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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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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라당 벗고 뛰어다녔는데 뒤에서 먹는 놈 따로 있었다”

고엽전우회 관제데모 나섰던 '주연배우'들의 고백
등록 2019-01-19 05:59 수정 2020-05-02 19:29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이하 전우회)의 힘의 원천은 관제데모이고, 그 반대급부가 정부의 지원이었다. 눈먼 돈이 보장되는 공공사업을 수의계약으로 따내고, 계약 과정이 순탄치 않을 땐 위력 행사를 서슴지 않았다. 정부가 밀어주고 눈감아줄 것이란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이권 사업을 따내 잇속 밝은 업체에 맡기고, 핵심 간부 3인방은 막대한 뒷돈을 챙겼다. 그들은 20년 이상 전우회 조직을 장악하는 장기 집권 체제를 꾸렸다. 권력과 금력의 야합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필수 장치였다.
전우회의 ‘주연배우’들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불법 위력을 행사해 공공기관의 수익사업을 따내는 데 공을 세운 주역들이다. 2018년 말 회의실을 찾은 ㄱ씨는 “수의계약을 따내기 위해 공공기관 현장으로 출동하는데, 그날 주된 역할을 맡을 사람을 우리끼리는 ‘주연배우’라고 부른다”고 했다. 주연배우가 하는 일은, 발가벗고 칼을 휘두르거나, 사방으로 똥물을 뿌리거나, 썩은 고등어를 구워 고약한 악취를 풍기거나, 자동차 밑으로 발을 집어넣어 자해하는 등 지극히 비상식적인 행패다. 공공기관 사람들이 겁에 질리도록 해서, 어쩔수 없이 수의계약에 응하도록 하는 지저분한 불법 폭력 행사다.
지난 10여 년간 전우회의 주연배우를 맡았던 ㄱ, ㄴ, ㄷ, ㄹ씨 4명을 만났다. 그들의 솔직한 심정과 회한을 중심으로 기사를 재구성했다. ‘전우회 3인방’인 이형규 회장, 김성욱 사무총장, 김복수 사업본부장의 2018년 8월 1심 판결문 내용도 참고했다. 전우회 비리 3인방은 주택 사업을 추진하면서 40억원대의 뒷돈을 받은 혐의로 징역 8년, 5년, 6년형을 각각 받았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의 주택 사업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이 2017년 12월 전우회 중앙회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의 주택 사업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이 2017년 12월 전우회 중앙회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8월 말 서울 강남구 도곡동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아무개 사장 집 앞이 시끌벅적했다. 전우회원 10명이 일주일 내내 경기도 성남의 위례지구 택지를 유리한 조건으로 특혜 분양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ㄴ씨가 주연배우로 나섰다. 이 사장의 체어맨 차량이 집 앞으로 나올 때 타이어 아래로 발을 집어넣었다. 발목이 깨졌고 중앙보훈병원에 입원했다.

“철저하게 속았고, LH공사한테 미안하다”

“그 뒤 LH 사장이 두 차례나 전우회 사무실로 찾아와 내 상태를 챙겼다. 내 발목을 부러뜨린 것이 택지 분양 사업을 진척시키는 데 도움이 됐다.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벌금 200만원을 받았는데 힘을 써서 50만원으로 낮췄다. 전우회에서 그 벌금을 대신 내줬다.”

1월14일 서울 중랑구 지하철 7호선 먹골역 근처에서 만난 ㄴ씨는 “그때는 고엽제만 생각하고 뛸 때였다”고 말했다. “전우회원들이 아파트를 하나씩 가질 수 있겠거니 기대하고 내 몸을 던졌던 거다. 우리 사업이 아니라면 그렇게 나설 일이 뭐 있겠나. 그런데 지난해 비리가 터지고 보니, 주택 사업은 전우회와 전혀 무관하고 ‘슬기솔’이란 업체와 3인방의 사사로운 뒷거래 사업이었다. 전우회의 최고 간부 3명이 슬기솔에서 뒷돈 받으려고 우리를 동원했던 것이다. 만정이 다 떨어졌다.” 그는 “전우회의 전체 사업소장 회의를 할 때도 슬기솔 대표가 주택사업단장 자격으로 참여했다”면서 “3인방 말고는 주택 사업이 전우회 사업이 아닌지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ㄷ씨와는 앞서 2018년 말 두 차례 만났다. 그는 2010년 4월 LH파주사업본부로 출동해 본부장을 위협했다고 털어놓았다.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인 채 칼을 들었다. ㄷ씨는 파주 말고도 여러 주택 사업 현장에 출동했고, 4대강 골재 사업 때는 전국의 해당 지방자치단체를 찾아갔다. 이 일로 여러 차례 검찰 조사도 받았다. ㄷ씨는 3인방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우회에서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고 했다. 그는 “나는 홀라당 벗고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뒤에서 먹는 놈이 따로 있었다”며 “철저하게 속았고, LH공사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1월14일 지하철 먹골역에서 ㄴ씨와 함께 만난 ㄹ씨는 “우리는 배신당했고 3인방이 우리를 갖고 놀았다”면서 “이제 고엽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는 “원체 자기들끼리 비밀로 하니까, 뒷돈 거래를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ㄹ씨는 2010년 6월 LH파주사업본부를 찾아가 직원들의 자녀를 위협하겠다고 협박했고, 이듬해 6월에는 사무실에 소화기를 분사해 업무를 못하게 했다.

ㄷ씨와 ㄹ씨는 이 일로 몇차례 검찰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검찰에서는 두 사람과 가족의 계좌까지 이잡듯이 철저히 뒤졌다. 다행히, 두 사람이 슬기솔이나 3인방한테서 받은 뒷돈이 한푼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ㄷ씨는 “더러운 인간들의 검은 거래를 까많게 몰랐고, 뒤늦게 알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때 왜 그렇게 발가벗고 나섰는지 회한이 든다”고 말했다.

먼저 사업 제안한 슬기솔 업체의 실체
2017년 8월7일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의 이형규 당시 회장(왼쪽) 등이 베트남 정부에서 주최한 ‘베트남 고엽제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누리집 갈무리

2017년 8월7일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의 이형규 당시 회장(왼쪽) 등이 베트남 정부에서 주최한 ‘베트남 고엽제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누리집 갈무리

회의실에서 만난 ㄱ씨는 출동 현장에서 썩은 고등어를 구워 냄새를 퍼뜨리는 ‘주연배우’ 노릇을 주로 했다고 고백했다. “썩은 고등어를 구우면 냄새가 정말 고약해 참을 수가 없다. 공공기관 직원들이 질려서라도 한발 물러서게 된다.” 2011년과 2012년에는 다른 회원들이 LH대전본부 간부 집에 찾아가 “고엽제에서 찾아왔다”는 쪽지나 명함을 현관에 꽂아두거나, 아이들 학교에 찾아가 행패를 부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수법으로, 전우회는 고엽제 주택사업단이란 가짜 명함을 쥔 건설업체 슬기솔이 2013년 6월 1836억원 규모의 경기도 성남 위례 아파트 택지를 분양받도록 했다. 아파트는 2016년 9월 완공됐다.

1심 재판에서 슬기솔은 1·2순위 건설업체로 지정될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극히 유리한 조건으로 택지 대금을 내는 특혜를 누렸다. 전우회의 주택 사업이 국가보훈처 승인을 받지 않은 불법인 줄 알면서도 보훈처가 LH에 특혜 분양해줄 것을 요청하는 추천서를 써준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보훈처 관계자들은 “전우회의 수익사업이 아닌 주거복지 사업이라고 생각해 보훈처 승인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으며, 재판부와 검찰은 “전우회의 강요와 협박에 따라 보훈처에서 어쩔 수 없이 추천장을 발급해준 것”으로 판단해 해당 공무원들을 엄하게 처벌하지 않았다.

전우회의 주택 사업은 잇속에 밝은 슬기솔이란 주택업체가 먼저 제안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우회원 ㄱ씨는 “전우회가 특혜 분양을 따낼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슬기솔의 함 대표가 먼저 ‘동업’을 제안했던 것”이라며 “그렇게 악과 악이 만나 10년 동안 더러운 사업을 함께 진행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함 대표가 3인방에게 지급한 월급 성격의 현금과 아파트 분양 대금 등은 법정에서 드러난 것만도 40억원이 넘는다.

구속된 김성욱 전 사무총장의 부인이 지난해 초부터 추석 때까지 전우회 차를 이용해 대전에서 서울까지 남편 면회를 다녔다는 한 전우회원의 폭로도 나왔다. 기름값과 통행료, 기사 월급을 사적으로 편취했다는 주장이다.

보훈처장 바뀌어도 별 변화 못 느껴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들어선 뒤에도 보훈단체의 파행적인 수익사업 운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상환 고엽제전우회 적폐청산위원장은 “불법 관제데모에 나서지 않는 모습은 과거와 달라졌으나, 달리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7년 6월에도 경기도 여주 남한강 준설토를 특수임무유공자회에 수의계약을 해주도록 추천서를 써주었다.

배 위원장은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 2011년부터 2017년까지 6년 이상 장기 집권하면서 만들어놓은 체제가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서 “보훈처도 전우회도 사람들을 물갈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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