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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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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꾼다 국적 없는 자유를

“남도 북도 아니다, 일본인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국민됨’의 굴레와 싸우는 재일한국인 고강호의 1인 투쟁
등록 2014-03-28 05:41 수정 2020-05-02 19:27

“러시아 시민권(국적)을 포기하고 체코로 귀화했다. 체코 여권으로 약 160개국을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데, 미국이 해외금융계좌납세순응법(FATCA·외국에서 살더라도 재산 신고를 빠뜨릴 경우 연간 계좌 잔고 금액의 절반까지 벌금으로 물릴 수 있음)을 도입하면서 세금 부담이 우려됐다.”
“영국·터키 복수국적자다. 터키 정부는 병역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6천파운드(약 1068만원)를 내라고 요구했다. 영국에서 13년 동안 살면서 결혼도 했고, 38살이나 됐다. 군 입대를 원하지 않았고, 돈 낼 여유도 없어 몇 달 전 터키 국적을 포기했다.”
2013년 10월 영국 공영방송 가 소개한 사연들이다.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국적을 포기하거나, 변경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2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약 3천 명 가운데 120명은 자신이 태어난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의 대표로 활약했다. 러시아로 귀화한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안현수도 그중 한 명이다. 지난해 유엔 자료에 따르면, 세계 인구 3.2%에 해당하는 2억3200만 명이 태어난 국가를 떠나 외국에서 살고 있다. 거주국과 국적이 분리된 영주권자, 복수국적자 증가는 ‘국민국가(State)’ 경계를 약화한다.
제1차 세계대전 뒤 1919년에 성립된 베르사유 체제는 일정한 지역에서 정부·군대·경찰 등으로 구성된 정치적 기구인 ‘국민국가’를 세계 질서의 기본 단위로 선언했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선 국가에 소속돼 있어야 한다. 나라 잃은 식민지 주민들은 서러웠다. 조선인들이 독립국가를 염원했던 까닭이다. 전쟁과 빈곤 시대를 거치며 강력한 국가권력이 개인의 안위를 지켜주리라 여겼다. 2004년 저서 를 통해 ‘국민’ 중심적 사고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는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가 다소 약해졌다고 평가한다.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 기득권이 내세우는 ‘국익’이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설문조사 전문기관 ‘두잇서베이’는 지난 2월5일부터 일주일 동안 10대 이상 5014명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겠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응답자의 56.9%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러한 선택의 이유로는 과도한 경쟁(61.1%), 치열한 입시(46.1%), 스펙 쌓기(41.4%) 등이 꼽혔다. 2012년 한국 국적을 포기한 사람은 1만8천여 명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대한민국에서 탈출할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는 경제적 능력이 있거나, 안현수 같은 ‘우수 인재’만을 환영한다. 가난한 이주민들은, 또 다른 국가에서 정착하기 위해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여느 국가에 소속된 국민이 아닌, 이웃과 공존하는 ‘개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여기, 이러한 삶을 꿈꾼 한국인이 있다. 그는 2011년 법무부에 한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신고했다. 다른 나라 국적은 없는 상태였다. 법무부가 신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서울행정법원에 이러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낸다. 무국적자가 될 자유를 주장한 국내 첫 소송이다. 은 당시 소송 기록을 입수해, 청구 당사자를 수개월 동안 수소문했다. 지난 2월, 일본 교토에서 그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_편집자
열두 살 소년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다.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부친의 사망신고를 하러 간 열두 살 소년은 뜻밖의 사실과 마주한다. 자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혼인, 소년의 출생을 증명해주는 서류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년의 뿌리는 어디인가. 100여 년 전, 조부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일자리를 찾아 간도·연해주·사할린을 거쳐 일본 홋카이도로 향했다. 긴 여정 끝에 정착한 일본 시마네현에서 90여 년 전 아버지가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아주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 신민이었다. 패전 뒤 일본은 자국 영토에서 살던 조선인·대만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한다. 아버지는 외국인 등록 서류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적었다. 그사이 한반도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졌다. 1965년 한국의 군사정권은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소년이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서류 국적란에 ‘대한민국’을 써넣었다.

아들을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키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두 해가 걸려 서류를 정리했다. ‘고·강·호.’ 부친 호적에 소년의 이름 석 자가 올랐다. 대한민국 국적이 주어졌다. 원하지 않던 변화였다. 일본 국민이 되길 원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으로 귀화하겠다는 가족을 말린 건 소년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터를 잡은 한국인이 그렇듯,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정체성은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국적이란, 그저 ‘기호’ 같은 것이다.

쉰넷. 중년이 된 소년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품어온 생각을 꺼내들기로 했다. 어머니가 타계한 뒤였다. 2011년 고강호는 법무부에 국적이탈 신고서를 냈다. 한국 국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모두 내놓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적법에 따르면, 복수국적자나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 무국적자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강호는 일본에서 특별영주자격*으로 살고 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 어느 국가의 국민도 아닌 셈이다. 사내는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울행정법원에 국적이탈신고 반려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복수국적자에게만 국적이탈을 허용하는 건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었다. 판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소송이었다. 2012년 3월, 1심 법원은 그의 청구를 기각했다. 국적을 가질 권리는 있지만, 무국적자가 될 권리는 없다고 보았다. 항소심에서도 결론은 같았다. 소송 대리인인 이석태 변호사는 “각국에서 국적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을 다양하게 인정하고 있는 지금,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국적이탈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상고했다. 2001년 발효된 유럽국제협약에 따르면 ‘외국에 상시 거주하는 국민과 국가 사이에 진정한 유대 관계가 결여된 경우’ 국적을 버릴 수 있다. 강호와 비슷한 경우다. 2012년 말,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한다. 패소가 확정됐다. “법은 그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소송에서 이길 거란 기대는 낮았다.” 그렇다면 굳이 왜? 대한민국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한국이 재일조선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현재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어떤 통일국가를 꿈꾸는지.

남북 두 정권 모두 재일조선인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최근 일입니다. 오랫동안 기민(棄民) 정책을 취해온 사실을 생각하면, 재일조선인은 어느 한쪽 체제에 귀속할 이유는 없습니다.(고강호 진술서 중)사는 곳,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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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천년고도 교토 한복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머물렀다는 세계문화유산 니조성(二條城) 주위 골목길 곳곳엔 전통가옥이 남아 있다. ‘고강호·리미오’ 문패가 걸린 집도 90여 년 전에 지어졌다. 지난 2월11일, 나무살로 만들어진 대문을 열었다. ‘드르륵’ 옆으로 미는 문이다. 폭 2m가량의 문턱을 넘어 들어가니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3층 높이의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천장 꼭대기 네모난 구멍을 통해 쏟아진 햇볕은 부엌 세간살이를 비추고 있다. 된장, 녹차, 紅花(홍화)…. 냉장고와 싱크대 벽엔 한국어와 일본어, 한자 단어가 적힌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부엌 왼편에 있는 문턱을 올라 또다시 문을 열었다. 식탁 바로 옆 책꽂이엔 고 박경리 작가의 전집이 자리잡고 있다. 익숙지 않은 공간엔 익숙한 것들이 숨 쉬고 있다.

“어서 오세요.” 높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린다. 강호의 아내 리미오(55)였다. 호흡기 전문의인 미오는 효고현 고베에 위치한 병원에서 말기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이날은 공휴일이었다. 초대 일왕 ‘진무천황’ 즉위를 기념한 ‘일본 건국기념의 날’이라고 했다. 고 히로히토 일왕 생일인 ‘쇼와의 날’, 현 아키히토 일왕 생일인 ‘천황탄생일’도 공휴일이다. 시가현 오쓰시에서 20여 년간 치과의원을 운영해온 강호는 천황제 관련 공휴일엔 진료를 쉬지 않았다.

동그란 얼굴, 사람 좋은 웃음. 직업마저 같은 부부는 오누이처럼 닮았다. 10여 년 전, 치아 치료를 잘못 받아 얼굴이 퉁퉁 부었던 미오는 지인의 소개로 강호의 병원을 찾았다. 치료는 잘했지만 돈벌이 수완이 좋지 않은 의사가 있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임플란트 같은 비싼 치료를 권하지 않는다. 동포들에겐 치료비를 받지 않았고, 직접 기른 채소를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만난 지 석 달 만인 2000년 초하루,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일본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과 외국인의 결혼이었다.

아내 리미오

강호는 조선말을 거의 할 줄 모른다. 생전의 아버지는 아들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가 운영하는 조선학교에 보낼 마음이 없었다. 조선식 이름을 지닌 소년은 일본인 친구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책과 신문만을 파고들었다. 조부의 나라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1976년 배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대에 진학했다. 졸업 뒤 한국 조선소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느라 대학 입학 뒤 6년 동안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강호는 치의대로 진로를 바꾸었다.


2011년 고강호는 법무부에 국적이탈 신고서를 냈다. 한국 국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모두 내놓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적법에 따르면, 복수국적자나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


미오는 조선말을 잘한다. 조선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주에서 건너온 조선인,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여자는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 외조부의 고집에 맞서 가출을 감행할 만큼, 어머니는 당찬 여성이었다. 도쿄에서 유학하던 오빠 집에 머물며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지인의 집 마당에서 개집과 다름없는 허름한 판잣집을 보았다. 그 안에 가난한 조선인 청년이 살고 있었다. 미오의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외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다. 조국이 달랐던 부모는 첫아이에겐 일본 국적을, 둘째아이에겐 조선 국적을 주기로 한다. 둘째딸 미오는 그렇게 ‘조선’ 국적을 갖게 됐다. 자존심 강하고 똑 부러졌던 소녀는, 언젠가 일본을 떠나 살고 싶었다. 나고 자란 이 땅을 떠나면 자유로워지리라. 그렇게 상상했다. 하루빨리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일본 밖에서 할 수 있는 일. 더구나 남을 도울 수 있는 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조선 국적

조선은 세상에 없는 국가다. 미오에겐 여권이 없다. 여권이 없는 사람이 국경을 넘나드는 건 힘겹다. 여권 대신 일본 법무성이 ‘재입국’을 허가한 증명서가 출입국에 필요한 신분증 구실을 한다. 국외 여행을 하려면 두세 달의 서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영국을 방문했다. 아일랜드엔 끝내 가지 못했다. 한국에 가는 것도 어렵다. 한국 정부가 발행한 임시여권 ‘여행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에야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제주 땅에 묻힌 아버지 묘소를 찾아가겠다는 바람이 받아들여졌다. 1991년 눈을 감은 부친의 유해는 4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슬 퍼런 군사정부 시절, 제주에 살던 친척들은 미오네와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쫓겨났다고는 하나, 아버지는 한때 총련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미오는 지인과 함께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토지문학관을 찾았다. 여행길에 들어간 식당 TV에선 밴쿠버 올림픽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김연아의 연기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이다. 김연아가 다시 한번 올림픽 무대에 도전하는 동안, 미오의 한국 입국길은 막혔다. 두 차례 영사관을 찾아 수속을 밟았지만 헛수고였다. “영사관 직원이 ‘열 번 정도 가셨으니 한국이 아주 좋은 나라인 걸 이해하셨으면 국적을 바꾸시면 어때요? 한 번만 수속하면 매번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잖아요’라고 했어요. 나는 ‘한국에 갈 수만 있다면 스무 번, 서른 번도 영사관에 오겠습니다’라고 말해주었어요.” 조선 국적자 3만여 명이 겪는 고통이다. 강호는 이러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 국적을 버리겠다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같은 동포로서 존중해야 할 무국적 상태의 동포(조선적)를 적국 국민으로 취급하는 한국 정부의 헌법 위반 행위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고강호 진술서 중) 위험한 국민

2011년 가을, 강원도 춘천 마라톤대회장이 술렁거렸다. 가슴에 인공기를 단 새빨간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긴 흰머리를 묶은 사내는 어딘가 수상쩍었다. 강호였다. 인터넷을 통해 구매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통일’을 말하면서도, 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깨보려 한 도발이었다. 한국 내 지인들은 강호의 행동에 그저 가슴을 졸인다.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낸 뒤, 조부가 나고 자란 창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마라톤대회에 나가고 있다. 5시간이 걸려 42.195km를 간신히 완주한다. “법원이 국적이탈을 허용하면,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바람, 냄새,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고 싶었다.”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은 주변으로부터 거부 반응에 부딪혔다. 요즘엔 직접 디자인해 만든 유니폼을 입는다. 등 쪽엔 한반도가 그려져 있다. 장인의 고향인 제주가 유독 도드라진다. 3·8선 자리엔 ‘조선인민공화국’ 여섯 글자가 물결을 친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북한 국호가 아니다. 몽양 여운형이 해방 직후 선포한 국가 이름이다. 좌우를 넘나들며 독립된 통일정부를 꿈꿨던 몽양은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 좌익으로부터는 ‘회색분자’로 매도당했다.

내면의 자유를 지킬 수 없게 하는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을 부당하게 제약하는 법률입니다.(고강호 진술서 중)

재일조선인 사회엔 남북을 가르는 물리적 경계선이 없다. 남북 두 국가로부터 종종 ‘위험 국민’으로 간주되는 건 그 때문이다. 강호의 통역을 도와준 이종수(56)도 그랬다. 식민지 출신자 후손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강호·미오와 10년 넘게 막역하게 지내온 친구다. 대한민국 국적자인 그는 1980년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갔다가 간첩죄 누명을 썼다. 1982년 국군보안사령부는 종수를 연행해 39일 동안 불법으로 가둬놓고 고문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는 끝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인정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특별사면으로 석방될 때까지 6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감옥을 나와서도 계속됐다. 국경을 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종수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전주교도소에서 나왔는데 여권도 없고 영주 자격도 박탈당하고, 돌아갈 수가 있어야지. 일본에 있던 부모가 민단을 통해 나를 초청하는 방식으로 3개월간 일본 체류 자격을 받았어. 일본대사관으로부터 입국 허가를 받는 데 6개월이나 걸리는 통에 서울 여관방에서 장기 투숙을 했지. 어느 날 명동 거리를 왔다갔다 하는데 군인 셋이 날 불러.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가석방증을 보여줬어. 군인들이 그걸 보더니, 고생 많으셨다며 경례를 하네. 겨우 임시여권을 받아 비행기를 타러 김포공항에 갔어. 출국 심사관이 군대 다녀왔냐고 묻더라고. ‘미안한데요, 아저씨. 저는 군대 안 가도 되는 사람이에요.’ 가석방증을 내밀었어. 그런데 범죄 경력이 있으면 출국이 안 된다는 거야. ‘전과자는 전과자인데 저는 재일동포인데요’ 그랬더니, 증명을 해보라는 거야. 15분 뒤면 비행기가 뜨는데 미치겠더라고. 마침 갖고 있던 호적 등본에 ‘교토 출생’이라고 쓰여 있지 않았으면 비행기 못 탔지.” 블랙코미디 같은 이야기에 부부는 배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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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강오·미오와 달리 특별영주자가 아니다. 옥살이를 하느라, 재입국 허가 기간 내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주 자격도 취소됐다. 2010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됐다. 누명이 풀렸지만 일반 영주 자격으로 살고 있다. 징역 1년형을 받을 경우, 쫓겨날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체류권이다. 일명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은 대개 같은 처지다. 이들의 국가인 한국도 이들의 고향인 일본도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국민도 아닌 외국인도 아닌

2월12일 오전, 교토지방법원에선 강호의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2010년 그는 일본 시가현 치과협회 등을 상대로 회원 자격이 있음을 확인해달라는 민사소송을 냈다. 2011년 4월 오쓰시는 관내 치과의원을 대상으로 시가 지원하는 검진 설명회를 열었다. 담당 공무원은 검진 대상자에 대해 ‘주민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안내했다. 강호가 수차례 물었다. “외국인에겐 주민표가 없다. 외국인은 검진 대상이 아니냐?” 담당 공무원은 ‘그렇다’고 답했다. 의사회 임원도 ‘주민표가 없다면 시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강호는 이러한 발언이 ‘외국인 차별’이라고 항의하며 오쓰시 치과협회에서 탈퇴했다. 그 뒤 오쓰시에서는 외국인도 ‘검진 대상자’라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 치과협회와 시가현 치과협회는 강호의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 강호가 탈퇴한 오쓰시 치과협회는 이들 단체의 지부라는 이유였다. 소송 대리인인 김봉식 변호사는 “시가현 치과협회 정관에는 오쓰시 치과협회가 지부라는 내용이 없다. 정관을 위반해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국민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국민처럼 세금을 낸다. 국민과 외국인 사이의 어떤 존재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무던히도 싸워왔다. 강호는 일본 국경을 넘을 때마다 출입국관리소와 실랑이를 한다.


일본 국민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국민처럼 세금을 낸다. 국민과 외국인 사이의 어떤 존재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무던히도 싸워왔다. 강호는 일본 국경을 넘을 때마다 출입국관리소와 실랑이를 한다. 외국인 등록을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재입국 허가를 받으려면 외국인 등록번호를 적어내야 한다. 특별영주자격 증명서는 7년마다 갱신이 필요하지만, 30년 동안 갱신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러한 체류 자격을 가져야 하는가.’ 특별영주자격을 반납하겠다고도 했었다.

강호는 차별에 반대한다.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사회를 꿈꾼다. 강호와 미오는 2002년부터 꼬박 12년간 사재를 털어 북에 의약품을 보내고 있다. 한때 빚까지 질 정도였다. 이러한 활동이 알려지자, 의약품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단체들이 생겼다. 부부는 정중히 사양했다. “도움을 주겠다면, 약값을 싸게 해달라.” 부부는 총련에도, 민단에도 소속돼 있지 않다. 어떠한 조직과도 거리를 두는 편이다. 강호가 생각하기에 남북 모두,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남북 통치체제는 서로를 공격하고 비교하면서 이뤄진 사회이기 때문에 일그러져 있다. 하나의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 폐쇄 사회인 이북이 돌멩이라면, 이남 사회는 좀더 큰 돌멩이다. 본질은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는 정신적으로 풍요롭다고 보기 힘들다. 두 국가 모두 조국이라고 하기 어렵다.”

차별과 편견이 없는 사회, 사람들이 가난해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할 수 없고, 대한민국을 지지할 수도 없습니다.(고강호 진술서 중)강호의 나라

한국 국민으로 살지 않겠다. 북쪽 체제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일본인이 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강호의 나라는 어디인가.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지구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나와 관련된 국가가 내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다. 내 개인의 운동이다.” 미오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강호를 이렇게 평가한다. ‘정말 원칙적인 사람.’ 열두 살 소년은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쳤을 터다.

미오는 아버지가 쉬고 있는 제주에 자주 가고 싶다. 한국에 오갈 수 있었던 10여 년은 마치 꿈같았다. 그때 가까워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고 싶다. 어머니의 나라 일본 쪽으로 국적 변경을 고민하기도 한다. 조선인은 남북을 모두 갈 수 없지만, 일본인은 남북을 모두 갈 수 있다. 종수는 강호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문제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한국 국민으로 살고 싶다. 한국에 가면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안도감이 차오른다. 일본이든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다.

2월15일 토요일 새벽. 강호가 거실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참여할 참이다. 이번 마라톤 코스엔 미군기지가 포함돼 있다. 모자를 챙겨 쓰는 그의 머리 위로 액자가 보인다. 신영복 선생의 서체였다.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거워라.’ 종수처럼 한국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들이 고초를 겪고 있을 때 이들을 돕기 위해 산 작품이라고 했다. 배낭을 멘 강호가 대문을 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어둠만이 무겁게 내려앉은 거리 속으로, 그의 뒷모습이 사라져갔다.

교토(일본)=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특별영주자격 1945년 이전부터 계속 일본에 거주하는 옛 식민지 출신자(조선인·대만인 등)와 그 자손에게 주어진 체류 자격. 해방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230만 명에 달함.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로 일본 국적 보유자였던 이들은 외국인이 돼 차별과 추방 위협에 직면.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체결로 한국 국적을 지닌 재일조선인에게만 ‘협정영주권’ 인정. 1982년 초등교육·국민연금·아동부양수당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특별영주제 도입. 1991년 조선 국적자에게도 특별영주권 허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1970~80년대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는 학업이나 취업을 이유로 한국에 건너온 재일동포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집중 수사. 그 결과 100여 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부분의 혐의 내용이 가혹행위를 통해 조작되거나 과장된 것이라는 평가를 받음. 상대적으로 이념 논리에서 자유로운 일본에서 자라난 재일동포 2·3세는 총련 사람과 접촉했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림.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이는 이종수씨를 비롯해 10명가량이며, 현재 30여 건의 재심 재판이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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