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노력에 못 미치는 돈을 벌고, 집값에 마음 졸이고, ‘을’로 버티는 삶으로 돌아가 사람들은 묻는다. ‘왜 이래야 하는 걸까, 희망은 없는 걸까.’ 정부와 학자들은 짐짓 딱딱한 말들을 꺼내 든다. ‘양극화를 심화하고 혁신을 옥죄는 경제구조 때문이다.’ 경제구조 개혁은 사람들의 꿈, 정부의 꿈이 된다. 현실은 냉혹하다. 부족했던 준비, 방법론의 차이, 경기와 세계 경제 상황, 따라와주지 않는 성과, 반대 여론 따위에 부딪힌다. 꿈은 현실 앞에서 조금씩 휘어지고 물러선다. 여기까지가 2부, 여기서 끝맺어도 무리 없다. 조금 슬픈 뒷맛은 남는다.
그리고 3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2부의 첫 문장을 더듬는다. ‘경제 패러다임 전환’. 두근대던 그 단어가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드문드문 같은 숙명을 안고 있다고 믿었던 10여 년 전 정부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절박감은 더해갔다.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했던 문재인 정부가 11월9일 임기 반환점을 돈다. 별 의미 없는 날이다. 경제구조 개혁을 꿈꿨던 학자들은 그래도 의미를 찾는다. 꿈이, 실은 현실에 지지 않았다는 반전이 이날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지난 2년 반 이들의 기대, 실망, 좌절, 희망을 따라갔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이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성과와 아쉬움을 짚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이 새 대통령을 맞이하는 스마트폰 불빛으로 물들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가 무대에 올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의 꿈을 이야기할 즈음, 문재인 대통령이 광장에 들어섰다. 개혁 열망, 한고비 넘겼다는 안도, 무엇보다 내일부터는 ‘정말 다른 세상’일 거라는 흥분이 봄밤을 기분 좋게 휘감았다. 2019년 5월9일 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해졌다.
숫자를 보고, 지나온 정책의 역사를 살피며 한국의 경제구조를 고민하던 개혁적인 학자들도 이 흥분 속에 예외일 수 없었다. “60년 동안 깨지 못했던 한국 경제구조를 이제는 바로 세울 수 있는 가능성”(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에 들떴다. 그들이 보기에 “경제정책은 여전히 위기를 고조시켰던 성장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고, 2010년대 이후 그런 성장 공식은 누가 봐도 한계에 이르기 시작했다”(박상인 서울대 교수).
문재인 정부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
구조개혁, 아득해 보이는 단어 속에 이들이 포함했던 주제는 주로 이런 것들이다. 재벌 개혁, 증세와 복지 강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부동산 가격 안정. ‘세상이 바뀌면 내 삶도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던 촛불 앞에 학자들이 내줄 수 있는 나름의 답들이었다. 한때는 성장을 담보했던, 그러나 이제는 서로 얽혀 위기를 고조하는 구조를 풀어헤쳐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다.
수출 잘되는 대기업은 한때 자랑스러웠지만, 수출 경쟁력(비용 절감)을 위해 중소기업의 혁신 역량을 가로막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는 그대로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쥐는 임금과 비전의 격차가 됐다. ‘집값 불패’ 신화 속에 부동산으로 돈이 몰릴 때, 경기는 짧게 활기를 띠었지만 부채는 쌓이고 집 가진 사람과 집 없는 사람 사이가 멀어졌다. 저당 잡힌 집의 가치가 떨어질세라 부동산값 상승을 노린 지역주의도 달아올랐다. 격차를 메우지 못하는 빈약한 복지는 그 자체로 사회문제이기도 했고, 사람들의 불안을 재촉해 다시 내수를 제약하고, 부동산 투자를 독려하고,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가 되기 위한 격한 경쟁을 유발했다. 이런 과정이 돌고 돌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왔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던”(박복영 경희대 교수) 구조가 “개개인의 삶을 근본부터 옥좼다”(박상인 교수). 그나마 이 구조의 장점이던 경제 성장 효과마저 둔화했다. 불평등, 줄어드는 혁신 기회 따위 스스로 만들어낸 위기에 잠식당했다. 201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반적인 성장세가 둔화했다.
마구 엉켜버린 불안의 고리를 풀어낼 실마리를 문재인 정부만큼은 찾을 수 있으리라는 꿈이 학자들에게 있었다. 오건호 위원장이 당시를 회상한다. “개혁에 대한 진심이 있을 것 같은 대통령이, 80%나 되는 국정지지도를 가지고 나타났다. 이건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부의 문제인식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운용 방향을 담은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의 제목은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 고착화, 양극화 심화의 구조적·복합적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고 평가했다.
학자들이 정부 정책이 펼쳐지는 국면마다 자신들이 했던 생각과 고민을 되새겼다. 경기 상황, 정치적 득실, 사회적 갈등 가능성 같은 현실의 벽 앞에 2017년 5월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경제구조 개혁의 꿈은 조금씩 바랬다.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집권 정부의 숙명’이라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이들이 있었다. 실망과 절박감에 좀더 강하게 정부가 의지를 보여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드문드문 ‘개혁’을 고리로 이어진 10여 년 전 참여정부 때 기억이 스칠 때면 안타까움이 좀더 커졌다. 시간을 돌려, 이야기는 2017년 7월19일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이 발표된 날부터 시작한다.
복지 위한 증세도, 과감한 재벌 개혁도 없었다
2017년 7월 경기는 아직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물론 예전처럼 티가 잘 나지 않는다. ‘호황인지 모르겠는 호황’이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우리 성장의 최대치인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초반의 5%대에서 2% 후반으로 주저앉았다. 경기 변화가 아닌 경제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확신이 굳는다.
오건호 위원장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복지 대책을 살피고 뒤쪽 재원 대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부는 전체 공약 이행에 178조원이 들 거라고 봤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수 자연증가(초과세수) 등이 언급됐지만 ‘증세’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음 날 열린 재정전략회의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한 대통령은 말했다. “서민·중산층 증세는 없을 것입니다.”
‘증세 없는 복지’를 선언한 것일까. 박근혜 정부를 두고, 그토록 비판해왔던 형용모순이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복지와 증세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사회의 개인에 대한 의무와 개인의 사회에 대한 기여를 공평하게 정하는 기본적인 개혁 작업이라고, 오 위원장은 생각해왔다. 그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체계가 갖춰진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문재인 케어)가 있었고, ‘사회서비스 공공 인프라 구축’ 같은 정책도 개혁과제에 포함됐다. “사회서비스를 민간위탁에서 정부로 옮기는 공공 인프라 구축은 복지 노동자의 처우, 복지의 질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정부에서 받던 일감을 포기해야 하는 민간 위탁기관들의 반발이 있을 테지만, 그 과정을 잘 조율해내는 것이 결국 정부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하는 마음은 재벌 개혁에 집중해온 박상인 교수도 비슷했다. 그가 꿈꾸는 재벌 개혁은 갑작스러운 재벌 해체는 아니다. ‘재벌에 일정한 유예기간을 두고 잘하는 사업에 집중한 작고 효율적인 구조로 만들고, 이것이 중소기업 혁신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 과제에는 “재벌 개혁의 큰 그림과 단계별 계획, 치밀한 수단들이 보이지 않았다”.
박 교수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벌 개혁 과정에서 정부가 겨뤄야 하는 상대는 ‘재벌이 위축되면 나라 경제가 무너진다’는 믿음이다. 박 교수는 “적폐 청산이나 최저임금 같은 좀더 눈에 잘 띄는 주제로 정치적 자원을 더 모은 뒤 추진하려고 잠시 묵혀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를 대비해 언론사 이곳저곳에 기고하고 인터뷰하고 토론회를 찾으며 재벌 개혁을 독려했다. ‘복잡한 지배구조는 그대로 두고 각종 행위만 규제하는 방식을 벗어나, 재벌이 예측 가능성 속에 지배구조 자체를 단순하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청사진과 시간표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세, 사회복지 인프라 건설, 재벌 개혁. 모두 큰 사회적 갈등이 벌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쪽, 정부 위탁 사업을 맡아온 민간 사업자, 재벌과 국가 경제를 동일시하는 믿음 같은 것을 뚫고 나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갈등을 수면 위로 꺼내지 않았다.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 ‘나라다운 나라’라는 구호는 있었지만 그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그 과정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순서로 해나갈지에 대해 큰 그림이 없었다.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 참여정부 때 논란 속에 묻혀버린 정책들의 기억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촛불을 들었던 2017년 국민의 열망을 너무 못 믿었던 건 아닐까.”(오건호 위원장)
마음 한편 의구심 속에 오 위원장은 13년 전 ‘비전 2030’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대와 좌절을 떠올렸다. 참여정부 임기 1년여를 앞두고 나온 비전 2030은 ‘너무 늦어’ 억울한 오해를 샀다. ‘좌파 30년 집권 겨냥한 복지포퓰리즘’(<문화일보> 2006년 8월31일치 사설)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정말 곰곰이 깊이 생각하는 복지 전략을 한번 우리가 함께 세워봤으면 좋겠다(싶었다). ‘돈이 이만큼 필요할 것이다’라고 계산서 내놓았다가 박살나게 또 맞고 물러간다.”(노무현 전 대통령 2007년 10월12일,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5년’에서 재인용)
EITC·기초연금 정책도 ‘최저임금 수습’용 전락
2018년 5월. 경기 상황을 나타내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한 해 전 9월부터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2018년 1분기 GDP 성장률은 1%(실질, 전기 대비)로 나쁘지 않다. 혼란스러운 지표 속에 ‘경기침체 국면 초입’이라는 진단(김광두 당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과 ‘판단하기에 성급하다’(김동연 당시 부총리)는 정부 해명이 맞부딪힌다. 위기라면 경기보다 ‘구조적 위기’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통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부터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본격화했다. 위기감은 고조된다.
가장 뜨거운 논쟁은 ‘고용지표’에서 일어났다. 2월 취업자 수가 한 해 전보다 10만4천 명 늘어난 것을 시작으로, 취업자 수 증가폭이 10만 명 초반 또는 그 이하를 맴돌았다. 적어도 20만 명을 넘어섰던 예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노동지표가 나오는 날이면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의 전화도 바빠졌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때문입니까?” 할 말이 없었다. “최저임금 영향을 파악하기에 너무 이른 시점부터 기승전 최저임금이었다.” 생산가능인구(15~64살) 감소, 제조업 위축처럼 고용지표가 가리키는 ‘진짜 구조적 위기’ 징후들이 ‘정부의 변명’으로 여겨졌다.
김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정상적인 저임금 노동시장을 정상화하는 것’ 정도로 이해했다. 그 토대 위에 노동 구조 개혁도 가능할 거로 봤다.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 박근혜 정부가 위를 끌어내리는 방식의 구조개혁 작업을 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나 정규직화로 아래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쓴 모습이었다.”
고용지표 악화가 정부 경제정책의 실패로 여겨지며, 저임금 노동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했던 노동정책 방향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5월 국회에서 결국 상여금과 복리후생비를 최저임금에 포함해 실질적인 인상폭을 낮추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노동계는 총파업과 최저임금위원회 탈퇴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경제정책은 “개혁을 지향점 삼아 끌고 나가기보다 지표를 다급하게 수습하는 모습이었다”고 김유선 이사장은 되짚었다. 근로장려금(EITC) 확대, 노인 일자리 확대, 기초연금 조기 인상 같은 굵직한 정책들이 최저임금 인상 부작용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 정도로 비쳤다.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포기하거나, 탄력근로제 확대를 꺼내놓을 때면 노동계의 반발을 샀다. “잘한 것조차 큰 그림 아래 체계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닌 뒷수습하는 정책으로 이해돼 개혁의 동력이 되지 못했고, 공약의 후퇴로 받아들여질 경우에는 애초 기대를 품었던 집단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노릇을 했다.”(오건호 위원장)
오락가락 부동산 정책도 약발 잃어
2018년 7월. 상반기를 가득 채웠던 최저임금과 고용 논란, 경제위기론을 딛고도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17개 광역자치단체장 가운데 14곳을 차지한다. 국정지지도 70% 선을 유지한다. 서울 집값 오름세가 심상치 않다.
“집값만큼은 잡겠다”는 의지와 함께 대출규제를 강화하고 다주택자 세부담을 강화하는 6·19 대책, 8·2 대책 등이 한 해 전 발표됐지만 약발이 오래가지 않았다. 부동산에 대한 정부 태도의 ‘바로미터’로 여겨졌던 종합부동산세(종부세)는 감춰뒀다. “참여정부를 잇는 문재인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을 잡는 데 효과적인 종부세가 후보 시절부터 ‘당장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식으로 설명되는 게 답답했다. 참여정부 때 종부세 논란 경험을 트라우마로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 정부 출범부터 종부세가 나오기까지 1년 넘게 걸렸다.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먼저 앞세웠다.
재정개혁특위는 2018년 7월 종합부동산세 개편안을 내놨다. 참여정부 때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마저도 정부 세법개정안에서 다시 한번 완화됐다. 시장 반응은 솔직했다. 아파트값은 계속 올랐다. 결국 9·13 대책으로 종부세는 다시 한번 강화된다. “부동산 불패론을 깨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 방향이 필요한데, 흔들리는 종부세 정책이 이 정부는 진심으로 부동산을 누를 의지가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전강수 교수)
종부세 충격이 진보 지식인 사이에서 컸다. 전 교수를 포함해 개혁 진영 학자 323명은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 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을 발표했다. “촛불을 믿고 개혁하라”고 했다. 지방선거 직후, 인터넷 기업에 한해 은산분리를 완화하는 ‘인터넷 은행 특례법’이 문재인 정부의 규제혁신 과제가 된 것을, 재벌 개혁 의지의 좌초로 본 박상인 교수도 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뒤통수 맞은 것 같았다. 정말? 대통령이? 싶었다.”
경기 하락 방어하려다 구조 개혁 뒷전
2019년 1월. 경기 하강기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2019년 1분기 GDP 성장률은 0.4%(실질, 전기 대비) 감소했다. 반도체 가격 하락, 미-중 무역분쟁 등 영향을 받아 수출은 감소세다.
박복영 교수는 이 시점에 접어들어 경제구조 개혁 동력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정부가 집중한 건 ‘구조’보다 ‘경기’였다. 2018년 말 발표된 ‘2019년 경제정책 방향’은 가장 첫머리에 반도체 클러스터,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처럼 재벌 대기업이 주도하는 투자 사업들을 열거했다. 뒤이어 ‘2019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23개 지역 SOC(사회간접자본) 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이 됐다. “경제성장률을 어느 정도 유지해야 구조개혁 동력도 확보할 수 있겠지만, 구조개혁 과제를 함께 설득하려는 시도도 없었다.”(박복영 교수)
경기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적으로 오간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 기업 투자와 건설 투자를 늘려 경기를 부양하는 풍경은 익숙하다. 국민의 정부 때 부동산 규제와 신용카드 규제를 풀었고, 이명박 정부 때 기업 투자를 독려하려 세율을 낮췄고, 박근혜 정부 때 ‘빚내서 집 사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뒤에 선 정부는 과잉 유동성, 경제 집중과 양극화, 부채 같은 부작용을 수습해야 했다.
구조개혁 앞에 경기가 하강한다. 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쉽지 않다. 어디까지를 부작용을 키우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으로 봐야 할지부터 불분명하다. 참여정부는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켜나갔다’(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참여정부에서도 2003년부터 시작된 경기 하강기에 맞서 ‘경기 활성화를 위한 종합 투자계획’(2004) 등을 내놓는다. 당시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현재 청와대 정책실장)는 이렇게 적었다. “여전히 활력을 찾지 못하는 한국 경제 상황은 곧바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기치하에 노무현 정부의 경제개혁 추진에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모든 투자는 선이다’라는 관점에서 재벌에 투자를 구걸하는 방식이야말로 보수 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매몰되는 첩경이다.”(‘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재벌개혁·금융개혁의 현황 및 과제’, 2005)
기대를 거두기도, 의구심을 거두기도 어려운
2019년 11월. 문재인 정부 임기가 절반 지났다. 경기는 바닥을 찍고 나아지리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국정지지도는 40% 중반대 수준을 오르내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건설과 기업 투자를 독려하지만 인위적인 부양책은 아니라는 입장도 동시에 전한다.
“이쯤 되면 ‘정말 벌써 2년 반밖에 안 남은 거야?’ 하는 마음이 간절하길 바랐는데.” 박상인 교수가 씁쓸하게 웃는다. 재벌 개혁에 대한 정부 계획은 일단 공정거래법 개정안, 상법 개정안으로 구체화됐지만, 그가 보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 법마저 야당 반대로 1년째 국회 언저리를 맴돈다. 박 교수는 “100보 뒤에서 출발해 200보 양보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절박해서, 희망은 못 거둔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실패로 기록되면 포퓰리즘 속에 각자도생하는 경제로 가버릴까 두려워서 아직 남은 2년 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어요.”(박상인 교수)
기대를 거둘 수는 없지만 의구심은 짙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건호 위원장이 말한다. 여전히 복지와 증세의 큰 그림을 담은 계획은 발표되지 않았다. “연금 개혁 논의에서는 또다시 뜨거운 감자를 쉬쉬하며 묻어두는 모습을 보였고, 민간위탁 사회서비스를 정부가 직접 제공하겠다던 계획은 상당 부분 축소됐습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구조개혁이라는 같은 단어 안에서 처음부터 조금씩은 다른 정도의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쁜 제도라도 그 안에 균형이 이미 형성돼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조금씩 이전의 방향을 틀어온 것 정도로는 볼 수 있지 않을까.”(정세은 충남대 교수) 그럴 수도 있다. 돌아보면 확장 재정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한국형 실업부조 도입, 근로장려금 확대,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같은 변화도 있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변화의 한계”(김유선 이사장)를 끝내 인정하기도 한다.
어떻게 평가하든, 이들이 꼽는 가장 안타까운 점은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기 안에서조차 더는 반짝거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때면 별 의미 없는 11월9일, 문재인 정부의 임기 반환점에 괜히 큰 의미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너무 흔한 단어이지만, 초심이라는 말을 요즘 자꾸 생각하게 된다.”(박상인 교수) 2017년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말하던 그때 문재인 대통령의 초심은 박 교수의 초심과 같은 것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 보였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도 대다수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성장 양극화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문재인 대통령, 2017년 7월21일 재정전략회의)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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