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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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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 안전 이제 출발선에 섰다

세월호 참사 계기로 뒤늦게 위험성 가장 높은 원전사고 대비 방안 논의…
최악의 상황 대비한 방사능 방재 필요해
등록 2014-05-30 06:25 수정 2020-05-02 19:27
세월호 참사의 상처로 안전을 향한 사회적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특히 대도시를 포함해 좁은 국토 안에 모두 23기의 핵발전소를 끼고 사는 탓에 방사능 사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뜨겁다. 지난 5월2일 국회에서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방재대책법’(이하 원자력방호·방재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사실상 핵발전소의 안전에 대해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시작됐다. 이에 은 전문가들과 함께 방사능 방재를 둘러싼 쟁점을 살펴봤다. 원자력방호·방재법의 한계, 그리고 한국판 후타바 병원 사태가 생길 가능성 등 현실적인 방재 대책에 접근하기 위한 고민들을 소개한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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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시험서 위조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개인의 사욕과 바꾼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지난해 6월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수백 명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과 승무원의 무책임한 행동은 사실상 살인행위다.”(지난 5월19일 대국민 담화문)

참사의 후폭풍이 거세다. 비리와 무책임이 불러온 사고를 향해 박근혜 대통령은 어김없이 거센 포문을 열었다. 세월호 참사 한 달 뒤에 내놓은 대국민 담화문 발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국민 담화를 끝낸 박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향한 곳은 아이러니하게 국내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가장 시급하게 보완이 필요하다고 손꼽히는 핵발전소였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말한 지 불과 하루 남짓 지난 시점에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시내에서 서쪽으로 270km 떨어진 바라카 핵발전소 1호기 건설 현장을 찾은 박 대통령의 행보를 두고 비판이 일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5월21일 특별성명을 내어 “(박 대통령의 원전 외교 활동을 보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안전사회로 가겠다는 의지가 진정으로 있는 것인지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한다. 지금은 원전 수출이 중요한 때가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후 위험성이 가장 높은 재난으로 여겨지는 원전 사고의 위험을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담화문 발표하고 원전 외교행

이처럼 핵발전소 사고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기시감’ 탓이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4월16일,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그동안 정기검사를 받기 위해 멈춰 있던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 핵발전소 1호기의 재가동 승인을 발표했다. 건조 20년을 넘긴 세월호가 여객선 선령 제한 완화에 따라 30년으로 수명을 늘린 것처럼, 고리 1호기는 애초 정해진 설계 수명(30년)에서 10년을 더 늘려 운영 중이다. 국내 핵발전소 23기 가운데 설계 수명을 늘린 건 고리 1호기와 경북 경주의 월성 1호기 2곳이다. 수명 연장의 가장 큰 이유는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이었다. 게다가 세월호가 안전 관리 부분에서 해양수산부·한국해운조합 등과의 유착 관계가 드러났듯이, 핵발전소 운영에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납품업체·감독기관 사이에 비리의 전력이 있다.

그런 탓에 세월호 참사의 교훈은 최근 국회·시민사회에서 방사능 방재 대책의 밑그림을 그리자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선 세월호 참사 보름 만인 지난 5월2일 원자력방호·방재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개정안에는 핵발전소 등의 방사능 사고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자 ‘방사선비상계획구역’(핵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벌어질 경우, 그 피해를 감안해 대피시설과 방호물품 등 주민 보호를 위한 준비를 해두는 구역)을 확대하고, 구역 설정을 좀더 구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존에 핵발전소 반경 8~10km로 정해둔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최대 30km까지 확대하고, 이 안에는 핵발전소 반경 3~5km에 ‘예방적 보호조치구역’(PAZ)과 핵발전소 반경 20~30km에 긴급보호조치계획구역(UPZ)을 두는 것이다. PAZ에서는 방사능 재난(핵사고)이 발생하면 주민을 대피시키는 등의 ‘예방적 보호조치’를 실시하게 되고, UPZ 안에서는 방사능 영향평가나 환경감시를 진행해 주민의 구호와 대피 등 ‘긴급보호 조치’를 실시하게 된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과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첫 발의를 한 이후 엎치락뒤치락하며 2년 넘게 끌어온 법안이었다. 앞서 지난 3월 박 대통령은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을 앞두고 개정안 통과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개정안에는 방사선비상계획구역에 대한 시행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핵테러와 핵물질 및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방사능 방재 특수성 안중에 있나

사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방사능 방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방사능 관련 비상 대책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건, 1999년 9월 일본 도카이무라 핵연료주식회사(JCO)의 핵연료 가공공장 직원들의 피폭 사고 이후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벌어진 이후에는 원안위가 출범하면서 ‘국가방사능방재계획’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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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를 감안해 세월호 참사 이후 기존 매뉴얼도 다시 점검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방사능 방재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을 확대하거나 기존 법 체계를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재난 대응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우선, 방사능 방재 업무를 총괄하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기관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 꼽힌다. 현행 법률 체계에서는 핵사고가 발생하면 방사능 재난의 특수성을 감안해 원안위가 맡는 ‘중앙방사능방재대책본부’로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도록 돼 있다. 다른 재난의 경우, 안전행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중앙사고수습본부(대응 주관 부처)로 지휘체계를 나누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장 위험한 재난으로 여겨지는 원전 사고. 최근에야 핵발전소 안전에 대한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교훈 삼아, 국회·시민사회에서는 방사능 방재 대책의 밑그림을 그리자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이후 박 대통령이 내놓은 수습안에는 새로 만드는 국가안전처를 중심으로 한 재난 업무의 통합을 언급하고 있어, 방사능 방재의 특수성이 보장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19일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앞으로 출범하는 국가안전처에 소방본부와 해양안전본부, 특수재난본부 등 3개 본부를 설치해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본뜬 형식으로 중앙정부가 각종 재난·재해를 책임지고 각 주정부에 실무를 맡기는 것이다. 특히 박 대통령이 “각 부처에서 주관해온 항공·에너지·화학·통신인프라 재난을 모두 국가안전처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그동안 원안위가 해오던 방재 업무를 국가안전처로 이관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원전 지원금 중 방재 예산 사용 2.6%에 불과

각 지방자치단체에 방사능 방재 계획을 맡기는 방식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방사선비상계획구역 확대에 맞춰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의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방재 관련 인프라를 확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핵발전소와 인접한 지자체는 내년 5월까지 비상계획구역을 확대해야 하지만, 개정안에는 구역 확대에 따라 수요가 늘어나게 될 방진마스크와 방호의류, 사고 발생 뒤 곧바로 몸속에 침투한 방사선의 해독에 써야 하는 갑상선 방호약품, 방사선 감시측정기구 등 구호물품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서토덕 환경과 자치연구소 기획실장이 지난해 발표한 ‘고리원전안전 및 방재대책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08~2012년 고리 핵발전소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지급하는 ‘원전 지원금’ 5077억원 가운데 방사능 방재 예산으로 쓰인 금액은 2.6% 수준인 133억원이었다. 또 사고가 발생하면 방재 계획을 세우고 주민 대피 등을 담당하는 핵발전소 부근 지자체 방재 전담 인력도 부산(9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1~2명에 그치고 이들마저 민방위·화생방 관련 업무를 함께 담당하고 있다.

민관 합동 시스템, 상설 방재기구 마련을

따라서 방사능 방재와 관련한 대책을 민관이 함께 백지상태에서부터 하나씩 점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혜정 원안위 비상임위원은 “현재 우리나라의 방사능 관련 대책의 역사가 일천하다는 가정 아래 작업을 해야 한다. 국가기관인 원안위뿐만 아니라 한수원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시민 모두가 제 역할을 하는 구조를 만드는 콘텐츠를 채워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일본 후쿠시마 사고와 같이 원자로 여러 곳에서 이상이 발견되는 경우, 그리고 핵발전소가 밀집한 대도시와 산업단지 등에서 사고가 일어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등을 상정해 현장에 맞는 현실적인 대책을 주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대피 지역 바깥의 사람들도 대피를 시작하는 이른바 ‘그림자 대피’(Shadow Evacuation)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혼잡 등으로 더 큰 피해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방사능 방재 대책이 평소에 잘돼 있어야 한다. 대피 시간, 대피 수송로, 자발적 대피자는 얼마나 될지 등을 짜는 게 현실적인 전략이다.” 지난 5월21일 김제남 정의당 의원의 주관으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방사선비상계획구역의 실효성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한 이세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비상대책단장은 “이번에 개정된 원자력방호·방재법에 따라 주민 보호 조치의 실효성을 담보하려면 단순한 구역의 재설정에 그치지 않고, 방재체계 전반에 대한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를 통해 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 개편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 사이에 깊이 있고 다양한 의견 교류가 필수적이고, 전문기관에서 기술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서는 핵발전소의 안전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원안위 외에도 원전 안전을 강화할 수 있는 민관 합동 방재 시스템을 만들거나 상설 방재 전담 기구를 신설하기 위한 법적 제도를 마련하자는 의견도 있다. 계속 운전을 이어가려 하는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 등의 가동 중단에 대한 구체적인 원칙과 절차를 담은 ‘노후원전 폐로추진 절차법’에 대한 주장도 나온다.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새기기 위한 방사능 방재 논의가 출발선에 섰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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