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을의 미투, 재벌을 겨냥하다

나도 갑질을 당했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미투가 갖는 의미 네 가지
등록 2018-05-02 20:07 수정 2020-05-02 19:28
조양호 대항한공 회장(오른쪽부터)과 조현아 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 조현민 전대한항공 전무가 2014년 8월20일 인천 중구 운서동의 그랜드하얏트인천호텔 개관식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조양호 대항한공 회장(오른쪽부터)과 조현아 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 조현민 전대한항공 전무가 2014년 8월20일 인천 중구 운서동의 그랜드하얏트인천호텔 개관식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조양호 회장 일가의 대한항공 3대 지배 체제는 이미 무너졌다. 가장 강력한 힘은 분노한 직원들에게서 분출하고 있다. 일반 주주들도 기업 가치를 해친 부정한 대리인 쫓아내기 행동에 나서고, 공권력은 세습 비리를 처벌하기 위해 총출동했다. 고객들의 대한항공 보이콧 움직임도 감지된다. 시민들은 대한항공 이름에서 ‘대한’을 떼라고 청원하기에 나섰다. 오랜 재벌 체제에 물든 조씨 일가와 주변 사람들만 근본적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세습경영 체제 청산이라는 사회적 강제 절차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한때 “기업은 일류, 정치는 삼류”란 말이 유행했다. 지금은 어떤가. 시민이 일류이고 기업(재벌)은 삼류로 전락했다. 새로운 유전자(DNA)로 무장한 젊은 시민(직원)이 등장했지만, 기업은 그들의 욕구와 인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조씨 일가 갑질 비리 사건을 특정 재벌의 일탈 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근시안적 시각이다. 기업을 개인 소유물로 여기고, 직원을 머슴으로 부리는,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에 대한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부정이 사회적 행동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직원과 주주, 고객으로 통칭되는 이해관계자들이 스스로 뒤집어진 질서를 바로잡는 암묵적 공동 행동에 나섰다. 사건의 의미와 이후 파장을 몇 가지 짚어본다.

삼류 기업의 일류 직원들
이정미 정의당 대표(맨 왼쪽)와 ‘땅콩 회항’ 피해자인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두 번째) 등이 4월25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황제경영’과 ‘갑질경영’을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이정미 정의당 대표(맨 왼쪽)와 ‘땅콩 회항’ 피해자인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두 번째) 등이 4월25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황제경영’과 ‘갑질경영’을 규탄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먼저, 가장 놀라운 움직임은 직원들 쪽에서 나왔다. 순응적이라는 대한항공 직원들이 ‘조양호 일가 아웃’을 외치는 ‘직장 미투’에 단체로 나섰다. 4월18일 대한항공의 한 직원이 카카오톡에 개설한 ‘대한항공 갑질·불법·비리 제보방’에는 27일까지 불과 열흘 사이에 1800명이 참여했다. 대한항공 전체 직원의 10%에 이르는 수로 엄청난 결집이다. 그동안 폭언·폭행·음주 난동을 비롯한 재벌 2, 3세의 갑질 전횡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당사자가 잠시 감옥 갔다가 여론이 잠잠해지면 제자리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돈의 위력이었다. 그때마다 직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한항공의 한 과장급 직원은 이번만큼은 다르다고 한다. “평소 고객이 민원창에 불만을 제기하면 조양호 회장이 직접 직원 징계를 지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해당 직원은 항변할 기회도 없이 벌을 받아야 했다. 고객 만족만 앞세우지, 정당한 직원 권리가 설 땅이 없었다. 이런 일이 쌓이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임계치에 이르렀고, 이번 사건으로 폭발한 것이다.”

객실 쪽 다른 직원은 “감동적이다. 대한항공 사람들이 이렇게 다 함께 나서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한 일반직 직원은 제보방에서 “무엇보다 부끄럽지 않게 내 회사다 생각하고 일하고 싶다. 지금은 남의 회사 돈 버는 데 이용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제보방 참여자들은 “조 회장 일가의 영구 퇴진”이라는 목표를 공유했으며, “새로운 변화가, (대한항공을) 사람이 먼저인 기업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퍼져나갔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5월4일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다. 재벌기업 직원들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총수 물러나라”고 집단시위에 나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제보방 관리자는 “단톡방을 열면서 회사 쪽 인사 보복 걱정 없이 내부고발을 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회사 쪽이 거꾸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아무 반격도 못하고 있다”고 참여자들한테 전했다.

그전 같으면 주동자 색출 등 직원 단속에 나섰을 임원들도 뒷짐만 지고 있다. 조 회장이 패닉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임원들도 거들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 상무급 임원은 “지금 회장한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임원이 없다. 야단맞는 데 익숙해 이럴 때 감히 말을 꺼낼 엄두를 못 낸다”고 했다. 그는 또 “조 회장은 직원들을 평소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강하게 굴려야 돌아가는 도구로 여겼다”며 “조 회장 일가가 고립 상태를 자초한 셈”이라고 말했다.

재벌 갑질은 전염된다

둘째, 총수가 감옥 가면 기업이 어려워지고 나라 경제가 위태롭다는,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오랜 등식이 확실히 무너졌다. 재벌 총수의 못된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자유한국당,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경제신문들이 반복했던 레퍼토리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극명한 변화의 움직임은 주주 사이에서 나타난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이 터진 뒤 열흘 사이 대한항공 주가가 7~8% 떨어졌다. 소액주주운동을 하는 제이앤파트너스는 이사 해임을 위한 주총 소집과 소송 제기에 나서겠다 선언했다. 재벌의 후원 세력인 전경련은 힘을 못 쓴 지 오래다. 지난해 이후 사실상 휴업 상태다.

대한항공의 기업 가치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경제적 요인이 조 회장 일가의 지배 체제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회사 재산을 제 것처럼 함부로 가지고, 회사 비행기와 직원을 이용해 고가품을 밀수하고, 자식들의 개인 회사로 일감을 몰아주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회사 재산 빼돌리기 수법이 직원들의 입으로 폭로되고 있다.

대한항공 직원 사이에도 우리사주조합 등을 통한 의결권 행사에 나서자는 움직임이 있다. 제보방의 직원들 목소리는 “조씨 일가 완전 퇴진 뒤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이란 한 방향으로 뚜렷하게 모인다. 성공 사례라 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는 1994년 유나이티드항공 조종사·정비사 노조에서 53% 지분을 인수해 노동자기업으로 전환한 경우가 있다.

셋째, 조씨 일가의 갑질 비리 사건은 재벌 세습 체제 단절을 촉발하는 기폭제 구실을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최근에도 한화그룹 3세인 김동선의 로펌 변호사 폭행, 운전기사에게 폭언한 종근당 이장한 회장, 삼환기업 2세의 임원 폭행 등 재벌과 중견기업 2, 3세들의 인격장애성 갑질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재벌의 세습 체제는 이미 중견기업에까지 도미노식으로 번져 있다. 한 중견기업 직원은 “직원 인격을 무시하는 갑질 비리는 재벌보다 우리 같은 중견기업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내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강하고 외부 사회적 감시도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재벌들 행태를 따라 2세들한테 불법 상속을 자행하는 하림 같은 중견기업들의 낯 뜨거운 행태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광화문 촛불집회는 단발성 집회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재벌기업 직원들이 나서서, 재벌세습체제 해체와 전근대적 직장문화 극복의 물꼬를 튼 일대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이런 움직임은 다른 재벌기업으로도 확산되는 메아리를 낳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를 담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제보방의 한 직원은 “우리의 촛불집회가 정경유착과 같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기업 투명성을 높이면서 경영과 소유 분리의 선례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시대의 획을 긋는 집회로 거듭나서 모든 시민이 다 함께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년차 직원은 “우리들 마음속의 촛불은 이미 불을 밝혔다. 훗날 대한항공이 대한민국의 재벌 체제를 무너뜨렸다고 기록됐으면 좋겠다. 우리 동료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에도 불똥 튈까

직원의 권리에 둔감한 우리 기업문화 전반을 향한 반성 요구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직원을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과 법 위에 군림하는 세습 체제와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재벌 기업의 임원은 “우리는 까라면 까야 되는 줄 알고 살아온 세대다. 그런데 젊은 직원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와는 DNA가 다르다. 그들은 회사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쉽게 떠나버린다. 이번처럼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서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 기업들은 소비자 권리를 앞세우면서 직원의 권리에 무감각했다. 다들 비슷했다. 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직원의 권리를 존중하는 기업문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직장과 행복한 사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갑질 비리 근절을 요구하는 사회적 행동의 조직화는 예민한 여러 재벌 개혁 이슈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 관계자는 “대한항공 갑질 비리 사건이 엉뚱하게 우리한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이 어떻게 개정되느냐에 따라, 삼성생명이 갖고 있는 25조원 규모 삼성전자 지분 매각의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큰 그림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다.

넷째, 세습 체제 단절 요구는 건강한 기업문화 체질을 만들라는 요구로 이어질 것이다. 조씨 일가가 직접 보유한 대한항공 주식의 지분율은 미미하다. 조 회장 일가는 지주회사인 한진칼 지분 보유(28%대)를 통해 대한항공 경영을 지배한다. 한진칼이 대한항공 지분을 30% 가까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칼을 통한 조 회장 일가의 지분을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3600억원대로, 총시가총액 3조2천억억의 11% 가량에 불과하다. 2대주주인 국민연금(11.67%)과 일반 주주들의 외면을 받으면, 언제라도 경영권을 박탈당할 수 있는 지분 구성이다. 그런데도 조씨 일가는 대한항공을 가족기업으로 삼아 군림해왔다. 이제는 과반이 훨씬 넘는 주식을 지닌 수많은 주주들이 합당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게 고장나 있다면,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더 나은 법제도로 정착시켜야 한다. 궁극적으로 기업은 주주 이외에 직원, 소비자, 관계사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공존으로 굴러간다는 인식을 이번 기회에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 직원의 권리, 소비자의 권리, 관계사의 권리를 주주(대주주와 일반 주주)·경영자의 권리와 함께 수평적으로 존중하는 사회로 진화해야 한다.

재벌 세습 끊어낼 묘수

미국은 대주주 독점과 세습 등의 폐해를 막는 방책으로 독점 재벌의 분할을 강제하는 강력한 반독점법을 시행했다. 비리 경영자를 장기 구금하는 엄한 기업법도 있다. 독일은 1972년부터 직원이 2천 명 이상인 대기업에서는 노동자 대표가 감독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해, 기업의 주요 정보에 대해 노동자와 경영자가 원활하게 소통하는 노사 공동 결정제도를 운용한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