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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위에 다시 피어날 ‘공영방송의 꽃’

김재철 취임부터 김장겸 해임까지 MBC 기자의 ‘MBC 장악 2814일의 기록’…

“황폐화된 공영방송 다시 일으켜 세울 것”
등록 2017-11-21 17:10 수정 2020-05-03 04:28
11월13일 오후 방송문화진흥회 이완기 이사장이 김장겸 MBC 사장 해임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11월13일 오후 방송문화진흥회 이완기 이사장이 김장겸 MBC 사장 해임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MBC 장악’ 이명박-김재철 체제, 2814일 만에 무너지다.”

김장겸 사장 해임안 가결 직후 정철운 기자가 송고한 기사의 제목이다. MBC를 오래 취재한 기자답게 좋은 제목을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2814일이 시작되는 시점은 김재철이 취임한 2010년 3월2일이다. 그리고 종료 시점은 김장겸이 해임된 지난 11월13일이다. 문득 계산해보고 싶었다. 이 기간에 얼마나 파업했는가. 2010년 김재철 취임 직후 39일, 2012년 김재철의 퇴진을 요구하며 170일, 그리고 올해 김장겸 퇴진을 위해 72일 동안 파업했다. 모두 281일이다. 두 차례의 제작 거부 기간을 더하면 300일을 훌쩍 넘긴다. 그러고 보니 운명처럼 느껴진다. 김재철 이후 2814일. 그리고 그 기간 10분의 1 이상을 파업한 MBC의 노동자들. 이 글은 그 시절을 겪은 MBC의 기자이자 직원, 노동조합원으로서 적은 기록이다.

MBC 장악의 서막 ‘신경민 앵커 교체’

김재철이 등장하기 1년 전인 2009년 3월이었다. 나는 국회를 출입하던 6년차 평기자였다. 어느 날 저녁 회사에 들어와 있는데 전영배 보도국장이 잠깐 국장실로 들어와보라고 했다. 국장실에 불려갈 일이 없을 텐데 하면서 들어가보니 전 국장은 묻고 싶은 게 있다며 신경민 앵커 이야기를 꺼냈다. 신 앵커의 클로징 멘트가 어렵고 마음에 안 들어서 앵커를 교체하고 싶은데 젊은 기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면담에서 나는 ‘어떤 명분을 대셔도 앵커를 교체하는 것은 후배 기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후폭풍을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감은 좋지 않았고 이후 전 국장은 앵커 교체를 강행했다. 한번 물꼬가 트인 이명박 정권의 방송 장악 드라이브는 거침없었다. <pd>의 김보슬 프로듀서를 비롯해 ‘광우병’ 편을 연출했던 제작진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을 오랫동안 진행해온 손석희 교수가 하차했다. MBC의 관리·감독 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에는 김우룡 이사장을 비롯해 극우 성향의 뉴라이트 인사들이 대거 입성했다. 그들의 칼날은 엄기영 사장을 향했다. 엄 사장은 맞서기보다는 《PD수첩》 사과 방송을 강행하는 등 ‘로우키’(낮게, 조용히)로 대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방문진의 흔들기는 계속됐다. 결국 엄 사장은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사퇴했다. 방문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귀 잘 알아듣고 말 잘 듣는’ 김재철을 새 사장으로 선임했다. ‘2814일 체제’의 시작이었다.
그해 9월29일 새벽 3시30분, 나는 뉴스의 이면을 탐사 취재하는 시사보도 프로그램 175회에 방송될 기사를 송고했다. ‘다 듣고, 다 보고 있다’라는 제목의,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감청 의혹을 추적한 아이템이었다. 당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175회, 다름 아닌 에 허락된 마지막 방송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하필 프로그램의 문을 닫는 마지막 회가 나에게 돌아왔는가 생각하니 얄궂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이 프로그램은 막을 내렸다.
김재철의 경영진은 시종일관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낮다고 공격했다. 제작진으로서 이해할 수 없었다. 목요일 밤 11시, 상대 방송사 동시간대 프로그램은 다 예능이었다. 그래도 2010년 평균 시청률은 6%였다. 그해 MBC 수목 ‘미니시리즈’의 평균 시청률이 7%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보도 프로그램의 성적치곤 결코 낮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은 경쟁력 약화를 이유로 폐지를 밀어붙였고 우리는 연좌농성, 사장 면담(물론 거부당했다), 피케팅 시위 등으로 맞섰지만 끝내 막지 못했다. ‘우리가 다 같이 집단사표라도 써야 하지 않습니까!’ 침묵 속의 회의실에서 외치던 후배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능력’보다 ‘관운’ 앞세운 김재철

8개월여 만에 MBC 사장에서 물러난 김장겸 전 MBC 사장(왼쪽)과 MBC 장악의 선봉자로 꼽히는 김재철 전 사장. 한겨레 박종식 기자/ 한겨레 백소아 기자

8개월여 만에 MBC 사장에서 물러난 김장겸 전 MBC 사장(왼쪽)과 MBC 장악의 선봉자로 꼽히는 김재철 전 사장. 한겨레 박종식 기자/ 한겨레 백소아 기자


김재철은 일본 도쿄 특파원, 사회부장, 보도제작국장 등을 역임했고 지방사 사장을 두 차례 했다. 상당한 ‘관운’을 누린 인물이지만 기자로서 동료, 선후배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정권의 MBC 접수와 파괴 공작을 수행하는 데서는 특별한 재능과 감각을 발휘했다. 취임하자마자 지역사 사장과 간부들을 물갈이했으며, 파업을 이유로 이근행 노조위원장과 정대균 수석부위원장을 해고하며 처음으로 해직자의 ‘피’를 자신의 손에 묻혔다.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을 파헤친《PD수첩》을 한 차례 불방시켰으며, 《후플러스》와 《W》를 폐지했다. 해를 넘겨 2011년이 되어서도 진행자 김미화씨 강제 하차, 이른바 ‘소셜테이너’ 목록 작성, 《PD수첩》의 최승호 프로듀서 강제 하차, 한학수·이우환 프로듀서에 대한 부당전보 등 그의 거침없는 질주는 계속됐다. 이런 조처 가운데 상당수가 김재철의 취임 전 국정원에서 작성한 ‘MBC 정상화’ 문건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2011년 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를 취재하던 촬영기자가 시민들에게 욕을 먹고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2008년 입사한 3년차 촬영기자 이성재였다. 취재 현장에서 비슷한 경험이 쌓였던 이성재 기자는 당시 MBC 뉴스의 FTA 보도 누락과 축소에 대한 분노를 담은 글을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관련 의혹, 김문수 경기도 지사의 소방관 부당 전출 파문, 민간인 불법 사찰 등 핵심 이슈의 왜곡·축소 보도가 잇따르면서 기자들의 분노가 들끓던 시기였다. 이성재 기자의 글을 계기로 기자들의 기명 성명서가 잇따라 올라오며 저항이 본격화됐다. 노동조합은 2012년 1월30일부터 김재철의 퇴진을 요구하며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갔다.
그 싸움은 그해 한여름까지 170일간 이어졌다. 싸움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지 몰랐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그렇게 질지도 몰랐다. 지금도 나는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나 홍대입구역 9번 출구를 지날 때마다 어떤 아픔을 느낀다.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파업 지지 서명을 받던 곳이다. 그때 목청 높여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외치던, 그러나 허공 속으로 흩어져버린 듯했던 나와 우리들의 목소리, 땡볕 아래 등골을 적시던 땀방울, 피켓을 머리 위로 높이 든 채 몇 시간을 서 있던 후배의 모습…. 그렇게 좌절된 진정성의 조각들과 그것이 남긴 상처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재현되었다. 수백 차례의 집회와 농성, 기자회견, 거리 선전전, 영상물 제작 등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우리는 그 싸움에서 패배했다.
경영진은 학살하듯 복수극을 펼쳤다. 모든 것을 건 싸움에서 진 조합원들의 끝없는 유랑이 시작됐다. 이용마, 박성호, 정영하, 강지웅, 박성제, 최승호 등 6명이 해직됐다. 50명 넘는 조합원들이 정직 또는 대기발령의 징계를 받았다. 상당수가 ‘신천교육대’ 같은 곳에 격리돼 비인격적 교육을 받아야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정직을 당하고, 이후 신천교육대에 있으면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강사의 요가 동작을 따라 해야 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렇게 경영진의 (알 수 없는) 기준에 의해 ‘블랙리스트’로 분류된 수많은 동료들이 원래 부서에서 쫓겨나 듣도 보도 못한 부서로 추방됐다. 그야말로 끝을 알 수 없는 이산(흩어짐,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언젠가부터 나는 집에서 쓰레기를 처리하러 나갈 때마다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필요 없다고 버려지는 쓰레기가 꼭 나 자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석해보면 나와 추방된 동료들은 ‘포로’ ‘보복의 대상’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포로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본국으로 송환된다. 그러지 않으면 제네바협약 위반이 된다. 수형자도 확정된 형량을 채우면 사회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와 우리가 처한 디아스포라적 현실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나는 내가 ‘보복당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극우 편향적이고 왜곡된 경영진이 자신들의 방향으로 뉴스를 만들고 회사를 운영하는 데 필요 없다고 판단해 내버린 ‘잉여적’ 존재라는 것이다.

학살하듯 복수극 펼친 경영진
또 다른 편에는 ‘도구적’ 존재들이 있었다. 경영진이 도구로 활용하는 존재들이다. 저항하는 이들은 잉여로 분류해 내버리고, 그 결과 비게 된 자리에는 좀더 도구로 쓰기 좋은 존재들을 들여와 채운다는 것이 김재철부터 안광한, 김장겸까지 이어진 경영 방식이었다. 이 과정을 본 MBC 구성원 중 상당수는 ‘일단 순응하고 버티면서 살아보자’ 생각하며 도구로서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MBC에 ‘잉여와 도구의 시대’가 열렸다. 이명박 정권 시절 MBC가 ‘장악’과 ‘저항’이 충돌하는 공간이었다면, 박근혜 정권 시절 MBC는 ‘장악’의 완성 속에 ‘잉여 혹은 도구’가 떠다니는 공간이었다. 이 시절 MBC의 경영진은 유례없는 언론 자유를 누렸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권의 이해관계가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굳이 정권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고, 정권 역시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국정원 대선 개입 보도 참사, 세월호 보도 참사, 최순실 보도 참사 등 치욕스러운 MBC 뉴스의 역사는 그 결과였다.
촛불혁명 이후에도 한동안 MBC에서는 잉여와 도구의 시대가 계속됐다. 그동안 체화된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2017년 6월2일, 상암 MBC 사옥 한복판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김장겸은 물러나라, 김장겸은 물러나라, 김장겸은 물러나라!” 순간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이 또 같은 외침이 들렸다. 김민식 PD였다. 그 외침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분리돼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었고 공명을 일으켰다. 우리가 지금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선명해졌다.

촛불 민심이 가져다준 용서와 용기
그 공명이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촛불혁명을 일으킨 민심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셨다.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MBC에 세월호 가족들이 파업 집회 현장을 찾아 합창하고 조합원들을 격려해주셨다. 퇴사 이외엔 파업할 방법이 없었던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는 방법으로 큰 연대의 메시지를 주셨다. 결국 파업 72일 만에 김장겸은 해임됐고, 7년 이상 이어져온 이명박-김재철 체제는 끝이 났다. 힘겹게 그 체제를 지나온 우리 앞에 꽃길이 아닌 폐허가 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참혹하게 부식되고 황폐화된 공영방송이 있다.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임명현 MBC 기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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