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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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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

삼성 ‘하루 최소 4시간·주 40시간 근무’ 자율출퇴근제 확대…
어디서나 업무 지시 받는 ‘로그아웃 없는’ 삶을 바꿀,
‘전자우편제한’ ‘모바일 메신저 제한’ 정책 필요해
등록 2014-06-26 15:11 수정 2020-05-03 04:27
삼성전자 직원들이 19일 저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삼성전자 직원들이 19일 저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삼성의 자율출퇴근제는 그동안 회사가 가지고 있던 근무시간에 대한 재량권인 ‘시간 주권’을 노동자와 나눈 것이다. ‘9 to 6’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해라가 아니라, 주 40시간을 네가 알아서 채우라는 방식이다. 노동자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면 노동시간 단축도 가능하다. 업무성과가 ‘양’이 아니라 ‘질’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자율출퇴근제가 도입되는 한편에선 반대로 퇴근의 개념도 무너지고 있다.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통해 회사 업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회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물러나는 것과 퇴근은 상관없게 됐다. ‘이제 잠시 꺼두셔도 됩니다’라는 오래된 휴대전화 광고처럼, 기업들이 지친 노동자를 위해 스마트폰을 끌 때가 오고 있다. _편집자


삼성그룹의 한 계열사에 다니는 손아무개씨는 자율출퇴근제가 만족스럽다. 손씨는 주말에 일이 생겨 고향집에 내려갈 때면 금요일 오전 4시간만 일하고 퇴근한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막히지도 않고 주말 시간을 여유 있게 쓸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손씨는 월·화·수·목요일 하루 9시간을 일하면 금요일에는 4시간만 일하고 퇴근할 수 있다.

삼성이 자율출퇴근제를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주 40시간을 채운다면 하루에 4시간 이상만 일해도 되는 ‘자율출퇴근제’ 대상을 7월부터 확대한다고 밝혔다. 연구·개발과 디자인 직군의 일부 인력만 대상으로 하던 것에서 전체 연구·개발, 디자인 인력으로 대상을 넓힌다. 삼성전자는 2012년에 이 제도를 처음 도입해 단계적으로 확대해왔다. 내년에는 소프트웨어와 경영지원, 품질관리 직군 등 전 부서에 도입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7·4 근무제’ 출근시간만 당겨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외국 시간대에 맞춰 일해야 하는 직원이나 남들과 다른 시간대에 일이 더 잘되는 직원이 있다. 이런 직원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해서 일하는 게 능률 면에서 낫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자율출퇴근제와 함께 아침 6시와 오후 1시 사이에 출근시간을 정할 수 있는 ‘자율출근제’도 시행하고 있다.

이 제도의 장점은 노동시간 단축과도 연결된다. 국내 기업의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출근시간보다 일찍 나오는 데 반해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문을 나서기는 쉽지 않다. 직장 상사들은 부하 직원이 사무실에 오래 앉아 있는 걸 성실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마다 퇴근을 독려하는 등의 정책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출근시간을 아예 바꾸는 것은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삼성그룹의 한 직원은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한 뒤 평균 30분 정도 근무시간이 줄었다”고 말했다. 출근은 늦어지고 퇴근은 빨라지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 도입 전에도 어차피 하루 9시간 일했다. 반차를 쓰는 것보다 자율출퇴근제는 필요할 때 4시간만 일하고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명절 전이나 애가 아플 때처럼 필요할 때 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그룹은 이전에 출퇴근 시간을 바꾸려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이건희 회장이 경영혁신책으로 내건 ‘7·4 근무제’는 2년 정도 지난 뒤 흐지부지됐다. 아침 7시에 빨리 출근한 뒤 오후 4시에 퇴근해 자기계발을 하자고 했지만, 출근시간만 당겼을 뿐 일찍 퇴근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타워스왓슨의 김기령 대표는 자율출퇴근제를 통해 출근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면 장시간 노동을 줄이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회사만 가지고 있던 ‘시간 (관리) 주권’을 직원들과 나눠 융통성 있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삼성은 장시간 노동이나 조직 문화가 안 맞아 나가는 직원들의 이직률이 높다. 세계적인 경쟁 기업에 유능한 직원을 뺏기지 않으려면 유연한 근무제도를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직장인과 구직자들이 취업하고 싶은 기업으로 즐겨 꼽는 제니퍼소프트는 자율출퇴근제도가 앞선 곳이다. 소프트웨어업체인 제니퍼소프트는 회사 창립 때부터 직원들이 알아서 시간을 정해 출근하게 했다. 주 35시간만 일하면 된다. 이 밖에도 이원영 제니퍼소프트 대표가 세워놓은 원칙은 특별하다. 지난해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제니퍼소프트에서 하지 말아야 할 33가지’를 보면 퇴근 관련 항목이 3가지가 있다. ‘근무 외 시간엔 가급적 전화하지 마요.’ ‘퇴근할 때 눈치 보지 마요.’ ‘퇴근 후 일하지 마요.’ 퇴근 뒤 삶을 철저히 보장하는 것이다.

김윤희 제니퍼소프트 차장은 “노동시간이 길면 생산성이 높지 않다.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일할 때 더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김 차장은 “삼성이 자율출퇴근제를 시행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 함께 일하는 협력사나 파트너들도 기업 문화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회사가 갖고 있는 ‘시간 주권’ 나누자

그러나 삼성전자 등의 움직임과 별개로 최근 국내 직장인들의 ‘시간 주권’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양상이다. 국내 한 대기업에서 일하는 정아무개 대리는 “자율출퇴근제 같은 게 팀 등 조직 단위로 이뤄져야 의미가 있는데, 요즘은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점점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으로 퇴근 뒤에도 일에 옭아매고 있으니 말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이른바 ‘스마트워크’라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볼 수 있게 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전자우편 확인뿐만 아니라 전자결재까지 가능한 기업이 늘었다. 여기에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해 시도 때도 없이 업무 지시를 받으면 시간 주권이란 없는 ‘디지털 노예’가 된다.

또 다른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아무개 대리는 최근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밤 12시에 전무님이 ‘어떤 사항을 왜 보고 안 했냐’라고 카톡을 보냈더라고요. 어차피 회사에 나가서 처리할 수밖에 없지만 그전에 잠들었으니 망정이지 밤에 그것을 봤다면 아마 밤새 뒤척였겠죠.” 김 대리는 부서마다 팀마다 카카오톡 방이 있다고 했다.

스마트폰 모바일 메신저가 직장인에게 준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모바일 메신저는 상대방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 예전 문자메시지처럼 못 봤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또 회사 컴퓨터를 ‘로그아웃’ 하더라도, 직원들은 항상 상사의 손(스마트폰)을 떠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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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업체에서 일하는 이아무개 대리는 “카카오톡 안에 그룹카톡방, 팀카톡방, 실카톡방이 있다”고 했다. 회사 조직 체계마다 모바일 메신저 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사가 나도 예전 소속 조직 카톡방에서 나가기 힘든데, 퇴근했다고 카톡 확인 안 하면 큰일 난다”고 했다.

한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김아무개씨도 “친구 중 한 명은 아예 카카오톡을 업무용으로 쓰고, 라인은 친구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퇴근 뒤에도 회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토로하는 직장인이 많다. 국내 전자업체에서 일하는 김아무개씨는 퇴근 뒤 친구를 만나러 갈 때나 주말에도 노트북을 들고 다닐 때가 많다. 고객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와서 업무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술 먹다가 스마트폰으로 전자우편을 확인하고는 근처 PC방에 가서 답을 보낸 적도 많아요.” 팀장은 외국 고객사에 출장을 가면 카톡으로 말을 건다. 모바일 메신저 창 안에서 퇴근은 무의미하다. “시차가 얼마 안 나면 좋은데, 시차가 커도 시도 때도 없이 카톡 알람이 울려요. 대답을 제때 안 하면 욕먹죠.”

프랑스 등 퇴근 뒤 업무 전자우편 발송 금지

대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이런 흐름이 커지고 있다. 최근 공공기관에선 ‘인터넷망 분리사업’으로 일반 인터넷과 사내용인 인트라넷을 분리하고 있다. 예전엔 보안상 회사 밖에서 확인할 수 없던 업무 전자우편을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공공기관 직원은 “‘퇴근 뒤에는 못해요’ 하는 말을 하기 힘들게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외국에선 이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고민해왔다. 최근 프랑스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는 저녁 6시 이후 업무 관련 전자우편을 보내는 것을 금지하는 협정을 체결했다고 이 보도한 바 있다. 전체 노동자가 아닌, 하루 최대 노동시간이 13시간을 초과하는 특정 정보통신 분야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협정이지만, 전자우편이 일과 휴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독일의 자동차회사인 폴크스바겐은 이미 이런 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2011년 저녁 6시15분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독일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업무 전자우편을 보내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아예 전자우편 서버를 차단하는 강력한 방식이다. 폴크스바겐은 퇴근 뒤 전자우편을 못 쓰게 하는 이유에 대해 “노동시간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에 답변했다. 폴크스바겐은 “일과 사생활의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은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고 에너지로 가득 차게 된다”고 설명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런 기업이 등장하고 있다. 업무강도가 높은 컨설팅업계의 보스턴컨설팅그룹도 직원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전자우편이 없는 저녁을 보장한다.

국내 기업도 ‘전자우편 제한’ 또는 ‘모바일 메신저 제한’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침 8~9시(출근) 전에는 모바일 메신저로 업무 지시를 하지 않는다 등의 논의가 우리 사회 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직원들이 고충이 많은데도 전자우편이나 모바일 메신저를 쓰는 것에 대해 일정한 한계가 없다”고 지적했다(상자 기사 참조). 전자우편 같은 경우는 팀장에 따라 달라지지 않도록 외국 사례처럼 기업이 나서서 제한할 필요도 있다.

퇴근 뒤 업무 전자우편 등을 확인하게 하는 건 생산성을 떨어뜨려 기업에도 손해다. 신동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잠깐잠깐 전자우편이나 모바일 메신저를 확인하는 것은 두뇌를 쉬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업무 내용을 확인한 뒤에는 그다음 액션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그것은 쉬는 게 아니라 업무의 연장이죠.” 신 교수는 “외국에서는 이미 퇴근 뒤 늦게까지 전자우편을 체크하게 하는 것이 다음날 업무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며 “전자우편이나 모바일 메신저 같은 많은 채널을 단일화해 응급상황 때 받는 채널을 하나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로그아웃’이 ‘퇴근’이 되는 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통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자유’는 어디서나 업무 지시를 받을 수 있다는 ‘속박’의 다른 말이다. 특히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진 한국 사회에서 스마트폰의 존재는 직원들을 퇴근 뒤에도 기업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퇴근시간을 강제하는 게 무의미해지고 ‘로그아웃’이 ‘퇴근’이 되는 때다.

김기령 타워스왓슨 대표는 “공부 오래 한다고 공부 잘하는 것 아니지 않느냐. 퇴근 뒤에도 회사 전자우편 열어보고 모바일 메신저에 답하게 만드는 것은 직원들의 스트레스 지수만 높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제는 팀장이나 임원이 업무시간 이후에는 전자우편이나 모바일 메시지를 보내지 않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게 진짜 퇴근이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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