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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시간이 시민의 시간이 됐다

노동시간 모호한 기자 직군서 본 주52시간제…

일하는 시간 기록되면서 노동시간 단축 기틀 마련
등록 2018-07-10 07:37 수정 2020-05-16 01:47
‘주52시간 근무제’ 첫날인 7월2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위메프 본사 직원들이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52시간 근무제’ 첫날인 7월2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위메프 본사 직원들이 정시 퇴근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직 집 안이 환한데, 집에 들어오니 너무 당황스러웠던 거죠.”

지난 7월2일 한 대기업의 사내 커플이자 30대 워킹맘인 ㄱ씨는 남편과 함께 퇴근했다. 아침 8시~오후 5시가 근무시간인 ㄱ씨는 집에 도착하니 오후 5시30분이었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야근에 집에서 저녁 먹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부부가 갑자기 대낮 수준의 ‘환한’ 시간에 퇴근한 것이다.

부부의 이른 퇴근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친정어머니였다. 친정어머니는 2년째 정작 자신은 주말부부로 살면서 손주를 돌보고 있다. ㄱ씨는 “딸이나 사위가 늘 늦게 들어왔는데 너무 일찍 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남편은 장모님 눈치 보이니 부랴부랴 운동하러 가고…. 엄마가 저보고 일찍 오지 말고 뭐라도 하나 배우라고 하시더군요.” ㄱ씨는 앞으로 저녁 시간에 아이와 어떻게 더 재밌게 놀지, 늘 밖에서 먹던 저녁 식사를 집에서 어떻게 준비할지 고민에 빠졌다. ㄱ씨는 이 상황을 “웃픈 상황”이라 표현했다.

이런 변화는 7월1일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직원 300명 이상 사업장부터 시행된 데 따른 것이다. 기업들은 앞다퉈 ‘유연근로제’를 도입하고, 야근(연장근로)을 제한하는 각종 조처를 시행했다. 이런 내용을 취재하면서 내가 느낀 즉자적 감정은 ‘겁나 부럽다’는 것이었다. 아, 나도 저녁 6시에 퇴근해 아이들이랑 놀 수 있을까? 단어 단위로 말을 내뱉다 문장을 구사하는 둘째 아이의 언어능력 발달 상황을 아내나 아이를 봐주는 ‘베이비시터’ 이모님께 듣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취재할 수 있을까. 유치원 친구 관계 고민이 늘어난 첫째와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나아가, 주 52시간, 아니 40시간만 일할 수 있을까. 나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9년차 기자다. <한겨레> 경제부 산업팀에서 정보기술(IT)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결혼 7년차, 3살·6살 두 딸을 둔 ‘워킹대디’다. 아내도 직장에 다닌다. ㄱ씨 얘기를 들은 7월4일, 나는 새벽 5시30분에 일어났다. 둘째 아이가 요즘 부쩍 일찍 깨서 괴롭히는 바람에 덩달아 일찍 깨는 게 습관이 됐다. 눈을 비비며 스마트폰으로 다른 매체 조간 기사를 확인한 뒤, 오늘은 또 뭘 하고 무슨 기사를 써야 ‘월급루팡’을 면할까 고민에 빠졌다. 사실 눈떠 아침 기사 계획과 일정을 보고하는 9시20분까지가 하루 중 가장 스트레스 받는 시간이다. 업계부터 정부 부처까지 모두 담당하기에 일정도 많고 보도자료도 많이 나오지만 좋은 기사 쓰기는 쉽지 않다.

주52시간만 일할 수 있을까

아침 7시, 자는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아내에게 “오늘 나 저녁 약속 있어(아이들은 너 혼자 재워)”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보통 서울 광화문·을지로에 있는 통신사 기자실로 출근하지만, 이날은 집 앞 커피숍에 자리를 폈다. 며칠 전 네이버 홍보담당자에게 “7월4일 인공지능 테크 포럼(기술설명회)을 하는데 정말 재밌을 것이니 꼭 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깜빡하고 언제 어디서 하는지를 안 물어봤다. 전자우편함과 문자메시지를 뒤져도 안 나온다. 네이버 홍보담당자에게 전화해보면 해결될 일이지만, 이 회사는 출근이 오전 10시다. 가끔 별생각 없이 아침에 전화했다가 저쪽 전화에서 “이번 역은 ○○○역입니다” 등의 소리가 들리면 민망하기 그지없다. 내가 기자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일상의 평온을 깨는 것이 온당한지 고민하게 된다. ‘주52시간 근무제’ 이후 상당수 기업이 유연근로제를 도입하면서, 이런 고민은 더 많아질 듯싶다. 기업 단위로 다양했던 출근 시간이 개인 단위로 쪼개지기 때문이다.

KT 홍보팀은 한 주 동안 많이 일한 직원을 금요일 오후에 퇴근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그래도 네이버 홍보담당자에게 아침 8시께 “꼭두새벽부터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라는 이모티콘과 함께 오전 10시30분부터 강남에서 한다는 답장을 받았다. 9시45분 짐을 싸 강남으로 이동했다.

“야근 많이 하시죠? 기사를 날마다 쓰셔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기자생활 8년 가까이 하면서 가장 많이 받았다면, 최근엔 “52시간 어떻게 하세요?”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은 것 같다. 점심 식당에서, 저녁 술집에서, 커피숍에서도 내가 앉은 테이블뿐만 아니라 주변 테이블에서도 화제는 ‘주52시간 노동’이었다. 사실 ‘주52시간 노동 시대’라는 말은 잘못됐다. 지난 6월27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초청으로 방한한 세계적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대담을 취재했다. 원래는 ‘빈곤과 양극화’를 주제로 한 대담이었지만, 대담의 사회를 본 권태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한 노동정책에 대한 의견을 자주 물었다. “한국 상황은 논평하고 싶지 않다”며 에둘러 말하던 그가 “문재인 정부가 주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일률적으로 단축하고 있는데 의견이 어떠냐”에 대한 질문에 돌직구를 던졌다.

“피프티투 아우어스?” “베리 베리 하이” 그가 한 말 중에 통역 없이 해석 가능한 거의 유일한 말이 바로 저 말이었다. 크루그먼은 “52시간이라고요? 한국도 선진국인데, 그렇게 많이 일한다니요”라며 “한국의 노동조건에 대한 굉장히 놀랄 만한 정보를 얻게 됐다”고 했다. 이런 취지의 기사가 나가자 전경련은 머쓱했는지 “크루그먼이 52시간을 법정노동시간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했다. 맞다. 한국의 법정노동시간은 40시간이다. 그리고 법정노동시간이 40시간이 된 것은 2004년부터다. 근로기준법은 당사자 간 합의를 통해 주 12시간 한도로 주 40시간을 넘는 노동(연장근로)을 할 수 있게 한다. 주 52시간 노동이라는 말 자체가 그동안 주 40시간이라는 법정노동시간이 얼마나 의미가 없었던 것인지, 또 연장근로를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그런 인식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두 번째로 긴 장시간노동 국가라는 오명을 낳게 했다.

경영계와 보수언론에선 52시간도 버겁다고 말한다. 52시간이라는 언명은 연장노동이 당연하도록 인식하고자 하는 경영계가 붙인 레토릭일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했듯 2004년부터 주 40시간제를 시행한 한국이 주 52시간 시대를 열게 된 것은 정부의 잘못된 근로기준법 해석 때문이었다. 2004년 주 40시간제가 시행되면서 자연스레 주5일제(근로기준법상 하루 근무시간은 8시간)로 바뀌었다. 법에는 연장노동과 휴일노동 각각의 언급이 있는데, 정부는 연장노동과 휴일노동을 별개로 해석했다. 1주에 12시간인 연장노동의 한도가 소정근로일에만 적용되고, 휴일노동은 별도라는 것이다. 주 6일제 아래 근로일이었던 토요일(4시간)이 사라지자, 토요일에 일하면 휴일노동인지 연장노동인지에 대한 해석상 논란이 생긴 것이다. 그 결과,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은 줄었는데, 주중에 하는 연장노동 12시간에 휴일노동 8+8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1주에 68시간까지 일하게 된 것이다.

사실 휴일노동도 연장노동으로 보는 게 상식에 맞다. 1주일은 5일이 아니라 7일이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휴일노동이 연장노동에 포함된다는 데까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현재 야당도, 당시 야당이었던 현재 여당도 말이다. 그러나 휴일에 하는 연장노동의 가산수당을 야간에 하는 연장노동처럼 100%를 가산할지, 아니면 50%만 가산할지를 두고 노사간 대립이 첨예했고, 진통 끝에 50%만 가산하는 것으로 지난 2월 말 국회를 통과했다. 이른바 ‘주 52시간 시대’는 5년 전 올 수도 있었던 것이고, 이런 상황을 경영계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부담스러운’ 52시간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는 푸념은 엄살에 가깝다. 현명한 기업인이라면, 리스크 관리를 잘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몇 시간 일했는지 알 수 있어요”

서울 시내 한 기자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태우 기자. 김진수 기자

서울 시내 한 기자실에서 일하고 있는 박태우 기자. 김진수 기자

그렇다면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이 ‘노동시간 단축’이란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분명히 노동시간 단축 효과는 있을 것이다. 다만, 주당 노동시간 한도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기 때문은 아닐 것 같다. 그동안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던 노동시간이 관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는 30대 ㄴ씨는 주52시간 노동 시행을 두고 굉장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시행 3일째에 왜 그렇게 기대감이 컸는지, 또 직접 느껴보니 어땠는지 물었더니 대답은 이랬다. “내가 몇 시간을 일했는지 알 수 있잖아요. 또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 것도 좋고요.” 그는 52시간 노동 시행과 더불어 퇴근 뒤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지난 한 주 몇 시간을 일했는지 당신은 기억하는가. 또 이를 확인할 수 있는가. 사실 나 역시 단 한 번도 내 노동시간을 제대로 계산해본 적 없다. 나는 집 앞 커피숍에서 아침 7시에 업무를 시작했다. 취재하고, 기사 쓰고, 지면용 기사가 초판에 제대로 앉혔는지 확인하니 저녁 6시10분이었다. 10분 뒤 데스크에서 기사를 늘리자고 해서, 기사를 다시 보낸 시각이 6시45분이었다. 이날은 IT 기업에 다니는 학교 선배를 만나, IT 기업 분위기와 주요 이슈 등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대화하다보니 밤 10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기록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노동시간의 기록은 소중하다. 노동시간은 임금 산정의 기준이 되고, 노동자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5년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 조사를 보면, 300명 이상 사업장 사무직 노동자의 월 초과근로시간은 단 4.5시간으로 나온다. 하루가 아니라 월이다. 이 통계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이 통계의 배경에는 기업들의 노동시간 부실 관리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근로기준법은 사용자에게 노동시간을 기록할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사무직 근로시간 실태와 포괄임금제 개선 방안’(2016)을 보면, 100명 이상 사업장 206곳을 설문조사한 결과 월 초과근로시간이 13.1시간으로 나타났다. 이 회사들 가운데 61.2%만 출퇴근 시간을 관리했다. 대부분(41.3%)이 한 달에 고정적으로 연장근로하는 시간을 설정한 뒤 그 시간만큼 임금을 지급하는 포괄임금제를 적용해, 노동시간을 관리할 필요가 없었다. 일부 회사는 “나중에 노동자들이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낼까봐” 관리하지 않는다고 응답하는 기업도 있었다.

노동시간 기록하기 시작한 기업들

이번 법 시행 이후 기업들은 노동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별도 시스템을 도입해,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노동자 스스로 입력하게 한다. 또 노동시간이 지나면 컴퓨터를 꺼 일을 못하게 하는 기업도 많았다. 왜 그럴까?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부터 연장근로 한도를 위반하면 사용자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지만, 실제로 처벌, 즉 2년 이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은 사례는 드물다. 공단에 밀집한 중소·영세 제조업 사업장들의 상당수가 12시간 주·야간 2교대 사업장이다. 주 5 일만 일해도 60시간에다 특근 하루를 더하면 72시간이 된다. IT나 게임업체에서 일이 많을 땐 주 100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숱했지만, 이를 적발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고용부는 ‘구로의 등대’라고 불리며 장시간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게임업체 넷마블에 대한 근로감독을 진행해 연장근로 한도위반을 처음으로 적발했다. 고용부가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사용하던 ‘디지털증거분석시스템’을 뒤늦게 도입하면서, 수백명 노동자의 회사출입카드나 야근 식대·택시비 지급내역 등을 바탕으로 근무시간을 계산해냈다. 이때부터 기업들 사이에서 ‘털면 나오겠구나’하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 법 개정으로 연장·휴일근로의 범위도 명확해진 까닭에, 예전처럼 노동시간을 관리하지 않았다가는 연장근로 한도위반은 물론이고, 수당까지 물어줄 수 있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노동시간을 ‘기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주 52시간 시행의 ‘대안’으로 유연근로제를 도입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실 유연근로제는 말 그대로 하루·주 근무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한다 뿐, 절대적인 노동시간 ‘단축’과는 관련이 없다. 유연근로제 역시 2018년에 법 규정이 생긴 것이 아니라, 1997년 법 개정을 통해 생겼다. 이 가운데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경우 육아나 자기계발을 원하는 노동자들에게는 필요도가 높은 제도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기준 10명 이상의 상용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11만6천개 기업체 가운데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적용한 곳은 4.4%에 불과했다.(기업체 노동력조사 시범조사) 그런데 기업들이 앞다퉈 도입하는 이유는 통상적인 근무시간(9시~6시)이 아닌 시간에 발생하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다. 유연근로제 도입이 없다면 연장근로 한도위반에 걸릴 수 있고 수당도 줘야 하지만 유연근로제를 도입하면 이런 고민이 사라진다. 다니는 회사에서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해, 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하게 된 40대 직장맘 ㄷ씨는 딸을 아침엔 남편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엔 자신이 직접 데리고 올 수 있게 됐다. ㄷ씨는 “사실 나 같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제도가 이런 제도였는데 그동안 회사가 아무 말 않다가 노동시간 단축됐다고 도입해 약이 올랐다”며 “몇 년만 일찍 했다면 아이 볼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시간의 엄격한 관리는 어디까지가 노동시간인지에 대한 문제로 연결된다. 선배들에게 ‘주입식’으로 배워왔던 기자의 ‘덕목’은 ‘앉으면 기사작성, 일어서면 취재, 누우면 기획 생각’이었다. 언젠가부터, 특히 아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퇴근 시간 이후에 업무에 관한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고(또는 못하고) 있지만, 노동시간의 범위가 가장 모호한 직업이 바로 기자가 아닌가 싶다. 내 출입처인 IT 회사에 다니는 친구나 지인을 만나서 식사하고 술을 마시면 이는 업무시간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이다. 나는 IT기업에 다니는 후배와 점심을, 선배와 저녁을 먹었다. 당장 기사를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더 알아보고 공부할 수준의 아이템은 몇 개 건졌다. 이 시간이 노동시간에 포함된다면, 나는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해, 술자리를 마친 밤 10시까지 15시간을 일한 게 된다. 밤에 열리는 경기 때문에 평창올림픽 현장을 떠돌며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던 후배 기자 역시도 노동시간의 범위가 애매하다. 어떤 회사 홍보팀은 기자와의 저녁 식사 자리를 노동시간에 포함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회사도 있었다.

법치주의가 일터로 옮아가는 과정

고용부가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이라는 다소 황당한 엄살이 업계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도 했지만,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보는 대법원 판례의 원칙에 따라 노사합의로 정하면 될 일이다. 동시에, 의미 없이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이는 것 역시 필요하다. 기업들은 이미 움직이는 추세다. 한때 ‘창의적 사고’를 이유로 “노는 것도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업들은 다시 “노는 것은 노는 것”으로 그 구분을 명확히 하는 추세다. 개인용무를 볼 것이라면 ‘시간 단위 연차를 쓰라’는 기업들도 나타나고, 선택적 근로시간제 도입과 함께 아예 반차를 없앤 회사도 눈에 띈다. 어떤 회사는 업무용 컴퓨터가 30분 이상 동작하지 않을 경우, 개인용무로 자리를 비웠는지, 회의를 다녀온 것인지 묻고, 만약 개인용무로 비웠다면 근무시간에서 제외하도록 한다. 이 회사에 다니는 ㄹ씨는 “원래 11시30분이면 밥 먹으러 일어났는데, 이제는 11시50분이 돼야 일어난다”고 했다.

경위야 어떻게 됐든, 기업의 의도가 어찌 됐든 이번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은 우리 사회가 그토록 강조해왔던 ‘법치주의’가 일터로 옮아가는 과정이 되는 것으로 보이고, 또 그래야 한다. 지난해 고용부의 ‘빡센’ 근로감독으로 예방주사를 세게 맞고,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과 무관하게 주52 시간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시행하고 있는 넷마블은 지난해부터 올 1분기까지 신작 게임을 출시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이 회사 관계자는 “정상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최근에서야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한 독일의 한 학자가 “최저임금 도입으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해, 저임금이 아닌 서비스의 질로 승부가 가능해졌다는 결론을 얻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제공했던 기업은 문을 닫고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하던 기업은 오히려 번창하게 됐다”고 말한 것과 겹쳐 들렸다. 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공정한 경쟁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대기업의 경우는 개정 근로기준법을 원만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지만, 50인 이상 사업장에 시행되는 2020년 1월1일, 5인 이상 사업장에 시행되는 2021년 7월1일까지 모든 중소기업이 주 52시간 상한을 지킬 수 있을지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중요한 것 역시 ‘공정한 경쟁’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결과를 보면, 기업인사담당자들이 꼽는 연장근로가 발생하는 사유 중에 1위는 일시적으로 주문량·수요가 늘어나서(39.3%)였고, 업무 특성상 연장근로가 많아서(20.9%), 노동자 숫자에 비해 업무량이 많아서(17.5%), 공급업체나 고객사 등 관계사의 사정으로(13.1%)였다. 올바른 주문량·수요 예측과 공급업체·고객사 등의 사정이 없다면, 연장근로가 발생하는 사유 절반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일은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는 대·중소기업 원하청 관계에서 더욱 흔하다. ‘을’ 노동자의 연장근로를 매우 당연시 여기는 사고 말이다. 휴대전화 부품을 납품하는 2~3차 벤더의 경우, 신제품 출시 등 물량이 쏟아질 때는 낮밤 가릴 것 없이 일하다가, 물량이 떨어지면 강제로 연차를 내고 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스템통합(SI) 업체에서도 2~3차로 하도급을 주면서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납기 때문에 야근을 하는 경우도 많다 한다. IT업계에서는 이미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는 프리랜서 개발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대기업의 노동시간 단축으로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길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지난 2년 노동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기사는 장시간 노동과 포괄임금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였다. 그만큼 장시간 노동은 우리 모두의 분노를 자아냈던 문제였다. 또, 2년 동안 가장 크게 영감을 받았던 문장은 “노동시간 단축은 기업의 시간을 시민의 시간으로 되돌려 주는 것”(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었다. <한겨레>의 박태우 기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이자 아들, 또 서울시 ○○구의 주민으로서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것이 바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것이다.

워크홀릭이 미덕 아닌 세상 되기를

매일 아침마다 “오늘 주말이야 아니야”를 묻는 딸에게 주말만이 아니라 주중에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길을 우리 사회가 또는 회사가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날이 갈수록 작아지는 바지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 준다면 더욱 좋겠다. 그 누구에게나 “그렇게 일하다 죽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 ‘워크홀릭’(일중독)이 미덕이 아닌 세상이 되기를 우리 모두 기도해보자

박태우 <한겨레> 경제부 산업팀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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