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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 써도 되는데 또 지어야 합니까?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용역보고서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기존 공항 활용 가능”
등록 2019-08-08 11:07 수정 2020-05-03 04:29
2017년 추석 연휴 때 붐비는 제주공항터미널 모습(위). 제주공항의 2개 교차활주로 모습. 연합뉴스

2017년 추석 연휴 때 붐비는 제주공항터미널 모습(위). 제주공항의 2개 교차활주로 모습. 연합뉴스

5월10일 공개된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 보고서가 제주 제2공항 논란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고 있다. 제2공항 건설을 무조건 반대하던 제주도민들이 ‘기존 공항 활용’이라는 강력한 대안으로 결집하는 모양새다. 침묵하던 항공전문가들 사이에도 “제주 제2공항 건설은 무리수가 많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ㅈ씨는 에 “지금 제주공항의 활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면서 “내가 다녀본 외국의 복잡한 공항 활주로보다 훨씬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새 공항을 건설하기는 어렵다. 반대와 갈등이 심하고 경제적 부담도 크다. 제주공항에 부족한 것은 활주로가 아니다. 계류장과 유도로, 터미널 같은 공항 인프라다. 주변 부지가 좁다 하지만, 지금의 공항 시설을 보완하는 게 새로 공항을 짓는 것보다 경제적·사회적으로도 훨씬 효과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기존 공항 활용 위한 19가지 제안

기자가 만난 다른 공항전문가도 “우리 관제 시스템이 너무 보수적이다. 생각과 관행을 바꾸고 관제 역량을 확충하기만 해도 제주공항이 이착륙 용량을 30% 이상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 제주공항 서쪽으로 터미널과 계류장을 더 지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고 했다. 관제사들 사이에도 “2개의 공항 운영은 안전 부담이 크다” “차제에 기존 제주공항의 관제 역량에 대한 투자가 확실히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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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은 세계에서 손꼽는 공항 컨설팅 회사다. 동남권 신공항 용역을 수행하는 등 국내 사정에도 밝다. 이들이 내놓은 기존 제주공항 활용 방안 보고서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다. 기존 제주공항을 활용하는 세 가지 대안을 검토했다.

먼저, 현재 사용 중인 동서 활주로를 최적화하는 대안이다. 용역을 수행한 2015년이나 지금이나, 제주공항 활주로는 시간당 최대 35회 이착륙이 가능하다. 시간당 46회 이착륙이 가능한 영국 런던의 개트윅공항보다는 성능이 많이 떨어진다. 파리 드골공항 활주로도 시간당 최대 42회 이착륙이 가능하다. 용역팀은 착륙과 이륙 사이 분리 간격을 더 좁힐 것, 그리고 활주로에서 계류장으로 빠져나가는 고속탈출 유도로를 추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런 식으로, 단기간에 시간당 40회까지 활주로 성능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장기적으로는, 시간당 46~50회까지 성능 개선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둘째 대안은 기존 동서 활주로의 북쪽에 평행 활주로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도두봉 정상을 잘라내거나 도두마을을 철거해야 하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단점이 지적됐다.

파리 용역팀은 세 번째 대안을 가장 선호했다. 남북 방향 보조활주로를 재가동해 기존 활주로와 교차 운용한다는 방안이다. 그러면 이착륙 횟수를 시간당 60회까지 늘릴 수 있고, 2035년까지 필요한 용량을 훨씬 저렴하게 안정적으로 충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용역팀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19가지 세부 권고안을 제시했다. 역시, 관제 관련 내용이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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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항로 운영과 관련해 4가지 개선안을 권고했다. 도착 비행기 정보를 자동 관리할 수 있는 기본 프로그램조차 미비한 점이 지적됐다. 즉시 도입을 권고했다. 이륙-이륙 항공기가 이어지거나 착륙-착륙 항공기가 이어질 때 간격을 지금의 10NM(해리)에서 유럽과 같은 8NM으로 좁히라고 제안했다. 이 방법만으로도 제주공항의 전체 용량을 25% 늘릴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제주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항로의 혼잡을 줄이기 위해, 인천·김포 이외의 공항으로 가는 별도 평행항로를 만들고 북쪽 항로의 절차도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용역팀은 바람 방향에 따라 동서 활주로와 남북 활주로를 적절히 활용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구글어스 화면 갈무리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용역팀은 바람 방향에 따라 동서 활주로와 남북 활주로를 적절히 활용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구글어스 화면 갈무리

제주항공청, 이미 개선안 이행 중

항공기가 공항으로 접근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군 공역(공중 영역)을 유연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접근관제사 채용과 교육을 강화하는 등의 권고안을 담았다. 관제탑 운영과 관련해서는, 인력의 과감한 확충과 체계적인 교육·훈련 도입을 권고하면서 관제사 인식의 변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항공기 이착륙 때 분리 간격 축소와 두 활주로 간 교차 이착륙에 안전하게 대응하려면 관제 인력의 역량 강화가 필수기 때문이다. 공항 운영과 관련해서도 계류장에서 활주로까지 신속하게 이용하고, 계류장 배정의 표준화된 규칙을 만들고, 교통량 증가에 대비한 관제사 교육·훈련 방안을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이렇게 관제 역량을 강화하라거나 군 공역 운영의 유연성을 확보하라는 개선안이 용역팀이 권고한 19가지 중 14가지에 이른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권고안은 19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해, 이론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폄하한 것과 달리, 대부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권고 내용인 것이다. 나머지 5가지 권고안은 활주로와 유도로 시스템과 관련된 것들이다. 동서 활주로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1~3개 고속탈출 유도로를 추가하고, (길이가 짧은) 보조활주로의 안전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양쪽 끝에 비상시 비행기를 붙잡을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하고, 시간당 이착륙 횟수의 1.2배 이상 (항공기를 세워두는) 주기장을 확보하고, 평행유도로를 이중화하라는 등이다. 제2공항반대 범도민행동의 박찬식 공동위원장은 “19가지 권고안의 많은 부분을 제주지방항공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시행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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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주지방항공청의 ‘제주공항 안전도 및 효율성 향상방안 보고’ 자료를 보면, 파리 용역팀의 권고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고속탈출 유도로를 이미 3개 증설했으며, 이륙대기구역을 2개 신설하고 계류장도 7개 증설했다. 제주지방항공청은 “그동안 공항 수용능력 개선을 위해 주로 시설 확충에만 치중하고, 시설 장비와 관제·조종을 망라한 종합 방안은 없었다”고 스스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착륙 항공기 사이 분리 간격을 현행 3180m에서 2400m까지 단축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지금은 착륙-이륙-착륙을 엇갈리게 관제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상황에 따라 연이어 착륙-착륙 또는 이륙-이륙할 수 있도록 관제의 유연성도 높이기로 했다.

개선안 따르면 시간당 이착륙 횟수 35→60회

보고자료에서는 계류장과 터미널의 처리 용량이 이미 시간당 46.7대 수준으로 확충됐다고 밝혔다. 다만 관제 업무 역량과 활주로 처리 용량이 각각 시간당 35대와 36대에 불과해, 공항 운영에서 병목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관제 역량 확충과 활주로 진입·탈출 절차 개선만으로 제주공항의 이착륙 성능을 시간당 35대에서 46.7대까지 30%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 북쪽 군 훈련 공역을 축소해 관제업무 가용 공역도 55% 확장하기로 했다.

파리 용역팀은 기존 동서 활주로와 유도로, 관제 역량을 개선하는 데 더해 남북 방향 보조활주로까지 활용하면 제주공항의 시간당 이착륙 횟수를 지금의 35회에서 60회까지 늘릴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이게 사실이라면, 제2공항 건설을 놓고 다툼을 벌일 여지 자체가 사라진다.

지금으로선, 파리 용역팀의 권고안이 탁상공론이 아니라 가장 비용이 저렴하고 현실적인 대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찬식 공동위원장은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의 용역 책임자를 국내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면서 “국토교통부와 제2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도민들이 한자리에서 기존 제주공항 활용안의 허실을 따져볼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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