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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비들의 반란?

홍준표 무죄 뒤에는 전원합의체 아닌 소부 처리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불안정 등 원인… 해법은 대법관 구성 다양화
등록 2018-01-04 01:38 수정 2020-05-03 04:28
<font color="#008ABD">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부가 심상찮다. 2017년 말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적폐’인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 사범들에게 무더기로 면죄부를 줬다. 앞서 서울지법 형사수석부장은 이명박 정부 ‘군 댓글 공작’의 주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구속적부심에서 풀어줘 검찰의 ‘적폐 수사’에 딴지를 걸었다. 사법부의 대표적 적폐인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재조사도 일부 법관들의 반발로 지지부진하다. ‘법비’(법률을 절대시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리나 법률가)를 앞세운 적폐 세력의 반격이 시작된 것일까. 법비의 반란을 제압하지 못하면 문재인 정부의 사법개혁도 미완으로 끝나고 만다. _편집자</font>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 안팎의 보수 세력의 반발을 극복하고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김 대법원장이 2017년 9월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원 안팎의 보수 세력의 반발을 극복하고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김 대법원장이 2017년 9월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법비’(法匪)는 100여 년 전 일제 침략을 받던 중국에서 온갖 악법으로 중국 민중을 수탈한 일본 관료와 그 부역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 민중은 무력을 행사하는 일제 군경보다 악법을 통해 ‘합법적’으로 자신들을 수탈하는 부역자를 더 증오했다고 한다. 지식인으로 존경했던 법률 전문가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에 대한 배신감이 컸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법 독재로 촛불 끝나는가” </font></font>

한 세기 전 중국에서 쓰인 ‘법비’라는 말이 난데없이 21세기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것도 ‘촛불혁명’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와 삼권을 분립한 사법부를 비난하는 데 쓰이고 있다. 사법개혁의 적임자로 꼽혀온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부가 왜 이런 원색적인 비난을 받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2017년 12월22일 대법원이 박근혜 정권의 대표적 권력형 비리 사건 당사자들에게 무더기로 면죄부를 준 판결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이날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대법원은 또 친구인 김정주 넥슨 창업주에게서 넥슨 ‘공짜 주식’을 받은 진경준 전 검사장의 뇌물수수 혐의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두 사건은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서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정치권력과 검찰 등 공권력의 비호를 받으려는 기업인과, 기업인을 든든한 스폰서로 활용하려는 권력자의 끈끈한 공생관계는 사회적 약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증폭했다. 이들의 ‘비리 커넥션’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으면 한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 가치인 정의를 훼손하고 시민들의 준법 의지를 약화해 사회 통합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는 금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요구로 확산됐고, 2016년 겨울 ‘촛불혁명’에서 정치개혁, 재벌개혁, 사법개혁 등의 구호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잇따른 판결은 이런 사회 공감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촛불혁명에 제동이라도 걸겠다는 듯 대법관들은 거침이 없었다. 촛불혁명에 참여한 시민의 처지에선 사법부가 ‘촛불 정신’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각계 지식인들이 판결 직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강한 톤으로 대법원 판결을 비난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대법원과 한국의 무서운 현실” “법비들의 사법 독재로 촛불이 끝나는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역사학자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도 “정권이 바뀌고 대법원장이 바뀌었지만, 대법관들은 바뀌지 않았다”며 판결을 주도한 대법관들을 정조준했다.

법조인들도 비난에 가세했다. 대법원 판결에 법조인들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진경준 판결에 대해 “사업가가 검사에게 ‘보험’을 들어도 된다는 취지냐”고 비판했고,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역시 “사법부 판단과 국민의 법 감정 사이의 간극이 멀고도 멀다”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일반 국민이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 달라 보인다”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부, 사건당 평균 심리 시간 1분여 </font></font>

이번 판결에서 박 교수가 지적한 ‘사법부 판단과 국민 법 감정 사이의 간극’은 무척 도드라진다. 먼저, 법원 내부에선 이번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 많다. ‘성완종 리스트’ 재판의 경우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인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는 게 맞다는 논리다. 진경준 전 검사장 사건에 대해선, 공짜 주식의 구체적인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뇌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리에 충실한 판단이기 때문에 판결 자체는 문제될 게 없고, (홍준표 대표 등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형사처벌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대법원 관계자)는 게 법원 내부의 대체적인 견해다.

그러나 법원 판단과 국민의 법 감정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크게 벌어진 것은 사회를 위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이 간극이 큰 사회에선 법을 지키려는 구성원들의 의지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사회가 구성원의 건강한 법 감정을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법 감정은 모든 권리의 심리적 원천에 해당한다. 따라서 법 감정이 약화되면 권리를 침해당해도 그것에 저항하려는 의지가 약해진다. 사회 구성원이 권리 침해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으면, 즉 권리 투쟁에 소극적이 되면, 불법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루돌프 폰 예링 ). 결국 법원의 판단이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사회에선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위험이 커진다.

문제가 된 판결들이 대법관 전원이 참석한 전원합의체(전합)가 아닌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처리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과 진경준 사건 모두 1·2심에서 유무죄 판단이 갈렸다. 이처럼 재판부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이 나오는 사건을 사건당 평균 심리 시간이 1분여에 불과한 소부에서 처리한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1년에 대법관 한 명이 평균 3천 건 넘는 사건을 처리한다. 소부 합의는 2주에 한 번꼴로 열려 소부의 심리 시간은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다. 주심이 30여 초간 사건 내용과 재판 결과를 설명한 뒤 다른 재판관들의 이견이 없으면 바로 합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식이다. 물론 중요한 사건은 합의에 10분 이상 걸리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에 반해 대법원 전합의 심리 시간은 상대적으로 길다. 대법관 전원이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사건 기록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이번 판결이 만약 전합에 회부됐다면 소수의견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도 있었다. 최고 법관들의 다양한 의견이 반영된 판결은 소부 판결에 비해 국민 법 감정과 간극이 작을 가능성이 크다.

대법원은 이런 비판에 대해서도 ‘원칙에 맞게 처리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전합에 회부되려면 기존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거나 소부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이 갈려야 하는데, 이번 판결들은 이 요건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튀지 않는’ 기존 법관 위주로?</font></font>

법조계에선 이번 ‘법비’ 논란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불안정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김 대법원장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사법부 적폐 청산’에 불만을 가진 보수 성향 법관들의 불만을 다독이려 애쓰고 있다. 이러다보니 진보 법조계가 요구하는 사법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사법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대한 진보 진영의 불만이 대법원 판결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표출됐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의 재조사다. 김 대법원장은 판사 블랙리스트가 저장됐을 것으로 의심되는 법원행정처 전 고위 간부들의 컴퓨터를 강제 개봉하는 문제를 놓고 법원 내부의 찬반 견해가 맞서자 한 달 가까이 결정을 미루다 12월26일 개봉을 허가했다.

이 과정에서 김 대법원장은 진보 법조계로부터 개혁 의지를 의심받았다. 일선 법관들이 적폐로 지목한 ‘법원행정처의 권한 축소’를 실행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12월14일 성명에서 “지금 법원은 단지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의) 컴퓨터를 조사할 수 있느냐는 법리적 문제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김명수 대법원장의 법원이 과연 스스로 개혁을 추진할 의지와 동력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중대한 시험대 위에 섰다”며 블랙리스트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사법부가 법무부와 검찰과 달리 개혁을 추진하는 ‘사법개혁준비단’에 외부 인사를 포함하지 않는 것도 김 대법원장에 대한 의구심을 부추긴다. 김 대법원장은 취임 직후인 10월27일 일선 법관 대표회의에서 선발된 법관들로 구성된 사법개혁준비단을 출범했다. 이는 법무부와 검찰이 개혁기구에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언론 기고에서 “법원 개혁을 가장 바라는 것은 재판을 받는 국민이다. 국민의 참여 없이 개혁이 법원 중심으로 진행되면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개혁준비단은 개혁 의제를 확정하는 준비기구다. 의제가 확정되면 외부 인사가 참여한 개혁기구를 출범해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 대법원장에 대한 진보 법조계의 의구심이 가장 증폭되는 부분은 후임 대법관 인선 문제다. 2018년엔 총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무려 6명이 퇴임한다. 대법관의 절반을 새 인물로 채우는 사법권력 교체기다. 시민사회에선 오래전부터 2018년을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보수 일색이 된 대법원을 더 다양하게 구성하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왔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처음 제청권을 행사한 인물은 안철상, 민유숙 후보자였다. 이에 대해 진보 법조계는 ‘대법원 구성 다양화’를 하기엔 한참 못 미치는 아쉬운 인사라는 평가를 내놨다. 애초 유력 후보로 떠올랐던 진보 성향의 김선수 변호사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청을 받지 못한 것을 두고 “김 대법원장이 보수 성향의 고위 법관들을 지나치게 의식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돈다. 법원 조직의 안정을 앞세워 ‘튀지 않는’ 기존 법관 위주로 대법원을 구성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법원 안 개혁 지지 세력 20~30%”</font></font>

앞선 참여정부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이홍훈, 전수안, 박시환, 김영란, 김지형 등 5명의 진보 성향 법조인을 대법원에 입성시켰다. 이들은 탄탄한 법리로 다양한 소수의견을 만들어냈고, 몇몇 재판에선 중도 성향 대법관들을 견인해 전향적인 판례를 이끌어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은 전임 최종영 대법원장 때보다 더 많은 전합 판결(63건→95건)을 생산했고 다양한 소수의견(38건→81건)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수의견은 질적으로 이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까지는 민사소송에서 사소한 법리적 견해차에 따른 소수의견이 많았지만, 이 대법원장 시절에는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소수자 보호, 사상과 양심의 자유 등 헌법적 기본권을 둘러싼 것이 많았다.

고위 법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용훈 대법원장 때도 법원 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강했다. 법원 안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은 20~30%에 불과했다. 그래서 사법개혁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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