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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에 ‘한국’이 지워진다

세계 각각의 문화권에서 직접 제작되고 유통되며

초국가적 장르로 진화하는 케이팝
등록 2018-09-16 12:09 수정 2020-05-02 19:29
방탄소년단이 지난 5월2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공연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지난 5월2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18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공연하고 있다.

케이팝(K-Pop), 그중에서도 아이돌 음악은 늘 ‘경계넘기’를 그 본질로 삼아왔다. 이는 단순히 음악이라는 상품이 국경을 넘어 소비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21세기 아이돌 산업은 아티스트의 기획에서부터 음악 제작, 그리고 홍보와 활동의 면면에 세계화의 의도를 담고 있으며,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이미 초국가적 장르로 진화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케이팝 아이돌의 득세와 전세계를 ‘커버댄스’(춤 따라 하기)의 열풍으로 몰아넣은 싸이의 의 ‘말춤’은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시대가 비로소 가요라는 낡은 구분법을 무너뜨리고 ‘케이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웠던 결정적 사례들이다. 그리고 이제 ‘현상’이라는 말 외에 달리 마땅한 표현을 찾을 길 없는 방탄소년단의 전세계적 인기몰이와 새롭게 변모하는 아이돌 산업은 케이팝이 단순히 국경을 넘는 단계를 또 한번 뛰어넘어 현지화와 개별화의 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케이팝에 대한 새로운 규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네이처’ 하루노는 탈한국의 현주소

케이팝이 경계를 넘어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신’(scene·영역)의 탄생과 그 안에서 맺어질 대중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이제 케이팝의 현지화는 더 이상 동일한 상품을 ‘외국어’로 소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 멤버의 인지도와 문화적 친밀도를 내세워 일본 내에서 압도적인 성공을 이룬 트와이스, 타이 현지 멤버를 통해 타이와 동남아시아에서 어느 아이돌 그룹보다 높은 지명도를 확보한 갓세븐(GOT7)과 블랙핑크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글로벌 산업으로서 케이팝이 취할 현지화의 다음 단계는 바로 ‘탈한국’을 열쇳말로 삼을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에서 스포츠댄서로 활동하며 케이팝 아이돌의 꿈을 키우고, 결국 지난 8월 ‘네이처’라는 한국 걸그룹 멤버로 데뷔한 아베 하루노의 이야기도 한국 대중음악의 하위 장르라기보다 범아시아권의 현대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포맷’에 가깝게 진행 중인 케이팝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부분일 것이다.

데뷔를 앞둔 SM의 중국 아이돌 그룹 NCT 차이나나 JYP의 중국 현지 아이돌 프로젝트 모두 초국적적 방법론이 빚은 케이팝 아이돌의 궁극적인 진화 모델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이 그룹들의 성패 여부는 결국 한국이라는 단일한 ‘신’에 종속되지 않고 각 문화권에서 직접 제작돼 유통되는, 이를테면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 케이팝의 본격적인 미래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케이팝의 경계 넘기는 산업뿐만이 아니라 음악과 듣는 이들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이는 케이팝의 본질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요구한다. 최근 미국 내 방탄소년단의 전례 없는 성공이 가져온 이른바 ‘BTS-팝’ 담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탄소년단의 성공, 나아가서는 그들의 음악을 기존 케이팝과 구분하려는 시도는 1년 전부터 미국 내 케이팝 포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그들의 팬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 흐름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대척점에 특정 아티스트가 아닌 케이팝(아이돌)이라는 음악 전체를 놓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의 ‘다름’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음악이 가진 독창적인 서사나 사운드, 혹은 아이돌이면서 아티스트를 표방하는 ‘진정성’은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미국 내 BTS-팝 지지자들이 단순히 방탄소년단의 상대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케이팝 팬덤 바깥에 위치 짓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탈케이팝’적인 의도를 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방탄소년단이라는 특정 그룹의 예외적 성공에 따른 부수적인 해프닝에 불과할까. 나는 오히려 미국 시장에서 케이팝이 성장함에 따라 나타난 케이팝 팬덤의 분화와 개별화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싶다.

‘로컬’ 팝으로 진화한 케이팝

경계를 넘은 확장된 케이팝 ‘신’은 필연적으로 기존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팬층(청자)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점점 ‘한류 팬’ 혹은 ‘케이팝 팬’ 같은 통상적인 구분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을 점하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만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케이팝이 본격적으로 세계화하기 시작한 이전 시대의 팬덤,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까지의 팬들은 대도시에 기반한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중심이 되어 제한적으로 형성됐다. 그러나 2005년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의 출범 이후 케이팝의 팬덤은 아시안 계열을 넘어 백인, 흑인, 라티노(미국 내 라틴아메리카인) 등의 인종을 아우르며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이들 중에는 ‘2.5세대’ 혹은 ‘3세대’라고 하는 케이팝 아이돌 그룹이라든지, 아예 비아이돌 음악으로 케이팝에 입문한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기존 케이팝이나 한국 문화 전반에 익숙지 않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도 많다.

이미 다양하게 확장하고 분화하기 시작한 케이팝 팬층의 구성에서 방탄소년단은 중요한 리트머스시험지가 되었다. 그동안 은연중에 동질적 집단으로 묶여 있던 ‘한류 팬’과 ‘케이팝 팬’은 방탄소년단처럼 기존 케이팝 아이돌 음악의 문법과 차별화하는 아티스트의 등장과 새로운 정체성 규정을 통해 그 범위와 본질이 재조정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필자가 해마다 취재하는 북미 최대의 케이팝 축제 ‘케이콘’(KCON)에는 올해 로스앤젤레스(LA)에서만 10만 명 가까운 참가자가 몰렸다. 하지만 ‘케이팝을 알아보자’ 정도의 뉘앙스가 강했던 몇 년 전에 비해, 이제는 미국 대중의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사로 그 성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한류’라는 말은 이제 촌스럽게 들리며, ‘한국’을 중심에 놓은 케이팝 담론 역시 더는 그들의 주된 관심이 아닌 듯 보인다.

케이팝 아이돌은 어느새 미국 팝 스타와 동등한 하나의 ‘선택지’가 되었고, 케이팝 자체에 대한 추종이 아닌 각자의 취향에 맞는 그룹에 대한 개별적 지지 양상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가까워진 거리와 경계를 넘은 산업을 통해 그들에게 ‘로컬’ 팝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 케이팝, 이제 케이팝은 ‘한국 음악’이 아닌 한국에서 기획된, 혹은 유래한 음악으로 그 의미가 재정의될 단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김영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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