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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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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부모 아닌 입양 산업이 타깃”

개정안에 관여한 김도현 뿌리의 집 원장 인터뷰
등록 2019-06-19 09:46 수정 2020-05-03 04:29

2005년 정부가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해 5월11일을 ‘입양의 날’로 제정했다. 2011년부터는 입양인과 미혼모, 한부모 단체가 5월11일을 ‘싱글맘의 날’로 기념했다. 2018년 정부가 ‘원가정에서 아이가 양육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입양보다 우선’이라는 취지를 수용해 5월10일을 ‘한부모가족의 날’로 제정했다. 기념일 제정의 사회적 목표를 달성한 ‘싱글맘의 날’은 올해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줄곧 소란스러웠던 두 기념일의 불편한 동거가 9년 만에 막을 내렸다.
사실 ‘원가정 지원이 입양보다 우선’이라는 원칙에 한부모도 입양부모도 입양인도 이견이 없다. 특히 비혼 출산과 양육에 포용적인 문화를 만들고 한부모가족 자립을 위한 지원을 서둘러 현실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돼 있다.
논쟁은 주로 입양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시작은 양쪽 다 친생부모에게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었다. 다만 한쪽은 입양, 특히 외국으로 입양 갔다가 학대·파양·추방을 경험한 입양인들, 그리고 자녀를 입양 보낸 뒤 고통받아온 싱글맘들과 연대했다. 다른 한쪽은 원가정에서 분리된 아이들을 입양 보내는 일에 헌신하거나 아이들을 입양해 키웠다. 자연스러운 귀결로, 전자는 입양을 ‘지양해야 할 양육 방식’으로 여긴다. 후자는 원가정에서 분리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양쪽이 위기 가정과 요보호아동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낸 법안 역시 서로 다르다. 대표적으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12월 대표 발의한 ‘입양특례법 전부개정법률안’은 입양가족 단체의 큰 반발을 샀다. 입양에 부정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한 탓에 국내입양마저 어렵게 만들었다는 우려다.
이에 앞서 지난해 2월 오신환 바른미래당 국회의원이 ‘임산부 지원 확대와 비밀출산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해외입양인 단체 등이 주도한 2011년 입양특례법 전부개정안에 비판적인 유기아동 지원단체 등이 추진했다.
은 두 법안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두 활동가의 삶과 이야기에 주목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듯하지만 ‘아동 최우선의 원칙’을 공유한 두 사람이 접점을 찾는다면, 한국 사회가 위기 가정과 위기 아동 지원을 위한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김도현의 국회 발언-입양의 날 타도하자’, 5월8일 국회에서 열렸던 싱글맘의 날 김도현 원장의 발언입니다.”

5월9일 한 입양가족 인터넷카페에 김도현 ‘뿌리의 집’ 원장의 발언을 비판하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전날 국회에서 열린 ‘왜 싱글맘의 날인가’ 콘퍼런스에서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모임’ 전 대표의 글을 김 원장이 대독했던 부분이다. 입양부모들은 댓글에서 김 원장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등 분노를 쏟아냈다.

6월3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뿌리의 집에서 만난 김 원장은, ‘입양의 날 타도’ 사례를 소개하며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지난해 12월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양 절차를 더욱 엄격하게 하고 국가기관의 책임을 강화한 ‘입양특례법 전부개정법률안’(이하 남인순 의원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2011년 입양특례법 전부개정에 이어 이번 개정안 작업에도 관여한 김 원장에 대한 입양가족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김 원장이 뿌리의 집 인터넷 게시판에 2012년부터 열정적으로 올리던 ‘해외입양 이야기’를 올리지 않은 지도 1년이 넘었다. “요즘은 글을 안 쓰고 있어요. 에너지가 모자라서. 오랜 시간 논쟁적인 사안을 끌고 오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입양의 날’을 ‘싱글맘의 날’로

“나는 생모를 만나기 위해 이 길을 갑니다.”

1993년 스위스 바젤의 한국계 입양인 지윤 엥엘(당시 23살)이 한 줄 유서를 남기고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 김 원장이 스위스에 유학 중이던 때다. 이역만리에서 치른 한국인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는 해외입양인 문제에 헌신했다. 2004년 귀국 뒤 해외입양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고국 방문과 재정착을 돕는 뿌리의 집 운영을 시작했다.

스위스와 뿌리의 집에서 그와 인연을 맺은 해외입양인들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더러 ‘좋은 나라 좋은 가정’에서 성장한 입양인도 있었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생애 초 겪은 ‘이별과 상실’로 고통받고 있었다. 처음부터 해외입양을 사회적 이슈로 의제화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해외입양인들이 잠시 머물며 모국인과 깊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거장’이 되어주고 싶었다.

2006년 무렵부터였다. 그는 한국 사회에 ‘반해외입양’으로 표현되고 ‘반입양’으로도 해석되는 격정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참여정부가 5월11일을 ‘입양의 날’로 제정해 기념한 일이 그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해외입양 문제를 극복하려면 국내입양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취지를 이해했다. 다만 ‘원가정 보호’보다 ‘입양’이 먼저 사회적 의제로 설정되는 것이 불편했다. 입양이라는 개념 속에 약자인 친생부모와 입양자녀의 목소리는 없고 입양기관과 입양부모의 주장만 담긴 것도 불편했다. 입양의 날을 기념하기 전에, 친생자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여성과 친생부모 품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들에게 관심부터 갖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김 원장은 제인 정 트렌카 대표와 함께 ‘입양의 날’인 5월11일을 ‘싱글맘의 날’로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미국 역사에서 추수감사절은 백인들이 원주민 학살을 병행했던 날이다.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을 국가 애도의 날로 정해 따로 기념한다. 김 원장 역시 미혼모와 입양아들에게 비인간적이었던 정부 정책과 입양기관을 비판하고 사회 인식을 전복하려는 취지로 입양의 날을 싱글맘의 날로 ‘재명명’했다.

그의 도발적인 운동 방식과 언어는 전략적으로 주효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많은 입양가족이 김 원장으로부터 ‘공격받았다’고 느꼈다. 긴 세월 논쟁이 격화되면서 입양가족의 분노가 그대로 반사돼 김 원장에게도 상처로 돌아왔다. “입양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입양 산업이 존재했고, 저는 정부의 입양제도와 입양기관의 관행을 문제 삼았을 뿐이에요. 입양자녀를 사랑으로 키우는 입양부모를 비판하려는 의도는 네버 에버(결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입양부모를 ‘친생부모와 아이를 떼어놓은 가해자’로 비판했다는 오해는 꼭 벗고 싶어요.”

[%%IMAGE2%%]여성운동가, 공익법률가들과 함께

그의 타깃은 정부와 입양기관이었다. 특히 미혼모에게 ‘양육’이라는 선택지를 주지 않고 ‘입양’만 강요한 입양기관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친생부모와 아이의 비극에서 시작된 입양이 입양기관의 수익으로 귀결되는 ‘산업적 이해관계’에 대한 혐오도 짙어졌다. 그의 경험은 미혼모에 대한 정부 지원이 최우선이라는 신념을 낳고 2009년 한국미혼모가족협회 설립의 밑돌이 됐다. 2011년 ‘한부모가정 지원법’을 통해 입양기관이 미혼모 시설 운영을 금지하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입양기관이 운영하는 ‘미혼모의 집’에서 출산한 엄마가 있어요. 사회복지사가 병원에서 출산촉진제를 맞게 해서 출산시켰대요. 자기 퇴근한 뒤에 출산하면 번거로우니까요. 그러곤 바로 아이를 입양기관으로 데려갔어요. 일주일 뒤 엄마가 아기를 다시 찾겠다고 전화했더니, 지원받은 비용을 전부 내놓으라고 했어요. 엄마가 양육 의사를 표시하면서 두세 달 돈을 모았는데, 그사이 아기가 입양된 거예요. 저희가 보건복지부와 입양기관을 쫓아다니며 당시 친모에게 강요된 친권포기각서의 불법성을 알렸어요. 에 제보해 기사도 실었고요. 결국 입양기관이 입양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입양부모가 아이를 돌려보냈죠. 정말 미혼모를 도우려면 미혼모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살펴서 양육을 원하면 양육을 지원하고, 입양을 원하면 입양을 도와야 하잖아요. 하지만 한국의 입양기관 60년 역사 속에서 여성이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할 때 도와준 흔적이 없었어요.”

정부와 입양기관을 겨냥한 그의 주장 중엔 입양가족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도 많지만 도발적인 ‘표현’ 탓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사례도 여럿이다. “해외입양은 아동복지이기보다는 아동학대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해당 글에서 “해외입양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아동복지적 성격을 충분히 담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거시적 차원에서 (중략) 한국 사회가 혼혈아동·장애아동·비혼모출산 아동·결손가정 아동·기아들을 우리 사회 외부로 대거 격출”시키는 등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아동학대’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선택한 순간, 입양가족들은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광야의 거친 목소리’였던 그의 주장은 주류의 목소리가 됐다. 여성운동가와 공익법률가들이 먼저 반응했다. 지금은 싱글맘으로 불리는 ‘미혼모’들은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가부장제 피해자’이기도 했다. 여성주의 운동이 미혼모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김 원장과 해외입양인, 미혼모, 여성운동가, 공익법률가들과 함께 6년간 공들인 결실이 바로 2011년 개정돼 2012년 시행된 입양특례법 전부개정안이었다.

“베이비박스가 유명세를 타서…”

이때부터 입양부모 자격이 강화돼 국내외 입양은 모두 법원의 허가를 받게 됐다. 출산 후 일주일간 입양숙려제를 도입했으며, 입양 전 친생부모에게 양육에 대한 충분한 상담과 정보 제공을 의무화했다. 국내입양 우선 추진 의무화와 중앙입양원 설립 등도 이뤄졌다.

당시 개정돼 시행 중인 내용 상당수는 그 효과와 부작용을 놓고 여전히 논쟁 중이다. 법원의 입양 허가 전제 조건 중 하나로 친생부모 가족관계등록부에 출생신고를 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입양기관과 입양가족들은 이 조항 때문에 영아 유기와 살해가 급증하고 입양이 급감했다고 우려한다. 청소년 미혼모 대부분이 출생신고를 꺼리고, 출생신고 없이 유기된 아이들은 입양될 수 없어 아동양육시설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는 2011년 입양특례법 개정 뒤 베이비박스 영아 유기가 늘어난 것과 관련해 “베이비박스가 유명세를 타면서 경찰서나 주민센터 앞에 버려질 아이들이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것이지 유기아동 숫자가 늘어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출생신고를 넘어 이제 ‘보편적 출생등록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론 구청 단위로 담당 공무원이 산부인과 병의원을 돌며 부모를 면담한 뒤 아기의 출생기록을 남기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는 “우리나라가 1993년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제7조에 따르면 아동은 출생 즉시 성명권과 국적권을 가진다”며 “그 권리를 보장해주는 쪽으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예외적인 경우 독일식 신뢰출산제(비밀출산제)를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 전에 ‘미혼모에 대한 충분한 양육 지원’이라는 전제가 있다. 독일은 헌법에서 아동의 출생등록권리를 보장한다. 다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친생모가 아동청소년 관청으로 찾아오면 해당 관청에서 병원 출산을 돕는다. 친생모와 아이의 진짜 기록을 법원에 봉인한 뒤, 아이의 가짜 기록을 만들어 법원이 입양을 중재한다.

“국가 책임 강화는 불가피”

그가 관여한 남인순 의원 개정안은 가뜩이나 입양기관과 입양가족의 반발이 큰 2011년 입양특례법을 한층 더 강화했다. 입양 신청과 심사를 더욱 까다롭게 하는 등 국내입양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는 법조항을 신설했다. 전반적인 입양 업무를 민간 입양기관이 아닌 국가가 직접 담당하도록 했다. 그는 “입양 업무를 민간에 위탁하고 국가가 관리·감독만 하면 공무원도 민간도 책임을 안 진다”며 국가 책임 강화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또 “부부가 이혼할 땐 법정에서 서로 다투는데 아이가 부모와 헤어질 땐 아동을 대변해주는 기관이 없다”며 “국가는 아이가 최대한 원가정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도와야 하고, 아동이 분리될 때도 친생부모·입양부모 상담과 교육부터 입양까지 모든 과정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를 구성할 때 선의나 사랑이 아닌 ‘제도’를 기초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제도가 정의롭고 제도가 따뜻하고 제도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입양제도 개선에 매달리는 이유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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