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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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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짐 진 고용부, 피 끓는 피해자

구제 권한 있는 고용부, 고용평등과 폐지 뒤 ‘2차 피해’ 구제 완전히 손떼…

정부 외면에 성폭력 사실 숨기는 피해자들
등록 2018-04-17 12:56 수정 2020-05-02 19:28
지난 3월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가 ‘#ME TOO, 우리는 고용노동부에 할 말 있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고용노동부가 면피성 대책, 홍보용 정책 발표에 그치지 않고, 민간부문에서 발생하는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실태를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지난 3월1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가 ‘#ME TOO, 우리는 고용노동부에 할 말 있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고용노동부가 면피성 대책, 홍보용 정책 발표에 그치지 않고, 민간부문에서 발생하는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실태를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지역 군청 소속의 공무원 ㄱ씨는 2015년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중 상사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1년 뒤 법원은 그를 성추행한 상사에게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현재 ㄱ씨는 퇴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2014~2016년 상담 통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피해자 가운데 해고되거나 퇴사하지 않고 회사에 다니는 경우는 28%에 불과했다.

직장에서 살아남은 ㄱ씨는 성공 사례일까? 그렇지 않다. 지난 3년 동안 ㄱ씨에 대한 조직 내 평판은 말할 수 없이 훼손됐고, 반복된 인사 불이익으로 건강도 나빠졌다. ㄱ씨의 친구마저 인터뷰에서 “왜 ㄱ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나도 모르게 내 친구한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가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고 토로했다. 성폭력 피해 신고 뒤 만신창이가 된 ㄱ씨의 현재는 ‘살아남은’ 28%가 겪는 현실의 가혹함을 짐작하게 한다.

피해 신고 땐 ‘이상한 사람’ 낙인

ㄱ씨가 처음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은 성추행 피해 이후 낸 휴직이 종료돼 복직을 앞둔 상태에서 인접한 지방자치단체로 전출 신청을 냈을 때였다. 인사 담당자는 “성폭력 피해 등의 이유로 전출을 시켜주면 전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악용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ㄱ씨가 전출을 희망했던 지자체의 인사 담당자도 “평판 조회 때 안 좋은 소리가 많이 나와서, 전출을 진행할 수 없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고육지책으로 자매결연을 맺은 외국 지자체로 파견을 가려고 지원한 일 역시 뾰족한 이유 없이 무산됐다. 그 뒤에 새로 발령난 면사무소에서 가해자와 친분이 있는 직원들의 은밀한 왕따를 견뎌야 했다. 남자 직원 두 명이서 하는 펼침막 제거 등의 업무를 혼자 떠맡아 하느라 인대가 파열돼 수술까지 했다. 자기에게만 집중되는 이상한 ‘불운과 불행’의 다른 이름은 ‘2차 피해’라고 ㄱ씨는 생각한다.

“힘들다고 사표 쓰고 나가버리면 ‘재판 이기면 뭐 하냐’ ‘똑똑한 척하더니 별수 없더라’ ‘조직에서 왕따 되고 매장되면 인생 끝나는 거다’라고 비웃음받을 수 있잖아요. 저 이후에 나쁜 일을 겪는 후배들이 문제제기조차 못하고 힘들어질까봐 견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섣불리 공론화하려는 피해자는 말리고 싶어요. 함부로 나서면 안 됩니다. 제 꼴 납니다.” ㄱ씨는 다른 #미투 피해자들처럼 에 실명을 공개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으나, 끝내 익명을 선택했다. 4월3일 지방의 한 기차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지금 당하는 일 정도는 버틸 수 있지만 또다시 싸울 힘은 없다”고 말했다.

ㄱ씨의 사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이 전국미투생존자연대와 함께 단체 회원들을 조사한 결과, 16명의 직장 내 성범죄 피해자 가운데 12명이 피해 사실을 공론화한 뒤 2차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2차 피해의 유형으로 명예훼손(12명)이 가장 많았고, 가해자 편에서 회사가 합의를 종용한 일(9명)과 부당해고(6명)도 적지 않았다. 인격 훼손(11명), 행실 비방(9명), 업무 능력 훼손(6명) 등 방식도 다양했다.

“행실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거나 부모에게 교육을 잘못 받았다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가해자들의 행태를 보면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꽃뱀 운운하고, 합의를 안 해서 바보 같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더 힘들었다.”

“회사에서 넘어져 전신 타박상을 입었는데, 자작극을 벌인 직원이라고 소문을 내며 고충위에 회부시켜 징계를 받게 하려는 회사 관계자들을 보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때문에 직장이 시끄러워졌다. 너만 조용하면 되는 일’이라며 합의를 종용하고, ‘직장을 관두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거나, 나 없는 자리에서 내 욕을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이 회사에 꼭 있어야 하나, 버텨야 하는 걸까 우울감을 심하게 느꼈다.”

2차 피해 방치해온 고용노동부
지난해 11월10일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성단체들이 ‘여성에겐 모든 기업이 한샘이다’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10일 한국여성노동자회 등 여성단체들이 ‘여성에겐 모든 기업이 한샘이다’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ㄱ씨와 다른 피해자들은 왜 2차 가해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까. 직장 내 성폭력 2차 피해를 구제하는 시스템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당장 공무원(양성평등기본법)과 민간기업 노동자(남녀고용평등법)에 적용되는 성희롱 관련 법이 다르다. 양성평등기본법은 2차 피해(성희롱에 관한 국가기관 등의 고충처리 또는 구제과정 등에서 피해자의 학습권·근로권 등에 대한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한 사실)가 있을 때 여성가족부 장관이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통해 징계를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벌칙 조항이 없어 유명무실하다. ㄱ씨는 “인사 불이익이 있을 때 여가부에 문의했지만 인사권에 개입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고 말했다.

벌칙 조항이 없는 양성평등기본법에 반해 민간기업 노동자를 규율하는 남녀고용평등법은 2차 피해(“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해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에 대해 사업주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강수연 공인노무사(재원인사노무컨설팅)는 “남녀고용평등법 소관 부처인 고용노동부 지방관서 근로감독관이 불이익 조치에 대한 수사 권한을 갖는다. 민간기업의 성희롱 2차 피해와 관련해 현행법이 부여한 구제 권한은 고용노동부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에 2차 피해를 호소해도 실제 형사처벌이 이뤄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 지난 2월 유엔 차별철폐위원회의 한국 심의 때 한 위원은 “2012~2016년 한국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2109건의 성희롱 사건 가운데 9건(0.4%)만 기소로 이어졌다”고 지적( 2018년 3월1일치, 유엔서 혼쭐난 한국 여성정책… “여성권리 낙후돼 있다”)했다. 고용노동부를 거쳐 재판에서 2차 피해 여부를 다퉈볼 자격을 얻은 사건이 5년 동안 9건, 연평균 2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이 문제를 사실상 방치하는 동안 여성 노동자들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숨겨왔다. 여성가족부의 2012년 공공기관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이의 90% 이상이 성희롱 사건을 ‘그냥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업무 및 인사고과상 불이익에 대한 우려’(29.0%), ‘소문·평판에 대한 두려움’(17.4%) 등 2차 피해가 침묵의 이유였다. 이런 상황은 해를 거듭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성희롱 2차 피해 실태 및 구제강화를 위한 연구’를 보면, 설문조사에 응한 노동자 450명 가운데 40.2%(181명)가 2차 피해 우려 때문에 성희롱 피해에 문제제기를 포기하겠다고 답했다. 우려하는 2차 피해 유형도 유사했다. 절반 넘는 응답자(51.9%·94명)가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것’이 우려된다고 답했으며, ‘고용상의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한 응답자(35.9%·65명)도 많았다.

“MB 때 없앤 고용평등과 부활시켜야”

미국 연방대법원은 보복 행위가 합법적인 신고 행위 자체를 막는 폐단에 대해 “차별 행위를 신고하는 것은 제9장(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1972년 미국 개정 교육법의 부분) 관련 법 집행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신고자에 대한 보복 행위가 처벌되지 않는다면 신고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보복 행위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제9장 관련 법집행 체계는 확실히 파탄 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이경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국가인권위 성희롱 2차 피해 실태 및 구제강화를 위한 연구’).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고용노동부의 실종이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을 통해서도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영희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사무국장(공인노무사)은 지난 4월10일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동 주최로 열린 ‘미투를 넘어 안전하고 평등한 일자리로’ 토론회에 참석해 고용노동부의 직무유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일터 성폭력의 2차 피해 대부분은 고용노동부가 사업장 전반의 노동·인사 문제에 근로감독을 통해 지도해야 한다. 이런 문제마저 고용노동부는 경찰 업무로 처리하도록 관련 대책을 발표했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의 주무 부처가 어디인지 고용노동부는 물론 정부 전체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정부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 보도자료를 보면, “상담 과정에서 피해자 해고, 불이익 처분 등 2차 피해 확인시 해바라기센터와 연계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다고 나와 있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 해야 하는 일을 경찰에 떠넘긴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전국 47개 지방관서(지방노동청)에 성희롱 사건을 전담하는 근로감독관을 2명 이상씩 두도록 하는 지침을 시행했지만, 임시방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영희 사무국장은 “애초 지방노동청에는 근로개선과, 노사협력과, 산업안전과, 고용평등과 등 4개 과가 있고 고용평등과가 일터 내 성차별과 성희롱 문제를 다뤘다. 이명박 정부가 고용평등과를 폐지한 이후 고용노동부는 고용상 성차별·성희롱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놨다. 진정이나 고소 고발 사건 처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마저도 방기하고 있다. 고용평등과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전국 47개 지방노동청의 성희롱 신고 사건 접수 현황을 보면, 2017년 한 해 성희롱 관련 신고 건수가 10건 미만인 곳이 20곳이나 됐다. 이 가운데 3곳(강릉, 영주, 익산)은 성희롱 신고 건수가 단 한 건도 없었다. 고용평등과 부활과 관련된 제안에 대해 고용노동부 여성고용정책과 관계자는 “우리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조직 개편 문제인데, 직제 신설을 검토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근로감독관의 황당 발언

남정숙 전국미투생존자연대 대표는 최근 서울의 한 노동청을 방문해 2차 피해 관련 진정서를 제출하다가 겪은 황당한 경험을 들려줬다. “단체 회원하고 같이 서울의 한 지방청에 진정서를 내러 갔는데 근로감독관이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니니까 성추행당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아직 사회가 변한 것을 체감할 수 없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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