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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당선, 미국 대중의 합리적 선택”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상) '트럼프 현상' 원인과 미국 정치 변화를 말하다
등록 2016-11-15 07:49 수정 2020-05-02 19:28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 민주주의 연구의 대가이며 이 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힌다. 은 최 교수를 만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물었다. ‘세계적 쇼크’로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에 대해서도 분석을 부탁했다.
안수찬 편집장과의 대면 인터뷰는 11월10일 오후 2시간여 동안 진행됐고, 이후 송채경화 기자가 전화통화와 전자우편으로 여러 차례 보강했다. 장문의 인터뷰를 3개 기사로 나눠 온라인에 먼저 싣는다. 더 자세한 인터뷰는 다음주에 발행될 1138호에 게재한다. _편집자
① 미국 대중의 합리적 선택
②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라
③ 박정희 패러다임을 폐기하라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서울 광화문 인근 어느 오피스텔에 마련한 작은 연구실에 매일 나간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 11월10일 오후 찾아간 연구실 책상에는 이날치 가 놓여 있었다. 교수 재임 시절에도 그는 국내외 주요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날 1면 머리에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기사가 실렸다. 몇 장을 넘기니 퇴진 압박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 기사가 꼭두각시를 풍자하는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워싱턴 기득 정치권에 대한 혐오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됐다. 어떻게 평가하나.

중요한 사건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큰 변화를 반영하는 정치 현상이다. 1930년대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한 사회보장 및 복지 확대, 경제 부흥, 그리고 1980년대 이래 ‘레이거노믹스’로 알려진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그 뒤를 이은 세계화의 가속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 여러 경제환경의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장기적 사이클의 경제 변화는 사회적 격변을 동반해왔다. 이번 트럼프 현상도 사회적·경제적 격변이 만들어낸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나는 본다.

불행하게도 트럼프의 당선으로 표현되는 정치적 대응이 시대적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격변에 대응하는 데 있어, 그 충격을 완화·치유하고, 경제를 건강하게 만드는 좋은 방향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20세기 전간기(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세계적 대공황과 경제 불황이 독일 나치 등장과 유럽 전역에서 극우정치 운동을 불러온 역사적 사례를 알고 있다. 이 점에서 트럼프의 등장은 불길하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영국 유럽연합 탈퇴와 함께 세계적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대사건이다.

트럼프의 당선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

기존 미국 정당 체제로는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민주·공화 중심 양당 정치체제가 제시하는 선거 공약, 정책 대안을 가지고 기존 지지자들의 요구나 불만을 해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워싱턴 이스태블리시먼트(establishment), 즉 기득 이익에 안주하는 정치권에 대한 반감과 불만은 지난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민주당, 공화당을 불문하고 워싱턴 중심 기득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증가했다. 이 점에선 민주당과 힐러리 클린턴 역시 트럼프의 등장에 일정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는 기존 공화당의 바깥에서 온 ‘아웃사이더’로 이런 기득 체제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선 트럼프는 (힐러리와 민주당 경선에서 경쟁한) 버니 샌더스와 공통점이 있다. 이념적·정치적 지향이나 정치적 배경에서 정반대에 있지만, 트럼프나 샌더스는 기존 정당 범위 밖에서 나타난 아웃사이더의 반란이었고, 그 배경에는 당료 중심 정당조직을 공격한 포퓰리스트들의 도전이 있었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 엘리트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미치광이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정도로 적극적·공격적으로 캠페인을 했다. 트럼프는 기존 양당 체제로 대변될 수 없는 요구를, 상궤를 벗어나 엄청난 과감함을 보여주면서 도전했다. 트럼프 당선은 그런 파격적 행태와 전략이 성공한 결과다.

보수와 진보적 요소 뒤엉켜 있어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11월 5일 지지자 집회에서 두 주먹을 쥐며 무대 위로 오르고 있다. AP 연합뉴스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11월 5일 지지자 집회에서 두 주먹을 쥐며 무대 위로 오르고 있다. AP 연합뉴스

트럼프 당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퇴행적이고, 파시스트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위험한 측면은 많다. 그렇지만 흥미 있는 것은, 트럼프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공약과 발언이다. 그 내용에는 진보적인 면과 보수적인 면이 동시에 혼합돼 있다.

정당의 엘리트들이 시대 변화와 사회경제적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할 때, 트럼프는 양당 체제를 통해 대표되지 못했던 문제를 포장하지 않고, 조야하거나 반동적 방식으로 드러내 보이고, 거침없이 문제를 제시했다. 그러다보니 상당히 현실에 가까운 말을 할 때도 적지 않았다. 극우적·보수적 요소와 진보적 요소가 혼재돼 막 뒤엉켜 있다.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 것으로 무엇이 있나.

큰 이슈가 두 개다. 신자유주의 중심 요소의 하나는 자유무역인데, 트럼프는 자유무역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변자 노릇을 했다. 그는 자유무역이 가져온 고용 축소, 전통적 제조업 산업의 몰락 등이 미국 경제를 약화시키고, (저학력 백인)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악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점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멕시코인 등 외국인의 불법 이민을 막겠다는 공약도 이런 현실 인식의 결과다. 힐러리의 선거 공약은 자유무역을 확대·증진하는 방향인데 트럼프는 그 반대였다.

또 다른 하나는, 그동안 미국이 ‘세계 경찰’ 노릇을 해왔던 것, 즉 세계 분쟁 등에서 패권 국가로 활동한 것에서 본국의 문제에 더 초점을 두는 방향을 이야기했다. 트럼프의 이런 입장을 두고 흔히 ‘고립주의’라고 하는데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원래 고립주의란 미국 제임스 몬로 대통령이 선포한 19세기 후반의 독트린인데, 지금 트럼프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고립주의라기보다 지금까지 온 세계에 확산된 미국의 분쟁 개입을 적절하게 조절·통제하고, 미국의 경제력이 뒷받침할 수 있는 범위에서 군사력을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즉, 미국 국력의 전략적 사용에 대해 선별적 조건을 내걸고 있다. 한국 등 혜택을 받는 나라들의 미군 방위 분담을 늘려야 한다는 발언도 그런 관점에서 나왔다.

오늘날 미국 경제의 기반이랄까 토대는 미국이 군사전략적으로 세계를 지배한 20세기 말 압도적 경제력에 못 미친다. 현재와 같이 약화된 미국의 경제력에 비춰보면, 군사전략 면에서 미국의 세계적 역할이 과도하게 확장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사이 중국이나 유럽연합의 경제 규모는 커졌다. 중국은 후진국에서 시작해 개발도상국, 이젠 경제 초강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미국의 경제력은 동아시아에서 이에 대응할 군사전략적 힘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트럼프는 미국의 군사전략적·외교적 구실이 국내 경제 상황에 부응하거나 거기에 합당한 것으로 제한돼야 한다고 믿는다.

트럼프와 비교한다면, 힐러리는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던 시기와 별 차이 없이 원래대로 세계의 패권 국가로서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힐러리는 전후 냉전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의 역할을 여전히 강조하는 연속선상에 있다. 트럼프는 미국 국내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에 걸맞은 방향으로 대외적 역할을 조절, 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 문제, 대선 큰 변수 아냐
지난 10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시민들이 성추행 혐의, 성차별적 발언 등으로 구설에 오른 대선 후보 트럼프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EPA

지난 10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시민들이 성추행 혐의, 성차별적 발언 등으로 구설에 오른 대선 후보 트럼프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EPA

힐러리가 여성 정치인으로서 ‘유리 천장’을 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여성 문제가 이번 대선 투표에 큰 변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투표 결과를 보면 분명 성별 차이가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여성 투표가 힐러리에 비해 낮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그것이 (당락에 끼친)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투표 캠페인 과정에서 중요 이슈이긴 했지만, 힐러리가 여성이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를 지지할 사람이 지지를 안 했다고 볼 수 없다는 거다.

힐러리의 문제는 성별 차이가 아니라 다른 것, 말하자면 힐러리가 미국의 가장 대표적 정치 엘리트, 워싱턴 이스태블리시먼트를 대표하는 데서 비롯됐다. 30년의 공직 생활을 거친 정치인이었지만 그의 투명함과 진정성, 또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과 부합하는 진보적 정체성,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등을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은 결과다.

트럼프는 성추행 또는 여성혐오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선됐다.

트럼프가 여성 비하라든가 노골적인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 여성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요소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 현상이 곧바로 힐러리 지지로 돌아갔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건 트럼프 자신의 문제다. 힐러리는 힐러리의 문제이고. 성문제가 변수가 되어 표가 이동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에 대한 비판도 많다.

그 비판은 당연하다. 트럼프에겐 인종주의적 성향이 상당히 많고, 인종주의적 의미를 갖는 언행을 굉장히 많이 했다. 트럼프의 인성·인품·인간관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구시대적이고 편협하고 인종주의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가치나 규범을 통한 판단의 결과와 다르다. 투표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선거 결과는 우리가 한 사회에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윤리적·규범적 기준과 상당한 괴리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다.

‘오바마 케어’ 폐기 공약 가장 우려트럼프 지지가 포퓰리즘에 기초해 있고, 게다가 그 개인의 예측 불가능한 특성이 더해진 탓에 미국 정치가 트럼프 체제에서 제대로 작동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말은 맞다. 그동안 민주·공화 양당이 교차 집권하면서도 세계에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도력은 거의 동일했다. 사람들은 여기에 익숙해 있다. 그런데 이제 대외 정책에서 미국 컨센서스는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트럼프는 그것과 전혀 다른 패턴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에게 포퓰리즘이 있다는 것도 맞다. 정당 또는 제도 밖의 힘이 정당을 여과하지 않고 곧바로 트럼프에 의해 대표되고 그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는 그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트럼프의 사회경제 정책이 과거로부터 굉장히 일탈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냐 하면, 그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의 정책은 진보·보수가 혼합된 내용을 갖기 때문에 정리되지 않고 일관성을 갖지 않는다. 한쪽으로는 고소득층을 위한 엄청난 폭의 감세, 법인세 인하 등 미국 최상층 부자들과 기업을 대변하는 정책이 있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오바마 케어’를 폐기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트럼프가 극우이고 반흑인 인종주의자라고 비판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두고 볼 일이다. 미국 국내총생산의 15%에 달하는 의료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개혁이 폐기된다면, 그리고 1600만 명에 이르는 수혜자가 의료보험을 잃어버리면 그를 파시스트로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트럼프의 정책 가운데 진보적 요소는 무엇이 있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신자유주의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백인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책이 있다. 또 거대한 적자재정을 통해서라도 미국에 절실히 필요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하겠다는 것도 긍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은 지리적으로 말할 때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불리는 옛 제조업 중심지다. 즉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미시간 등에서의 승리였다. 이 지역은 대체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쟁이 백중세를 보여 선거 때 승자가 갈리는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였다. 이 지역 두세 곳에서만 패했어도 트럼프의 당선은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전통적 공업지대인 이들 지역에선 산업이 몰락해 실업률이 높고, 고졸 출신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의 생활이 극히 곤궁하다. 트럼프는 이들 주에서 모두 이겼다. 이들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고용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보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트럼프 정부 아래서 이런 혼합적 정책이 어떤 형태로 구현될지 두고 볼 일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외부에서 등장한 사람이다. 미국 공화당의 정신적 지주는 로널드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신자유주의를 만들고 이것을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주도한 사람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레이거니즘을 인정하지 않고 정면 도전했다. 공화당의 중심적인 경제운영 원리로서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이고 이를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레이거니즘의 효능이나 파워가 상당히 변하거나 아주 축소되지 않을까 전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레이건의 공화당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공화당이 출현하는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본 민주주의의 긍정적 부분트럼프의 정책이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샌더스의 공약·이념·가치가 트럼프의 그것과 중복되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 오히려 힐러리는 (같은 정당 후보인) 샌더스의 공약을 마지막까지도 수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트럼프가 샌더스의 그 부분을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면 괜찮은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 특히 진보파는 이번 미국 대선 결과에 낙담하고 미국 대중이 어리석다고 비평했다. 트럼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전세계적이고, 미국 지식사회나 진보파 사이에서도 공통적이다. 트럼프 체제에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파시즘 체제라고도 말한다. 그런 비평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국 선거 결과를 ‘미국 대중의 합리적 선택’으로 볼 수 있을까.

난 그렇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항시적으로 같은 형태로 실천되는 게 아니라 도전과 위기를 겪게 마련이다. 민주주의제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생산체제가 작동하면서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기초 위에서 그것과 상호작용하고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다.


“이번 대선에서 오히려 미국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부분을 본다. 트럼프 당선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선 여전히 실제 사회로부터 정치적 요구가 형성되고 정치를 통해 표출되고 그것이 선거에서 투표자들의 선택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이번 대선에서 오히려 미국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부분을 본다. 트럼프 당선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선 여전히 실제 사회로부터 정치적 요구가 형성되고 그것이 정치를 통해 표출되고 선거에서 투표자들의 선택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대중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미국 정치체제 역시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은 사회의 여러 힘이 정치를 통해 상당히 표출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잘못 작동하더라도 (중간선거 등) 2년마다 치러지는 선거로 투표자들의 요구는 표출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투표자는 선출된 대표, 공직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대부분의 공직을 선거로 선출하는 것도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트럼프 정권이 제대로 못한다면 중간선거에서 압력을 받게 되고, 4년 뒤 연임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해서 미국 민주주의 체제가 이상하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투표자 재정렬은? 미국은 민주·공화 양당 체제가 공고한데 이런 정당 체제에 변화가 있을까.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정치학자들은 미국 정당 체제가 지금까지 여섯 번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를 ‘투표자 재정렬’이라고 한다.

공화당도 예전에는 진보적이었다. 링컨의 정당 아닌가. 그러다가 1930년대 뉴딜 때 민주당이 노동세력과 연대하면서 민주당 체제가 30년 이상 지속됐다. 이후 1960년대에 미국 남부와 백인을 중심으로 공화당 지배 체제가 형성돼 닉슨 때부터 레이건을 거쳐 부시까지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여섯 번째 투표자 재정렬이 유지돼왔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을 통해 미국의 정당 체제가 과연 일곱 번째 재정렬을 만들어내면서 정당 체제가 변할지는 지금으로선 단정할 수 없다. 향후 두서너 차례 선거를 거치면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러스트 벨트’는 과거에 민주당 텃밭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트럼프 공화당 지지 지역으로 바뀌었다. 굉장한 변화다. 아주 중요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있었고 그것이 기존 투표자 정렬을 헝클어뜨린 것이다. 이번 선거가 그 변화를 반영했다면 미국 정당 체제가 재편성되는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힐러리는 구시대의 마지막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트럼프 정부의 출현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온 세계적 격변을 정치적으로 완화하지 않고 부정적 측면을 더 악화시킨다면, 우리는 그것을 파시즘적 현상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세계 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좋은 정치체제, 즉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이상적으로 결합한 새로운 정치 질서가 등장한 것 같은 일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트럼프가 불러올 파시즘적 현상으로 인한 일련의 혼란 이후) 상당히 훗날에 일어날 일이 될 것이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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