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종·종교 차별하는 시민권법


‘1982년 시민권법’ 따라 태생·제휴·귀화 시민으로 등급 구분… 주민카드엔 인종·종교 기입해 소수민 차별 제도화
등록 2013-09-27 07:26 수정 2020-05-02 19:27

버마(미얀마) 아라칸주 시트웨 외곽 피란민(IDPs) 캠프에 머물고 있는 로힝야 난민 아부시디끄(44)는 2010년 총선에서 ‘탄슈웨당’을 찍었다. 집권하면 시민권을 주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탄슈웨는 전 군사정권의 몸체인 국가평화개발평의회(SPDC) 수장이고 ‘탄슈웨당’은 집권당이 된 통합단결발전당(USDP)을 말한다.
당시 로힝야 정치인들은 SPDC와 거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힝야들이 USDP를 찍는 대신 SPDC는 로힝야에게 시민권을 주고 이동의 제한을 포함한 각종 제약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시민권이 없는 로힝야들은 2008년 신헌법 개정안 통과 때 대거 발급받은 ‘임시등록카드’(TRC), 일명 ‘화이트카드’를 사용해왔다. 선거 뒤 USDP는 집권 여당이 되었고 민선 정부까지 들어섰다. 하지만 시민권은 없다. 지난해 폭동과 학살을 겪으며 로힝야들의 처지는 군사정권 때보다 더 나빠졌다.
“배신감을 느낀다. 다시는 그 당을 찍지 않겠다.”
아부와 같은 이유로 USDP를 찍었던 또 다른 난민 누르잔(54)은 지난해 폭동 때 그 화이트카드마저 분실했다. 아들 하나는 보트피플로 떠나 현재 타이에 있고, 또 다른 아들은 어부인데 폭도들이 배를 부수는 바람에 고기잡이가 어려워졌단다. 아들은 현재 무슬림 게토 내 시장에서 허드렛일로 하루 1달러 내외를 번다. 폭도들이 내리치는 장칼에 비명횡사한 이웃 3명의 죽음을 목격했던 누르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시민권 준다고 해 ‘탄슈웨당’ 찍었더니

버마의 시민권 제도와 그에 기반한 주민카드 발급 체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다. 우선 현행법인 ‘1982 시민권법’이 로힝야를 버마 공식 인종으로 인정치 않는 바람에 시민권자이던 이들이 느닷없이 무국적자가 됐다. 그러나 1982년에 바로 시민권을 상실한 건 아니다. 도입 뒤 이 법은 ‘잠자는 법’이었다. 법이 엄격히 적용되기 시작한 건 바로 88항쟁 이후다. 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9월18일 통치기구로 출범한 국법질서회복평의회(SLORC)에 의해서다. 새 법에 따른 신분증 교체 작업은 대략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한 로힝야 난민이 1982년 시민권법 발효 이전에 발급받은 국민등록카드(그린카드·왼쪽)와 로힝야에게 발급된 화이트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허용된 권리가 제한적인 화이트카드는 이동 허가를 신청할 때 필요하다. 그린카드는 로힝야가 과거 버마 시민이었음을 증언한다.

한 로힝야 난민이 1982년 시민권법 발효 이전에 발급받은 국민등록카드(그린카드·왼쪽)와 로힝야에게 발급된 화이트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허용된 권리가 제한적인 화이트카드는 이동 허가를 신청할 때 필요하다. 그린카드는 로힝야가 과거 버마 시민이었음을 증언한다.

주민카드는 ‘국민등록카드’(NRC·National Registration Card)라 불리는 옛 ‘그린카드’에서 ‘국민감시카드’(NSC·National Scrutiny Card)라는 이름의 ‘핑크카드’로 교체되었다. 옛 카드를 반납하지 않으면 10년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핑크카드 뒷면에는 ‘당신이 30살이 되면 이 카드를 변경(재발급)해야 한다’고 적혀 있으니, 30살 재발급시 또 다른 불이익의 여지를 남겨놓은 셈이다.

‘헌 카드 주면 새 카드 내준다’는 말에 그린카드를 반납한 로힝야들이 받은 건 핑크가 아닌 ‘화이트카드’다. 마을 간 이동시 당국의 허가를 받을 때 로힝야들은 이 카드를 쓴다. 그 밖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로힝야 연구자는 옛 그린카드를 반납하지 않은 로힝야의 비율을 대략 8~12%로 추정했다. 이는 로힝야가 현행 시민권법 이전만 해도 이 나라 시민이었음을 증명하는 주요 단서가 된다.

1982 시민권법은 시민 등급을 태생시민(Citizen), 제휴시민(Associate Citizen), 귀화시민(Naturalized Citizen) 셋으로 분류해놓았다. 로힝야의 경우 ‘귀화시민’ 신청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 본인이나 조상이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48년 1월4일 이전에 거주했다는 증거물을 제출해야 한다. 신청한다고 인정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차별적인 시민법은 물론 이 법에 따라 발급되는 주민카드를 들여다보면 가히 인종주의의 제도화를 절감하게 된다. 주민카드에는 우선 ‘인종’과 ‘종교’ 표기란이 있다. 본인의 인종만 표기되는 게 아니다. 다인종 국가 버마에서 혼혈은 드문 경우가 아닌데 주민카드는 그 혼혈의 내용도 기록한다. 부모의 인종, 때에 따라서는 조부모의 인종까지 표기된다.

주민카드엔 조부모 인종까지 표기

랑군에 거주하는 무슬림 웅나잉(가명)의 주민카드를 보자. ‘벵갈리 버마-버마 벵갈리/버마 & 이슬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카드의 소지자는 벵갈리와 버마족 사이에 태어난 아버지와, 버마족과 벵갈리 사이에 태어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버마 시민으로서 종교는 이슬람이다.’ 이때 ‘벵갈리’는 남아시아인의 외모를 가진 이 혹은 무슬림에 대한 통칭이라 보면 된다. 로힝야도 물론 ‘벵갈리’다.

웅나잉은 주민카드를 만드는 데 8개월이 걸렸다. “무슬림은 주민카드를 만드는 데 대체로 1년쯤 걸린다. 300달러를 쥐어주면 한 달 안에 가능하고.” 중국계이자 무슬림인 코코르윈(가명)의 주민카드엔 ‘중국/이슬람’이 아니라 ‘버마/이슬람’으로 적혀 있다. “외양도 버마족과 비슷한데 그냥 ‘버마’로 하는 게 앞으로 살기 편하다며 담당 공무원이 그렇게 적었다.” 그의 설명이다. 퓨퓨르윈(가명)은 남아시아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외모의 버만족이다. 그러나 무슬림이어서인지 공무원은 ‘벵갈리/이슬람’이라고 간단히 적어버렸다.

또 하나의 사례. 소아웅(가명)은 버만족 무슬림이다. 그러나 그의 주민카드엔 ‘버마/불교’라고 적혀 있다. “카드 만들 때 공무원이 그러더라. 이슬람보다는 불교로 적힌 카드가 좋다고. 그렇게 적겠다고 해서 그냥 뒀다.” 덕분에 그는 무슬림이라면 얼씬도 할 수 없는 시트웨에 난민촌 자원봉사차 다녀오기도 했다.

아라칸주 시트웨시의 마지막 남은 무슬림 구역 아웅밍갈라에는 극소수지만 힌두교도들이 거주한다. 이 구역 무슬림들은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무슬림과 유사한 외모의 힌두교도들은 바로 ‘힌두’라 적힌 아이디카드로 출입을 허가받는다.

로힝야 지역 정당인 민족민주개발정당 대표 아부타헤이는 1990년 총선에 출마할 때 ‘로힝야/이슬람’으로 후보 등록을 했다. 그가 다시 출마한 2010년 총선에선 상황이 달라졌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로힝야’는 곤란하다며 조상 중에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135개 인종에 속하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단다. 없다고 하니 그의 후보 등록은 ‘벵갈리/이슬람’으로 이루어졌다.

“인종카드가 아니라 국민카드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종카드가 아니라 국민카드가 필요하다. 인종과 종교를 표기하는 난을 없애면 간단하다.”

아부타헤이의 뼈 있는 지적이다. 일관성도 원칙도 없는 주민카드는 부패의 온상이자 인종주의의 초석이 아닐 수 없다. 다양성을 악용해 분열을 조장하고 차별을 제도화하는 시민권 제도야말로 개혁 로드에 선 버마 정부가 우선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버마 의회에선 로힝야의 정치 활동과 참여를 제한할 개정안 하나가 논의 중이다. ‘화이트카드’를 소지한 ‘벵갈리’들의 정당 창당을 막기 위해 자격 요건을 강화하자는 ‘정당등록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민족주의 색채가 짙어만 가는 ‘88세대’가 개정에 찬성 의견을 피력한 건 버마 개혁의 불편한 진실이다. 버마 개혁 어디로 가고 있나.

시트웨·랑군(버마)=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