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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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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에게 부과된 큰 책임

여객선 안전 운항 담보하는 유일한 전문가 운항관리자, 해운조합 소속이어서 선주 등 눈치 보며 편법 감독
등록 2015-11-05 06:58 수정 2020-05-02 19:28

세월호가 출항하기 전날인 2014년 4월14일 오후 6시께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선착장. 오하마나호가 화물칸을 닫고 승객이 탑승하는 계단(갱웨이)을 육상과 분리해 막 출항하려던 참이었다. 한국해운조합 인천지부 운항관리자 김아무개(37)씨가 배 쪽으로 다가가더니 양팔로 엑스(×)자를 크게 그었다. “오늘 배 출항 못합니다.”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중앙의 만재흘수선(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최대 적재 한도)이 수면 아래로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현 상태로는 출항할 수 없다. 조치를 취하라”고 명했다.

운항관리자 출항 정지 명령에 ‘욕설’

출항을 지켜보던 청해진해운 김영붕 상무가 욕설을 퍼부었다. “저따위 놈 말 한마디에 이 큰 배가 뜨지 못하는 게 말이 돼!” 김 상무는 조타실을 바라보며 “야, 빨리 가(출항해)”라고 소리쳤다. 오하마나호 박진환 선장 역시 양손으로 ×자를 크게 그었다. 운항관리실에서 출항을 중지시켰으니 무시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김 상무는 또다시 소리쳤다. “저 새끼는 도대체 누구 말을 듣는 거야? 빨리 가라고, 가!”

청해진해운 직원들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팽팽히 당겨놓은 로프를 느슨하게 풀었다. 더 이상 화물은 싣지 않고 선미 램프(차량 출입문)를 올려 고정했다. 대형 화물차 2~3대와 승용차가 들어가지 못했지만 무시했다. 선박 평형수도 조정했다. 운항관리자에게 다시 확인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만재흘수선이 보였다. 김씨는 마침내 출항을 허가했다. 출항 정지 20분 만이었다.

해운법 등은 운항관리자가 여객선의 안전 운항을 ‘독립적으로’ 지도·감독하도록 돼 있다. 여객을 초과하거나 화물을 과적하는지 확인하고 필요하면 선장에게 출항 정지를 명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수사관  진술인(운항관리자)의 출항 정지를 무시하고 김영붕 상무가 욕설을 하며 선장에게 출항하라고 지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운항관리자 김씨  여객선이 출항 정지가 될 경우 선사 쪽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 예정 시간보다 출항이 지연되면 승객의 항의성 민원이 생긴다. 그 부담이 크기 때문에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운항관리자의 의견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2014년 5월3일 검경 합동수사본부 진술조서)


검사  운항관리자가 출항을 정지시키면 그 이유를 물어야지 욕을 왜 하나.
김 상무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시간을 준 것뿐이고 욕을 한 것은 혼잣말이다. 5년6개월 일하면서 (출항 정지는) 처음 봤다.
(2014년 10월24일 청해진해운 1심 제18회 공판)
해운조합 소속… 의무 위반해도 벌칙 규정 없어

운항관리자는 여객선의 안전 운항을 담보하는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전문가이지만 해운사의 편법에 곧잘 눈감았다. 해운사의 조직인 한국해운조합 소속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 ‘출항 전 여객선 안전점검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선장은 출항하기 전에 ‘현원’ ‘화물’ 등을 파악해 안전점검보고서를 작성하고 운항관리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그러면 운항관리자가 이를 서면으로 확인하고 출항시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원과 화물을 빈칸으로 놔둔 채 선장이 안전점검보고서를 우선 제출했다. 출항 뒤에야 무전으로 현원과 화물량을 불러줬다. 과승이나 과적을 운항관리자가 적발해 여객선 출항을 통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셈이다.

2011년 9월 부산을 출발해 제주항으로 향하던 현대설봉호에 화재가 났다. 활어 운반 차량에서 불이 옮겨붙은 것이다. 당시 한국해운조합 안전운항팀은 ‘출항 전 점검보고서 서면확인 관련 업무지시’라는 공문을 보냈다. “출항 전 점검보고서 서면 확인시 점검란이 미기입된 경우 서명 금지. 특히 정·현원 및 화물란이 미기입된 경우.” 편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였다.


검사  공문대로 시행했나.
김아무개 운항관리실장  2~3일 정도 시행했다.
검사  (그 뒤에는) 다시 점검보고서를 공란으로 받았나.
운항관리실장  현장에서 문제점이 많다고 했다. 첫째 여객선 출항이 지연되고, 둘째 선사와 선장이 항의했다. 규정에도 없는데 해운조합이 무조건 변경하라고 한다고 말이다. 기존 방법이 바람직하다는 직원들 의견을 받아들였다. 한국해운조합에도 의견을 전했지만 답변은 없었다.
(2014년 11월6일 청해진해운 1심 제20회 공판)

2012년 6월에는 여객선 운항관리자 의무 위반에 따른 벌칙 규정까지 없어졌다. 운항관리자 의무란 ‘운항관리 규정의 준수와 이행의 상태를 확인하고 항만에 드나드는 여객선을 확인하며 선원을 교육하는 등 안전 운항을 위한 직무와 지도에 충실’하는 것을 말한다.

해운법을 개정하면서 제22조 3항이던 운항관리자 의무 규정을 4항으로 변경하면서도 그와 연계된 벌칙 조항(300만원 이하의 벌금)에선 4항이 적용되도록 개정하지 않았다. 입법상 오류로 벌칙규정이 누락돼버린 것이다. 그 결과, 운항관리자 의무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도 사라졌다. 2013년 11월 해양수산부는 이를 확인했지만 차일피일 개정을 미뤘다. 운항관리자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자 운항관리자 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4월15일 세월호의 과적과 부실 고박(고정)을 적발하지 못한 운항관리자 전아무개씨를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또 현원과 화물란을 공란으로 남겨둔 출항 전 여객선 안전점검보고서를 제출받아 서명한 것은 ‘한국해운조합의 안전운항관리 업무방해’라고 주장했다.

1심은 업무상 과실치사죄와 업무방해죄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지만 항소심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만 유죄로 판단했다. “운항관리자는 해양경찰청장의 지도·감독을 받고 해임할 경우 지방해양수산청장과 미리 협의해야 한다. 따라서 운항관리 업무는 한국해운조합이 아닌 운항관리자 자신의 업무에 해당한다. 타인의 업무를 방해하는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없다. 형사처벌 규정이 없다면 징계 사유에 불과하다.”(2015년 5월12일 청해진해운 항소심 판결문)

[%%IMAGE2%%]대법원 “업무방해죄 적용할 수 있다”고 파기환송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10월29일 항소심 판결을 깨고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해운조합이 ①운항관리자를 선임·배치하고 ②출항 전 안전점검에 관한 운항관리자 내규 규정을 마련하고 ③운항관리 업무에 대한 지침을 내렸기에 운항관리 업무의 ‘당사자’라고 봤다. 대법원은 전씨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며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세월호 사고 이후 업무방해죄로 무더기 기소된 운항관리자 30여 명의 하급심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청해진해운 임직원에게 적용된 업무상 과실치사죄는 대법원이 그대로 인정했다. 김한식(73) 대표에겐 징역 7년에 벌금 200만원이, 김영붕 상무 등 선사 임직원 6명에겐 2∼6년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세월호 고박 업무를 맡았던 우련통운 이아무개(52) 현장팀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 선고됐다. 우련통운 문아무개(59) 본부장과 해운조합 김아무개(53) 운항관리실장은 무죄를 받았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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