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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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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나왔다고 늙어서 행복한가요?”

초등 5~6학년이 말하는 ‘놀이와 공부’ 놀 곳도, 놀 것도 부족… 행복은 성적순 아니니까
등록 2016-05-03 17:20 수정 2020-05-03 04:28

1년 만에 만난 아이들은 훌쩍 자라 있었다. 4학년이던 고경민·장효빈 어린이는 5학년이, 5학년이던 채주영·함소빈 어린이는 6학년이 됐다. 아이들은 1년 전 이맘때 어린이날 특집호 제1060호( ‘중독은 우리의 인권이에요’)에서 어른들의 게임·스마트폰 중독 우려에 대해 “어른들은 잔소리 중독, 공부 중독”이라 맞받아쳤다. 고학년이 된 아이들과 이번에는 열두 살, 열세 살의 놀이와 공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시크한 매력의 6학년 이하영 어린이도 새로 합류했다. 이들과의 특별좌담은 4월25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커피숍에서 딸기주스를 마시며 진행됐다.

‘어린이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도 “아직은 놀고 싶다”고 말한다. 왼쪽부터 이하영·고경민·장효빈·채주영·함소빈 어린이.

‘어린이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도 “아직은 놀고 싶다”고 말한다. 왼쪽부터 이하영·고경민·장효빈·채주영·함소빈 어린이.

“친구랑요!”

“혼자 노는 게 좋아요, 아니면 친구나 부모님과 노는 게 좋아요?”란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5명의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소빈  부모님과 놀 게 없어요.

하영  수준이 안 맞아요. 부모님은 너무 어른스럽게 놀려고 해요.

효빈   엄마나 아빠랑 단둘이 있으면 어색해요.

의외로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부모와 함께 노는 것도, 스마트폰·컴퓨터로 게임하고 아이돌 동영상을 보는 것도 친구와 노는 것에는 밀렸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까.

주영  홍대를 가거나 홈플(홈플러스) 가서 아이쇼핑 하거나 그래요.

‘홍대’라는 말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5명의 아이들이 사는 곳은 서울 마포의 성산동·망원동이다. 마을버스로 5~6개 정거장을 가면 ‘핫한’ 홍대 거리가 나온다.

경민  노래방!

하영   다이소!

주영   구경하는 맛이 있어요, 홍대는.

소빈     홍대는 4학년 후반부터 갔어요. 싼 데를 찾아다녀요. 우리가 가는 ‘수노래방’은 낮 12시 전에 가면 한 명당 2천원이에요.

하영   가끔씩 서비스도 주고요.

소빈   다이소도 지하까지 합쳐서 4층인가, 5층인가 엄청 커요. 거기엔 친구들 선물 사러 가요. 아무래도 ‘저렴이’(저가)니까.

경민  거기선 찻잔하고 밑의 그릇하고 합쳐서 2천원이에요.

하영   싼 거에 비하면 엄청 괜찮아요.

소빈   홍대 로드숍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액세서리 같은 것도 구경해요. 이런 거요. 저희가 맞춘 거예요!

주영   이거 1천원이에요.

아이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까만 팔찌를 자랑했다. 그러나 홍대 거리가 아이들에게 늘 재미있는 곳만은 아니었다.

소빈   홍대가 그렇게 즐겁지는 않아요. 얼마나 째려보는데요.

경민  사람도 너무 붐비고요.

소빈   언니, 오빠들이 많이 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가도 막 어른처럼 노는 느낌이랄까.

경민    ‘아이들은 이런 데 올 게 아니다’, 이런 느낌요. 무서워요.

하영   너무 부담스러워요.

효빈   수노래방 가면은요, 치마 줄이고 패딩 입고 초커(짧은 목걸이) 하고 틴트 바르고 구루뽕(헤어롤) 하고 턱에 마스크 한 언니들이 막 쳐다봐요.

소빈   갓 중딩들요. 그래도 이것저것 할 게 많으니까 홍대로 가요. 밥 먹고 수노래방 가고 다이소 간 다음에 아이들끼리 수다 떨고 싶을 땐 다시 버스를 타고 어떤 친구네 가거나, 아니면 계단 같은 데 앉아서 수다를 떨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주영   재밌게 놀기도 참 힘들어요.

다행히도, 주말 낮에 큰길로만 다니는 덕분에 ‘어른놀이’ 하는 중학생들과 직접 맞닥뜨린 적은 없다고 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며 홍대를 찾는 건 왜일까. “놀 곳이 없어서요!” 아이들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어린이를 위한 놀이공간이 하나같이 영·유아나 저학년 초등학생에 맞춰진 탓에 신체적·정서적으로 성숙한 5·6학년들은 갈 곳이 없다고 했다.

효빈   이 동네에는 놀이터가 하나도 없어요. 성서중 근처에 있던 놀이터도 7살, 8살 이상은 못 가게 하고요. 그네는 높은 건 다 빼고 미끄럼틀은 다 낮췄어요.

경민  전 그네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탈 곳이 없어요.

효빈   예전에 내가 그네를 엄청 기다렸는데요. 어떤 할머니가 “애들한테 봐줘야지?” 그랬어요.

경민  어린애가 너무 많아 정신 사나워요. 초등학생들이 갈 수 있는 놀이터가 따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소빈   놀이터는 그다지 당기지 않는데. 뭔가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

효빈   초등학생 카페요! 어린이 카페(키즈카페)도 있고 어른 카페도 있는데, 초등학생 카페는 없어요. 건물에 방을 나눠서 푹신푹신하게 해놓고요. 음식도 팔았으면 좋겠어요.

그나마도 ‘홍대 나들이’는 5천원, 1만원의 용돈이 모인 주말에 한 번씩 갈 수 있는 특별한 외출이다. 평일에는 학교와 학원, 과외, 숙제에 매어 있다. 대안교육에 뜻을 둔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마을공부방인 ‘토끼똥’에 다니는 5명의 아이들은 비교적 학원을 덜 다니지만 사교육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영   국어랑 영어 학원요.

효빈   수학 하나요.

경민  영어, 한자, 수학.

주영   영어, 한자, 수학, 과학요.

소빈   저만 안 다니네요. 전 놀 시간이 많아요.

효빈   주영 언니 빼고 여기는 1~2개 정도밖에 학원을 안 다녀요. 다른 아이들은 5~6개씩 학원을 다녀요. 그래서 우리는 놀 사람이 없어요. 12살 아이가 학원 5~6개 다니면서 미래를 꿈꾼다는 게 말이 돼요?

통계청이 2015년 6월 발표한 ‘201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를 보면 10살 이상 고학년 초등학생은 하루 평균 1시간57분을 ‘학교 외 학습’에 쓰고 있다. 그나마 2009년보다 37분 줄었다. 과거보다 공부시간은 감소했지만 놀이의 질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아이들은 하루 여가시간(4시간52분) 중 상당 시간을 TV 시청을 포함한 미디어 이용(1시간46분)으로 보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친구와의 교제는 35분, 스포츠·레포츠 활동은 22분에 불과했다. “(아동에게) 문화, 예술, 오락 및 여가 활동을 위한 적절하고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도록 권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어린이·청소년 인권에 관한 국제 협약’(제31조)에 배치된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양한 여가 활동을 두루 즐길 기회를 만들어주는 대신 TV, 인터넷, 스마트폰의 사용 통제에 집중한다.

주영   TV는 엄마가 연결을 끊어버렸어요. 컴퓨터는 비번(비밀번호)을 걸어놓으셨고요. 휴대전화는 공부할 때 가져가세요.

효빈   우리 엄마도 TV는 없애셨어요. 평일에는 휴대전화로 게임, 동영상 안 되고요. 카카오톡은 5분, 10분 틈틈이 하는 건 괜찮은데 그것도 밤 9시 이후에는 안 돼요.

경민  우리 집은 통제 안 해요. 밤 11시, 12시 넘기면 뭐라고는 하시지만요.

하영   저도 밤 12시까지는 괜찮아요.

소빈   시간 제한은 없어요. 그런데 주말에 놀 친구가 없으면 카톡을 하잖아요. 그러다 그만두려고 하면 딱 엄마가 들어와서 “왜 핸드폰만 하냐”고 말해요.

아이들도 스스로 조절한다. 특히 고유의 취향과 가치관이 있는 고학년들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해도 절제해야 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안다. 1년 전 “12개 인터넷게임을 깔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순례하는 기계 같아 게임들을 싹 지웠다”던 소빈이는 지금 고양이를 키우는 게임 하나만 한다고 했다. 개인의 취향과 자기조절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공부만 하면 된다”는 어른들의 말에 아이들은 쉽게 설득당하지 않는다.

하영   엄마들은 아이를 학원에 보내서 자기가 못한 걸 다 시키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네가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면서요.

경민  사회 인식이 그런 거 같아요. 센 척하는 언니들도 초딩을 무시하잖아요.

효빈   네이버 댓글 보면 무조건 “초딩이네”.

소빈   맞아. 개념 있는 초딩들도 있는데.

효빈   내가 봤을 때 악플 다는 사람들은 중·고딩도 아니고 대부분 성인이야. 사람들이 어리면 무조건 멍청하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요. 자기들도 초딩 때 실컷 놀았으면서.

소빈   자기가 잘하지 못했고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괜히 죄 없는 초딩들을 까는 거예요. 근데 요즘 초딩들도 ‘노 답’인 게 패드립(패륜적 드립) 같은 거를 많이 치긴 해요. 부모님 욕하는 거요.

효빈   완전 나쁜 거예요.

소빈   근데 이 패드립의 시초도 어른들이에요.

주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죠.

6학년 소빈·하영이는 “중학생이 돼도 노는 것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주영이는 “공부량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생각도 많아지면서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주영   엄마가 시험 점수 가지고 뭐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6학년이 돼서 처음으로 뭐라고 하는 거예요. “너는 강의도 듣고 과외도 하는데 왜 못하냐, 뭐가 문제냐”고요.

하영   우리 엄마는 안 그래. 똑같아.

소빈   우리 엄마는 공부를 많이 안 해도 뭐라고는 안 해요. 근데 요새는 “너 6학년이 돼서”라고 말끝마다 붙여요.

주영   아이들도 좀 달라져요. 5학년 때부터 반에 1명씩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친구가 있어요. 아이들끼리 “꿈이 뭐야?” 물어요. 저번에는 제가 “어차피 회사원이 될 것 같은데”라고 하니까 다 동의하더라고요.

소빈   전 그냥 아이들이 좀 성숙해진 느낌?

중학교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효빈   전 가까운 데요.

하영   홍익중만 아니면 돼요. 우리 언니가 거기는 공부가 빡세대요.

주영   성서중이오. 교복도 괜찮고요. 선생님도 열정이 있어서 아이들한테 설명도 잘해준대요.

아이들끼리 경쟁시키는 일반 중학교가 아닌 대안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아이도 있다.

소빈   제가 가고 싶은 대안학교는 제가 태어난 시골, 지리산 쪽에 있거든요. 비인가 쪽이라 확실히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많이 해줄 수 있다고 해요. 엄마들이 왜 ‘공부를 포기하는 애들이 가는 데가 대안학교야’라고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제 꿈은 수의사인데 제가 노력하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엄마·아빠는 달가워하시지는 않는데 제가 엄청 조르면 갈 수 있겠죠?

주영   나중에 내려가면 만나자. 놀러 갈게.

중학교 대비 선행학습, 자기 학년 심화학습, 자기주도학습 등 어른들의 요구가 쏟아지지만 고학년 아이들은 “아직 놀고 싶다”고 말한다. 을 쓴 양소영 ‘허그맘 소아청소년심리센터 강동센터’ 원장도 고학년이 됐다고 해서 아이에게 학습 부담을 갑자기 주면 역효과가 난다고 조언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놀이가 먼저인 아이, 놀이에 너무 소진하면 공부할 여력이 없는 아이 등 아이마다 기질과 성향이 다 다르다. 부모가 아이의 성향을 파악한 뒤 아이와 함께 (놀이와 학습에 대해) 조율하는 것이 좋다. 부모가 잔소리만 하면 곧 아이의 사춘기도 오는데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소빈   일단 초등학교 때는 놉시다!

경민  당연히 놀아야죠. 어른도 놀고 언니·오빠도 노는데 우리만 못 놀면 억울하잖아요.

주영   저는 미래를 생각해서 학원도 과외도 제가 하겠다고 했거든요.

소빈   학원 안 다녀도 우리 반에서 성적이 막 달리진 않던데.

주영   초등학교에선 머리로 대충 훑어도 커버가 되는데 중학교는 수준이 전혀 다르잖아. 초등학교 때 전교 1등 하던 아이가 중학교 가서 전교 50등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많아.

경민  솔직히 장래에 필요 없는 과목도 있는 거 같아요. 수학이요. 너무 어려워요.

중학교에 대한 부담은 어느새 대학 입시 고민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꼭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엔 동의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삶을 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니까.

주영   놀면 공부가 뒤처지잖아요. 요즘엔 알바도 대학 보고 뽑는다 하더라고요.

주영  슬프다. 근데 대학은 회사원 기르는 데가 아니라 공부하는 데 아니에요? 서울대 나와도 어차피 회사 들어가면 보고서 작성하고 그러잖아요.

주영   나도 왜 대학 보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한글하고 엑셀 좀 만질 줄 알면 되는 건데.

주영  서울대 다녔다고 (무조건) 공부도 잘하고 심성도 착하고 교우관계도 좋다고, 모든 걸 공부 하나 보고 평가하잖아요.

주영   외모도 그래.

소빈   엄마 친구들 보면 서울대, 연세대 안 나와도 지금 충분히 행복해 보이시던데. 서울대 나왔다고 늙어서 다 행복한가요?

경민  행복하게 살아야죠.

주영   자기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고, 충분히 만족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주영   공익광고 같아.

주영이의 말에 모두들 까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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