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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 이전 침몰하고 있었다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은 예고된 재앙 세월호 침몰… 풍속 15m에도 제주도로 출항할 수 없을 정도고 30분마다 평형수 옮겨 균형 맞춰야 해서 간부들이 팔아야 한다며 사직서까지 작성했지만 유병언이 반대
등록 2015-10-06 22:15 수정 2020-05-03 07:17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 8분 세월호는 갑자기 좌측으로 기울어 10시17분에 완전히 전복됐다. 국회·해양수산부 제공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 8분 세월호는 갑자기 좌측으로 기울어 10시17분에 완전히 전복됐다. 국회·해양수산부 제공

은 세월호의 ‘진실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작업을 6개월째 진행 중이다. 입법부·행정부·사법부가 생산한 각종 세월호 기록을 모아 분석하는 작업은 지난하다. 그 분량만 3테라바이트(TB)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4월 제1057호부터 해양경찰 수뇌부의 문제점을 4회 연속 보도함으로써 작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해경 지휘부의 은폐와 조작, 구조 지휘 부재를 이 낱낱이 밝혀냄에 따라 법원은 세월호 승객 구조 실패의 공동책임이 해경 지휘부에 있다고 인정했다.
해경 수뇌부의 책임을 따졌던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재앙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을 모아 보도한다.
2013년 2월 청해진해운이 인천~제주 노선에 세월호를 투입한 뒤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다. 일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와 놀랍도록 닮았다. 대형 사고를 예고하는 ‘경고음’이었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일부 언론들이 과거 세월호 사고를 보도하기도 했지만 은 청해진해운의 내부 자료와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했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배”라는 것을 알았지만 돈 앞에서 모든 것에 눈감았다. 세월호를 도입할 때부터 그랬다. ‘증선 기준’을 맞추기 위해 허위 매매계약서를 작성해 인천지방해양항만청에 제출했다. 여객과 적재 화물량을 늘리려고 증개축 공사를 무리하게 강행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여객 정원은 100명가량 늘었지만 적재 화물량은 반토막 났다. 과욕이 부른 화였다. 하지만 세월호는 적재 화물량을 2배 이상 초과하는 대신 평형수를 빼내 만재흘수선(안전한 항해를 위해 물에 잠기는 적정 수위를 배 표면에 표시한 선)을 맞추는 위험한 운항을 1년간 지속했다.
과욕을 견제할 국가는 없었다. 국가는 허위 매매계약서를 승인하고 복원성이 나빠진 세월호의 운항을 허가했다. 상습 과적과 고박 부실도 못 본 척 넘어갔다. 그러나 편법 증선과 무리한 증개축을 가능하게 했던 공직자들이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이 확인했다. 법원은 공직자가 업무를 소홀히 했지만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304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벌백계는 없는 것이다. 이번호를 시작으로 ‘관행이라는 독’이 어떻게 더욱 확산되는지 집중 보도한다.
취재 정은주 기자, 편집 구둘래 기자, 디자인 손정란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그보다 더 많은 오류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이 세월호 침몰 사고에도 적용된다. 해양사고 경위를 밝히는 청해진해운의 보고서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그보다 더 많은 오류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이 세월호 침몰 사고에도 적용된다. 해양사고 경위를 밝히는 청해진해운의 보고서들.

‘1:29:300’.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그보다 더 많은 오류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이다. 1930년대 초 미국 보험회사의 관리감독자인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5천 건의 산업재해를 분석해 대형 사고에는 반드시 징후가 먼저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 뒤 하인리히 법칙은 수많은 대형 사고에서 그 존재가 재확인됐다. 뒤집어 말하면 징후가 나타났을 때 제대로만 대처하면 대형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4년 4월16일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 사고도 그랬다. 청해진해운이 2013년 3월 인천~제주 항로에 세월호를 투입한 뒤 징후가 반복해 나타났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아찔한 순간이 수없이 반복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경고음’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2014년 1월 106명 내려주고 운임 환불

2013년 11월28일 저녁 6시30분 세월호는 여객 117명, 차량 150대, 화물 776t을 싣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다음날 아침 8시20분께 제주시 추자도 아래 화도 부근을 지날 때 날씨가 흐려졌다. 시정거리는 3마일(4.8km) 정도였지만 풍속은 초속 14~16m였고 파도는 4~5m로 출렁였다.

그곳에서 제주항 쪽으로 우회전하던 세월호가 좌현 쪽으로 갑자기 15도 정도 기울었다. 파도를 맞으면서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때 1층 화물갑판에 로프로 묶어놓은 화물이 쏟아져내렸다. 양주와 벽돌 등이 컨테이너 아래로 떨어져 깨졌다. 320만원 정도의 손실이 발생했다. 물론 최대 적재 화물량(1077t)을 훨씬 웃도는 과적이었다.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2014년 5월 청해진해운 임원들에게 당시 사고의 원인을 물었다.

수사관 화물 손상이 발생했다는데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안기현 해무팀 이사 화물이 쏠리면서 손상됐다는 것은 고박(고정)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박을 제대로 했다면 침몰 직전까지 가더라도 화물이 움직이지 않는다.
(2014년 5월3일 피의자 신문조서)
수사관 이날 사고는 결국 세월호 갑판의 화물 고박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김한식 사장 그렇다. 매일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날은 그랬다.
(2014년 5월10일 피의자 신문조서)
수사관 당시 화물을 고박하지 않고 컨테이너 위에 쌓아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남아무개 물류팀 부장 가는 로프줄로 묶어놓았는데 부실했다.
수사관 세월호가 아니라 오하마나호였다면 당시 좌측으로 급격히 기울었겠는가.
남 부장 오하마나호에 비해 세월호가 흔들림이 많다고 생각했다. 큰 트럭을 실으면 롤링(좌우 움직임)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4년 5월20일 피의자 신문조서)

또 다른 징후는 2014년 1월20일 저녁 6시30분께 제주에서 나타났다. 세월호는 당시 출항하려다 실패했다. 예인선의 도움을 받았지만 부두에서 30m를 나가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강한 바람 때문이었다. 최대 풍속은 초속 18~21m였다. 제주해경은 기상이 더 나빠진다며 빨리 출항하라고 독촉했다. 세월호는 저녁 7시50분께 2차 출항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40m 정도 갔지만 다시 바람에 휩쓸려 돌아왔다. 세월호는 1시간 뒤 재출항하겠다고 했지만 해경이 위험하다고 통제했다. 여객 106명을 내려주고 운임을 환불하라고 지시했다. 세월호는 저녁 8시45분께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통제돼 출항 안 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화물차 기사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당시 다른 선박들은 어려움 없이 출항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청해진해운은 해경과 다시 협의했다. 밤 10시30분께 가까스로 출항 허가를 받아 11시께 인천으로 떠났다. 박아무개 제주지역본부장 과장은 “위험을 감수한 출항”이라고 말했다.

김 사장 “그냥 열심히 하라고 했다”
인천시 중구 항동 인천연안여객터미널 2층 청해진해운 사무실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인천시 중구 항동 인천연안여객터미널 2층 청해진해운 사무실 모습.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이아무개 제주지역본부장은 ‘세월호 1월20일 제주지연출항 경위서’를 작성하며 “(여객선) 구조 변경으로 선박 무게중심이 이동해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선박이 불균형”하고 “해수(평형수) 적재톤수가 증가해 선박 스피드(속도)가 감소”한다고 덧붙였다. 지연 출항 당시 세월호를 운항했던 이준석 선장도 “안전상 선박 구조 개선이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영붕 상무는 “세월호 증축으로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갔고 복원성이 좋지 않아 이를 해결하는 게 (청해진해운의) 숙제”였다고 털어놨다. 제주지연출항 보고서를 받은 뒤 주간회의에서 간부들이 해결책을 논의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선원들은 평형수를 더 채워서 무게중심을 아래로 낮추고 물류팀은 화물을 조금만 적재하기로 했다.”(2014년 5월20일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

하지만 실현하지 않는 헛구호였다. 영업 적자를 메우기 위해 과적 운항은 오히려 일상화됐다. 세월호는 1회 운항할 때마다 연료가 6천만원씩 들었다. 복원성이 나쁘고 속도도 느려 연료 소모가 오하마나호보다 많았다. 복원성 계산서나 운항 관리 규정대로 화물을 적재하면 늘 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검사 2014년 1월20일 발생한 사고보고서를 피고인이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안 취해서 (4월16일) 사고가 날 때까지 계속 과적 운항된 것인가.
김한식 사장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검사 운항으로 인한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물 적재를 늘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나.
김 사장 그렇다.
검사 물류팀으로부터 주간 보고를 받을 때마다 화물 매출을 올리라고 독려했나.
김 사장 그냥 열심히 하라고 했다.
(2014년 10월24일 청해진해운 재판)

검찰이 압수수색한 제주지역본부장의 수첩을 보면 세월호의 제주 출항이 항상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12월9일 메모에는 ‘세월호 겨우 출항. 풍속 15m 정도. 예인선 사용해도 힘드네’라고 적혀 있다. 또 12월11일자 메모는 ‘강풍 초속 12~15m. 세월호 1번 시도 후 접안. 해경 통제. 세월호 금요일 출항 결정’이라고 돼 있다.

평형수 전부 채우고 운항한 적 ‘없다’

선장과 선원들이 체감하는 위험은 더 심각했다. 오아무개 조타수는 세월호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아 힐링 펌프를 수시로 작동해야 했다고 진술했다. 힐링은 좌측으로 배가 넘어가는 경우 좌측 평형수를 우측으로 넘기는 등 배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다. 날씨가 나쁘고 화물이 많을 때는 20~30분에 한 번씩 힐링을 맞춰야 했다.

검사 다른 선박도 이렇게 자주 힐링 작업을 하는가.
조타수 다른 선박은 운항 도중에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월호에서는 당직자가 자리를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자주 힐링했다.
검사 직접 위험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나.
조타수 3~4개월 전 2항사와 함께 근무할 때였다. 우측으로 조타를 하는데 원심력 때문에 죄측으로 배가 기울었다. 그때 힐링 작업을 해 우측으로 물을 이동시켜야 한다. 당시 도수를 적게 조타했는데도 선체가 좌측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2항사가 우측으로 힐링해 간신히 배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2014년 5월2일 검사 피의자 신문조서)

신보식 선장은 “변침 과정에서 세월호가 쉽게 기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진술했다. 세월호를 일본에서 인수해온 2012년 2월엔 없었던 문제다. 증개축 과정에서 선수 우현의 카램프(차량 진입문)를 철거하면서 균형이 뒤틀린 결과다.

2014년 3월10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제주항에 입항해 화물을 싣는데 배가 우현 쪽으로 기울어 승객용 계단이 찌그러졌다. 지게차가 오른쪽으로 들어가 화물을 쌓아놓고 왼쪽으로 돌아나온 게 화근이었다.

검사 배 안으로 들어가는 지게차가 한쪽으로 다녀야지 양쪽을 모두 사용하면 배 안에서 지게차가 어떻게 나오나.
신보식 선장 내 말이 그거다. 세월호의 총톤수가 6825t인데 화물을 실은 지게차 몇 대가 다녔다고 한쪽으로 기우나. 다 복원력이 좋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검사 평형수를 전부 채우고 세월호를 운항한 적이 있나.
신 선장 (없다.) 그래서 날씨가 조금 좋지 않으면 걱정을 많이 했다. 청해진해운 직원들에게 수시로 말했다. “날씨가 안 좋은 날에 직접 한번 타봐라. 그리고 한번 상태를 느껴봐라.”
(2014년 4월29일 검찰 진술조서)

신보식 선장은 2014년 3월 선상 회의에서 “선수에 철근 같은 중량물을 몇 트럭씩 적재하면 조타할 때 선수가 잘 안 돌아간다. 선수에 철근은 일정량 이상 싣지 말고 배의 하부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물류팀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기도 했다.

“화물을 많이 실으면 무게중심이 올라가 배가 위험해진다”고 경고하자 물류팀의 남 부장은 “화물을 많이 실을수록 배가 가라앉아서 가니 더 안전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신 선장이 “배가 넘어가면 복구되는 게 늦다”고 반박하자 “어쨌든 많이 실으면 좋다”고 우겼다.

세월호의 쌍둥이 배로 불리는 오하마나호도 2011년 4월과 2013년 2월 기관 고장 등으로 회항했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지난 3월26일 인천항에 정박한 오하마나호를 방문하기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세월호의 쌍둥이 배로 불리는 오하마나호도 2011년 4월과 2013년 2월 기관 고장 등으로 회항했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지난 3월26일 인천항에 정박한 오하마나호를 방문하기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신 선장 “언젠가는 발생할 사고”

게다가 김영붕 상무가 신 선장을 보고 “나대지 말고 선원들이나 잘 관리하라”고 핀잔을 줬다. 매출을 많이 올리는 물류팀이 회사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남 부장은 2014년 5월13일 검찰 조사에서 “솔직히 화물을 많이 실어야 돈이 되기 때문에 안전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시 신보식 선장이 생수 몇 개, 자동화물 몇 개 이런 식으로 구체적 기준을 제시했으면 조금 반영했을 수도 있다”고 진술했다.

영업 적자가 늘어나자 청해진해운 간부들은 세월호 매각을 논의했다. 2013년 11월18일 작성한 ‘제주항로 선박운영 구조조정안’을 보면 ①오하마나호 단독 운항 ②세월호 단독 운항 ③오하마나호와 화객선(여객과 화물을 동시에 운송하는 배) ④세월호와 화객선 등 4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대다수 간부들은 ①오하마나호 단독이나 ③오하마나호와 화객선을 복선으로 운항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세월호 단독 운항은 거의 없었다. 45억원의 영업 손실을 입더라도 위험한 세월호는 매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간부들은 사직서까지 작성했고, 김한식 사장이 대표로 유병언 회장을 만났다. 김 사장이 세월호 매각 의견을 보고하자 유 회장은 일축했다. “오하마나호가 더 낡았으니 먼저 팔아야지.” 결국 오하마나호가 먼저 매물시장에 나왔다. 신보식 선장은 검찰 조사에서 “(4월16일 침몰 사고는) 언젠가는 발생할 사고였다”고 말했다.

청해진해운의  해양사고


이준석  선장,  12년  전  4월 16일에도…


2002년 4월16일 오전 8시55분 고속훼리1호(3872t, 1981년 건조)는 서해안을 벗어나 남해안으로 진입했다. 전날 저녁 7시께 인천항을 떠난 여객선은 예정 항로를 따라 제주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추자도를 통과할 무렵 선장은 한국해운조합 제주항 운항관리실에 일일보고를 했다. 제주항에 비가 내리고 남서풍이 초속 13~18m로 불고 있다고 운항관리실이 알려줬다. 파고는 3~4m였다. 폭풍경보가 발효됐으니 선장이 판단해 안전운항을 하라고 덧붙였다.
제주항의 동·서 방파제 입구의 폭은 약 150m여서 선폭 20m인 고속훼리1호가 출입할 수 있었다. 다만 비슷한 선폭을 가진 선박이 양방향으로 함께 통과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바람이 셀 경우 여객선이 통항하기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 여객선의 운항관리규정도 파고 4m 이상, 초속 16m 이상의 풍속에서는 출항을 통제한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입항에 대한 통제 규정은 없었다. 제주항과 같은 출입구가 좁은 항구에 대해서도 그랬다. 선장은 다소 위험하지만 예인선 없이 입항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예인선은 제주항 인근에 있었다.
여객선이 동·서 방파제 중간 부분에 이르렀을 무렵 속도를 줄이려고 좌현기관을 정지했을 때 강한 돌풍과 비바람이 우현을 강타했다. 선체가 바람에 휩쓸렸고 10시40분께 제주항 동방파제 끝단에 선박의 좌현 추진기가 닿았다. 그 뒤 제주항 내로 진입했지만 바람은 계속됐다. 결국 선장은 예인선이 좌현 선미에서 밀도록 조치했지만 때늦었다. 여객선은 동방파제 안쪽 부두에 정박한 해경정에 가까이 접근해버렸다. 선장이 충돌의 위협을 느껴 우현 닻을 내렸지만 여객선과 경비정은 부딪쳤다. 방파제 접촉 사고로 여객선의 좌현 추진기가 망가졌고 경비정 접촉으로 두 선박이 일부 찌그러졌다. 선원 23명, 승객 43명이 탑승했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꼭 12년이 지나 고속훼리1호의 선장은 또다시 해양사고를 경험한다. 이번에는 침몰 사고였고 304명이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 이준석 선장은 12년 전 4월16일에도 해양사고를 냈던 것으로 이 확인했다. 운항 항로도 인천~제주였고, 선사도 청해진해운이었다. 해양안전심판원은 “선박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주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이 선장의 업무상 과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같은 항로(인천~제주)를 출입하면서 처음으로 사고를 일으킨 점을 고려”해 2급항해사 업무 정지 1개월을 견책으로 감면했다.
청해진해운은 해양안전심판원의 ‘단골손님’이었다. 감사원 감사결과보고서를 보면, 청해진해운 소속 여객선은 4대뿐인데도 지난 10년간 11건의 해양사고를 일으켰다. 특히 최근 3년간(2011~2013년) 5건의 크고 작은 사고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세월호의 쌍둥이 배로 불리는 오하마나호(6322t, 1989년 건조)도 2011년 4월과 2013년 2월 기관 고장 등으로 회항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기 20일 전인 2014년 3월28일에도 청해진해운 데모크라시호(396t, 1994년 건조)가 어선과 충돌했다. 선원 6명과 여객 142명을 태우고 오전 10시35분께 인천항을 떠나 백령도로 향하던 여객선은 안개 속에서도 최대속력(34노트)을 올리고 있었다. 출항시각(오전 8시)에서 2시간30분이나 늦었기 때문이다. 20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지만 음향신호 등 안전운항 조치는 없었다. 선장은 레이더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오전 11시33분께 갑자기 우현 선수 쪽에서 어선이 나타났다. 선장은 급히 주기관을 정지했지만 속도가 줄지 않았다. 충돌. 어선이 약 7노트로 속력을 낮추고 운항 중이라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우현 선수 쪽에 길이 약 5m의 파공이 발생했다.
특정 선사 소속 선박에서 이처럼 사고가 거듭되면 선사나 선주의 선박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거나 선박의 근본적 결함 등 해양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이 잠재돼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해양안전심판원은 청해진해운의 반복되는 사고의 원인이나 유형을 분석하지 않았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이후인 2014년 12월에야 해양사고 조사분석 시스템을 뒤늦게 구축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유병언 세모그룹 전 회장 관련 반론보도문
제1081호(2015년 10월5일치) 특집 ‘4월16일 이전 침몰하고 있었다’ 제하의 보도에서 청해진해운 김한식 사장이 사직서까지 작성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게 세월호 매각 의견을 보고했으나, 유 전 회장이 이를 일축해 결국 오하마나호가 먼저 매물 시장에 나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병언 전 회장 쪽은 청해진해운 김한식 사장은 당시 ‘오하마나호나 세월호 중 하나를 팔고 화객선을 구입하자는 의견’을 보고하여, 이에 유 전 회장이 ‘선령이 25년을 초과하는 오하마나호를 먼저 매각하라’고 지시했을 뿐, 세월호 매각 의견을 일축하거나 반대한 바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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