서가 높다. 민주파를 비롯한 반중 진영에서 의석을 싹쓸이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뽑히는 구의원 452명 중 117명은 홍콩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1200명에도 포함되기 때문에, 선거에서 압승하면 중국 공산당 정부를 향해 일부 저항의 목소리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화염병과 투석기로 홍콩 경찰에 저항하고 있지만 사실상 경찰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시위대가 노리는 것은 여론전이다. 세계 시민사회와 외신들이 홍콩을 주시하는 상황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중국 공산당과 홍콩 정부를 압박해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11월20일 오전 미국 상원에서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홍콩 인권법)을 통과시키자 이공대 교정에 성조기가 등장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홍콩 인권법은 21일 하원도 통과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승인 절차만 남은 상황이다. 캠퍼스 내 시위대는 이런 미국의 움직임도 자신들의 점거시위로 얻어낸 성취라고 생각한다고 전 작가는 설명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젠 전업 시위대… 학교로 안 돌아가”</font></font>
그러나 시위대에 대해 계속되는 폭동죄 기소가 ‘역린’인 것처럼, 시위대의 여론전과 잇따르는 미국 정부의 움직임 또한 중국 공산당과 홍콩 정부에는 역린이다. 홍콩의 민주화 투쟁이 6개월 가까이 이어졌지만 해를 넘길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일부 언론은 ‘최후의 보루’인 이공대에서 시위대가 완전히 물러나면 시위의 동력이 사그라들 수 있다고 내다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공대를 떠난 시위대는 이미 다시 다른 시위에 참가할 전의를 다지고 있다. “일부 사람은 지방선거에 희망을 품고 있다지만 이미 홍콩의 정치는 중국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나는 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접었다. 이미 전업 시위대가 됐다. 다음 시위가 열리면 어디든지 찾아가 맨 앞에 설 것이다.” 라이언이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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