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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수색 11시24분? 조작된 시간

관련 자료 단독 입수… 세월호 구조대 수중수색 시작 시간 “통일하라” 지시한 해경, 실제 수색 개시보다 1시간36분 앞당겨
등록 2015-12-15 07:32 수정 2020-05-02 19:28
세월호 탐사보도 3부 세 번째 이야기는 ‘최초 수중수색 시간’이 어떻게 조작됐는지 파헤친다.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31분 세월호는 완전히 뒤집어진 채 뱃머리만 남기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침몰한 배에 남아 있는 300여 명을 구조할 방법은 잠수사가 선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부는 “11시24분 목포해양경찰서 122구조대가 첫 수중수색 했지만 거센 물살 탓에 선체 진입에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청와대와 국회에도 그렇게 보고했다. 그러나 거짓이었다. 목포해경 122구조대는 그 시각 사고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이 단독 입수한 기록을 통해 최초의 수중수색이 조작되는 14일을 재구성한다. _편집자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31분 세월호가 뒤집어진 채 뱃머리만 남기고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심해 잠수를 할 수 있는 해양경찰 122구조대나 특공대는 사고 현장에 없었다.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입수하는 민간잠수사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31분 세월호가 뒤집어진 채 뱃머리만 남기고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심해 잠수를 할 수 있는 해양경찰 122구조대나 특공대는 사고 현장에 없었다.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입수하는 민간잠수사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58분 목포해양경찰서(목포해경) 상황실은 122구조대에 출동을 지시했다. “여객선이 침몰 중이니 차량으로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가서 어선을 타고 사고 현장으로 가라.”

하지만 122구조대가 대기하던 목포해경 전용부두에는 513함이 있었다. 그 함정을 타고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게 훨씬 빨랐다. 그러나 구조대는 513함의 존재를 몰랐다.

513함도 나중에 출동명령을 받고 9시20분 목포해경 전용부두를 출발했다. 바로 그곳에 122구조대가 있었으므로 함께 출발할 수도 있었겠지만, 구조대는 먼 길을 돌아갔다. 목포해경 상황실의 잘못된 지시를 받은 구조대는 잠수 장비를 차량에 싣고 팽목항으로 출발했다. 팽목항까지 거리는 79km였다.

차량·어선·경비정·고무단정 타고 도착

팽목항으로 가던 도중 구조대원은 진도파출소에 연락했다. 사고 현장으로 타고 갈 선박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9시57분이었다. 진도파출소는 고개를 저었다. 순찰정과 연안구조정이 모두 사고 현장으로 출동한 뒤였다. 수협에 전화해 ‘어선 수배’를 요청했다. 작은 어선을 겨우 구했다.

10시35분 팽목항에 도착한 구조대원은 어선에 잠수 장비를 옮겼다. 그러나 바로 출발하지 못했다. 집에서 쉬던 구조대원 3명을 기다려야 했다.

구조대원 10명이 다 모인 11시5분, 팽목항을 떠났다. 그들을 태우지 못한 513함은 11시10분 사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승객을 구조할 대원들은 작은 어선에 이제 막 올라탄 상태였던 것이다. 팽목항에서 19해리(35km)를 항해해야 사고 현장에 가닿을 수 있었다. 그마저 기상 상황이 나빠져 작은 어선으로는 이동이 어려워졌다. 마침 지나가던 경비정(P-120)을 만났다. 다시 장비를 옮겼다.

P-120정은 “11시30분 조도 인근 해상에서 어선과 접선해 (목포해경) 122구조대 태워 사고 해역으로 간다”고 경찰전보에 썼다. 목포해경 상황실은 “122구조대 10명이 20분 후 현장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통신수단은 해경 지휘부가 함께 교신하던 해경 주파수공용통신(TRS)이었다.

구조대원 10명이 사고 현장 주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2시14분. 뱃머리만 남기고 세월호는 가라앉아 있었다. 목포해경 122구조대는 1508함 고무단정으로 또 갈아탔다. 차량→어선→경비정에 이은 4번째 이동이었다.

오후 12시19분 구조대원들은 세월호 닻의 위치를 알려주는 부이줄을 먼저 설치했다. 사고 해점을 표시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2명이 첫 수중수색을 시도했다. 그 시각은 오후 1시였다.


첫 수중수색을 시도했다. 오후 1시였다. 수심 12m로 내려가자 배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현상(와류)이 발생했다. 수색할 수 없었다. 물 밖으로 빠져나오니 1시10분. 다른 구조대원 2명이 가이드라인을 설치하겠다며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물속에서 강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더 이상 수중수색은 불가능해 보였다. 앞서 도착한 여수해경과 완도해경 구조대도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는 여수해경 122구조대와 완도해경 122구조대가 각각 11시40분과 50분 사고 현장에 먼저 도착해 있었지만, 수중수색을 시작한 것은 목포해경 122구조대가 처음이었다. 여수·완도 해경 구조대가 왜 수중수색을 시작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수심 12m로 내려가자 배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현상(와류)이 발생했다. 수색할 수 없었다. 물 밖으로 빠져나오니 1시10분. 다른 구조대원 2명이 가이드라인을 설치하겠다며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2차 시도였다. 물속에서 강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침몰 현장이 조류가 강한 수역인데다 배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2~3회 돌았다.

정신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선체 벽을 더듬어 올라왔다. 그 과정에서 한 대원이 허리와 손가락을 다쳤다. 더 이상 수중수색은 불가능해 보였다. 앞서 도착한 여수해경과 완도해경 122구조대도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다.

목포해경 122구조대는 오후 3시 3차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수심 16m 지점까지 내려갔지만 소용돌이 탓에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가이드라인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목포해경 122구조대는 두 차례 더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빈손으로 나왔다(오후 6시, 6시18분). 이들은 1508함으로 철수했다.

서해청 “11시24분” vs 목포해경 “1시”
2014년 5월4일 박근혜 대통령이 전남 진도 해상에서 세월호 사고 실종자를 수습하는 해양경찰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4년 5월4일 박근혜 대통령이 전남 진도 해상에서 세월호 사고 실종자를 수습하는 해양경찰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결국 사고 당일 최초 수중수색 시각은 ‘오후 1시’였다. 그런데 이날 오전 11시34분에 전파된 서해청 상황보고서 2보에는 “11:24 목포 122구조대 4명 여객선 투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후 6시8분에 전파된 5보에는 “11:24 목포 122구조대 4명, 여객선 진입수색차 1차 시도”라고 쓰여 있었다. 11시24분에는 목포 122구조대가 어선을 타고 현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11시24분 최초 수중수색’이라는 서해청 상황보고서는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김석균 해경청장이 있는 3009함은 ‘잠수사 수중수색 현황’을 작성하며 “11:24 목포 122구조대 4명, 여객선 진입수색차 1차 시도”라고 적었다.

4월17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도 언론 브리핑에서 최초 수중수색 시간을 “11시24분”이라고 발표했다. 해경이 작성한 ‘진도, 여객선 세월호 전복사고 주요 쟁점’ 자료를 기초로 했다. “사고 선박 내 구조는 특수장치와 잠수 등 능력을 보유한 전문 구조팀이 수행했다. 11시24분 목포해경 구조대가 도착해 1차 수중탐색을 실시했다.”

그런데 당시 해경 기록 가운데는 최초 수중수색 시간이 “오후 1시”였다는 기록도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사고 당일 오후 12시31분에 전파한 목포해경 상황보고서(4보)는 “122구조대가 12시15분에 사고 현장에 도착했고 오후 1시에 최초 수중수색했지만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오후 3시54분에 전파된 목포해경 상황보고서 5보도 마찬가지였다. 오후 6시29분에 작성한 해경 본청 상황보고서(7보)에도 122구조대가 오후 1시에 1차 수중수색을 실시한 것으로 돼 있다. 결국 본청과 서해청, 목포해경이 최초 수중수색을 서로 다르게 작성·전파한 것이다.

해경 본청 경비안전국 경비과는 4월17일부터 목포해경, 서해청 상황보고서를 토대로 ‘진도, 여객선 세월호 전복사고 진행보고’를 작성했다. 서로 다른 두 보고서를 비교한 뒤 서해청 상황보고서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경비과는 4월24일부터는 ‘11:24 목포 122구조대 최초 수중수색’ 내용을 삭제했다. 적어도 사고 발생 일주일 뒤에는 오후 1시부터 수중수색했다는 점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는 다시 한번 뒤집힌다.

당시 최초 수중수색 시간은 쟁점 사항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해경이 얼마나 신속하게 구조 방식을 전환했는지 가늠하는 잣대였다. 해경 수뇌부는 수중구조 방식을 모색하지 않고 구조 인원만 파악하는 데 힘을 쏟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경, 자료 확인 없이 청와대 보고 감사원 서해청과 목포해경 상황실은 10시35분과 10시46분 선박 내 다수의 승객이 갇힌 채 침몰됐다는 보고를 현장 구조세력에게서 받았다. 당시 TRS와 문자시스템을 보면, 수중수색 방식에 대한 논의가 없고 구조 인원이 몇 명인지만 확인한다. 선박 내 생존자의 수중구조 활동을 소홀히 했던 사유가 무엇인가?
목포해경 TRS나 문자시스템에는 없지만 구내전화로 122구조대(잠수부) 등이 언제 도착하는지 파악했다. 예인선도 수배했다.
서해청 에어포켓 구조를 위해 10시51분 구조대, 특공대, SSU에 신속 이동을 요청했다. 11시17분 (서해청) 특공대 도착 후 (수중) 입수 구조를 지시했다. 11시30분 도착한 SSU가 (생존자를) 구조할 수 있도록 선미 쪽을 통제하는 조치를 했다.
(2014년 5월27일 감사원 문답서)

4월27일 대통령 비서실은 “사고 당일 122구조대 등 구조세력의 시차별 조치 사항”을 파악해달라고 해경 본청에 요청했다. 경비안전국 수색구조과가 최초 수중수색 시간을 재확인했다. 우선 목포해경 122구조대원에게 전화했다.


해경 본청 목포 122구조대가 11시24분에 최초 수중수색했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
목포해경 122구조대 목포서에서 차량으로 진도 팽목항까지 이동했고 민간 어선으로 사고 현장까지 갔다. 가면서 잠수복을 입어 사고 현장에 도착해 5분 내 잠수했다. 도착 시간은 11시15분에서 20분경이었다.
(2014년 4월27일 해경 본청-목포해경 122구조대 전화)

이 전화에서 122구조대는 최초 수중수색 시간을 실제 수색이 시작된 오후 1시보다 1시간36분이나 앞당겨 ‘11시20분경에 도착해 5분 내 잠수했다’고 밝혔다. 3009함에서 작성한 ‘잠수사 수중수색 현황’과 일치하도록 거짓말한 것이다.

경비안전국 수색구조과는 실제 현장에 있었던 구조대원의 말이 제일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통령 비서실에 “11시24분 최초 수중수색”이라고 보고했다. P-120정의 경찰전보, 선박위치추적시스템, 항전기록 자료, 목포해경 상황보고서 등 객관적 자료는 확인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4월28일 경비안전국 수색구조과는 해경 업무 포털 메모 보고로 최초 수중수색 시간을 11시24분으로 “통일하라”고 띄웠다. 전날 대통령 비서실에 보고했다는 이유였다. 사고 첫날부터 오후 1시로 바르게 적어왔던 목포해경 상황실은 본청 메모를 보고 11시24분으로 고쳤다.

감사원 솜방망이 징계 “주의하라”

국회에도 똑같이 보고했다. 4월29일 국회에 제출한 ‘4월16일 시차별 주요 조치 사항’을 보면, “11:20 목포 122구조대 10명 현장 도착(10:35, 어선 이용 팽목항 출항), 목포 122구조대 1개조 2명 최초 입수(11:24), 선체 수중수색”이라고 돼 있다.

거짓말의 배경에는 비판 여론이 있었다. 나중에 관련 기관의 조사 과정에서 122구조대는 ‘왜 거짓보고를 했느냐’고 추궁당했다. 뒤늦게 털어놓은 이유의 대강은 ‘세월호 침몰 전에 구조대가 도착하지 못했고, 도착 직후에도 창문을 깨고 승객을 구조해야 했다는 비판이 들끓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실제 수색 시간인) 오후 1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감사원은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지만 본청과 서해청에 ‘주의’만 요구했다.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세월호 관련 보도와 기록은 최초의 수중수색을 11시24분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시각에는 어떤 목포해경 112구조대도 사고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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