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오래된 신화다.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100년이나 이어진 일이다. 연애 신화는 결혼뿐 아니라 성애 자체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하지만 결혼과 성애에 대한 논의가 확장돼온 것과는 반대로 연애의 각본은 오히려 신화로 견고해지는 듯 보인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초식남, 건어물녀, 이말삼초…</font></font>요즘 20대들에게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시간, 돈 혹은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답을 자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강화된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시장중심성을 강조했다. 자유의 가면을 쓴 경쟁은 치열해졌고, 자기계발에 내몰린 이들은 시간이 적어졌다. ‘할 일이 많아서’라는 이유는 그래서 정말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연애를 안 하는 사람이나 연애를 하는 사람이나 모두 공평하게 이해받을까? 짐작과 달리 그렇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연애는 경험, 나아가 스펙과 자원으로까지 여겨지기 시작했다. 연애는 무리를 해서라도 이뤄야 할 과업이 되고, 이것을 하지 못한 자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는 현실이다. 으레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는 시선을 받는다. 이런 연애 신화는 연애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안 생겨요’, 초식남, 건어물녀, 이말삼초. 모두 연애라는 정상 상태를 가정한 말들이다. 심지어 ‘연애에 서투른데 연애학원에 다녀야 할까’ 같은 고민도 나온다.
한 여대생은 실제 3학년 초에 취업 압박이 커지면서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선배 하나가 “2학년 때까지 노력해도 남은 스펙도 없는데 연애라도 해야지”라고 말한 게 도화선이 됐다. 토익 점수며 대외 활동을 준비한다고 2년 내내 종종거리며 쫓아다녔지만, 토익 성적은 800점이 안 됐다. 내놓을 결과물이 없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듯 느껴졌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중·장년층까지 확산된 연애의 환상</font></font>2학년 말에서 3학년 초에 남자친구가 없으면 졸업할 때까지 연애를 할 수 없다는 ‘이말삼초’란 말이 새삼 무섭게 들렸다. 친구들이 하나둘 연애를 시작하면서 ‘또래집단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은 심해져갔다. 결국 평소에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소개팅을 통해 남자친구를 만들었다. 첫눈에 반했다거나 사랑이 있다기보다는,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느낌상 그것은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적당한 호감으로 시작해 만나다보면 사랑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서서히 빗나가면서 불거졌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는 신경 쓸 일이 많아지면서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친구를 만나기 귀찮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일부러 약속을 잡아 남자친구를 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빈 시간에 어학원에 등록해 남자친구와 보낼 시간을 스케줄에서 빼버리는 일도 있었다. ‘권태기가 빨리 찾아온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이 여대생은 “권태기가 올 만큼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연애를 왜 안 하느냐’는 말을 듣지 않게 되자, 이제는 연애 과제를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결국 쫓기듯 시작한 연애는 얼마 가지 않아 종지부를 찍었다.
졸업하는 순간까지 ‘안 생겨요’라는 말에 시달린 남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학 생활과 연애에 대한 로망을 품고 삼수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어영부영 새내기 시절이 지나가버리고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도 애인은 생기지 않았다. 복학하고 나서도 한동안 애인이 생기지 않자 연애는 완수해야 할 과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들 하는 연애를 못하고 있으니 매력 없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도 속상했다. 상담해준답시고 자신의 단점을 자연스럽게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 스타일을 바꿔보라거나 자신이 너무 가르치려 든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학과 행사를 가면 자신의 연애 이야기가 자주 화두에 올랐고, 심심찮게 ‘마법사’라는 놀림까지 감수해야 했다. 마법사란 싱글 생활을 오래 하면 초자연적인 힘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였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7살 연하의 여자친구를 사귀는 데 성공했다. 주위에서 도둑놈이라는 ‘칭찬’도 들었다. 마치 연애게임에서 9회말 역전 홈런을 친 타자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뭇한 마음에 주변에 일부러 전화해 연애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그제야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 이야기들이 쑥 들어갔고, 연애를 하면 이런 점이 좋다는 식의 듣기 싫은 설교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자신이 어딘가 모자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사라져서 ‘불치병 오진 판정’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연애의 ‘압박’에 쫓기는 것은 그만큼 ‘연애’라는 단어가 주는 행복한 환상이 고조돼 있기 때문이다. 매체는 이런 환상을 강화한다. 요새는 젊은이들에게만 요구됐던 사랑과 연애의 환상이 중·장년층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혼이나 사별로 홀로 된 유명인을 가상으로 결혼시키는 (JTBC)가 대표적인 예다. (MBC)의 콘셉트를 재혼에 적용해 타깃층을 바꾼 이 예능 프로는 종합편성채널이지만 3%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방송은 연애를 남녀는 물론 세대 구분도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로 확산시키고 있다. 여기에 나온 임현식은 산업폐기물 같은 맛을 내는 아침 식사일지라도 박원숙 앞에서는 맛있게 먹으며 환상적인 아침을 연다. 생각해보면 ‘가상 결혼’이라는 포맷은 정말 어색한 형식이다. 현실에선 그렇게 결혼의 현실성과 일상성에 대해 성토하면서 그런 일상성은 완전히 배제한 채 연애의 달콤한 환상만 미션처럼 해치워나가기 때문이다.
최근엔 ‘썸’이라는 단어도 생겼다. 연애를 계산 영역으로 끌어들인 20대들은 연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 시간을 세분화해 ‘썸’이란 말로 부른다. 썸은 이성이 시간과 돈을 들여 만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탐색하는 연애의 전초전이다. 탐색이나 전초의 단계는 늘 연애에서 있어왔지만 이것이 명확한 하나의 기간으로 떨어져 정의됐다는 건 그만큼 이 개념의 비중이 늘었다는 의미다. 케이블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썸&쌈’이라는 꼭지가 있다. 썸을 타는 ‘썸남·썸녀’를 소재로 삼은 코미디가 있을 만큼 썸은 중요한 세태가 됐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왜 행복한 사람은 늘 소수인가</font></font>이처럼 연애도 능력이라는 신화가 강화됐지만, 정작 행복한 사람은 소수다. 연애를 할 만한 조건도 주지 않고 연애의 다양성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연애를 권하는 사회의 각본에 맞는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애인구’ 다수의 폭력에 소외받은 싱글들은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쓴다. 커플 이데올로기에 발끈하면 금세 ‘부러워서 그러지?’라는 시선이 따라온다. 심지어 외모와 능력에 대한 폄하를 당하기도 한다. 정말 연애의 지향점이 행복이라면, 모두 연애하는 상태를 강요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을 존중해주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커플과 싱글로 나뉜 21세기의 카스트는 이제 없어질 때도 됐다.
김자현 인턴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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