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C21A1A">국제분쟁 전문기자인 이유경 방콕 통신원이 리영희재단의 지원으로 지난 7월29일부터 8월26일까지 버마(미얀마) 서부 아라칸주와 중북부 만달레이주를 취재하고 왔습니다. 이 기자가 찾은 곳은 올해 초 무슬림계 소수민족에 대한 불교도들의 약탈과 학살로 극심한 혼란을 겪은 지역입니다. 2010년 민정 이양 뒤 개혁·개방의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하지만, 버마의 민주화는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의 철저한 배제 아래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 역시 명확하다는 게 중론입니다. 취재기는 2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_편집자</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88항쟁’ 25주년, ‘개혁·개방’ 대략 2주년. 5년 만에 다시 찾은 버마(미얀마) 랑군의 8월은 개혁 2년이 선사한 ‘해방감’에 흠뻑 젖어 있었다. 88항쟁 기념행사를 주도한 전 학생운동가 그룹 ‘88세대’는 25년 전 학살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정부를 행사에 초청하는 ‘관용’을 보였다. 개혁·화해·휴전협정의 플래시가 터지는 랑군, 전례 없는 화기애애함이 감돌았다.
북적거리는 랑군을 뒤로하고 날아간 서부 아라칸주의 주도 시트웨. 개혁의 요란함 같은 건 조금도 느낄 수 없는 한산한 거리를 밤이면 보안군들이 어슬렁거렸다. 지난해 반로힝야 무슬림 폭동 이후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여전히 통행금지다. 한때 시트웨 인구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무슬림은 이제 거리에 얼씬거릴 수 없다. 300여 개에 달하던 중앙시장의 무슬림 상점도 모조리 쓸려나갔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 무슬림 쓸어낸 거리엔 총 든 보안군만</font></font>‘2013년 8월9일 도착’.
간이역만 한 공항 문간에 선 이민성 직원이 여권에서 뽑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기록하더니 여권 뒷면에 도착 일자를 적은 딱지를 붙였다. 아라칸주 ‘도착비자’인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그날 오전 시트웨 외곽에 위치한 로힝야 무슬림 피란민(IDPs) 캠프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을 비롯한 구호단체들은 ‘치안 불안’을 이유로 캠프 방문을 보류했고, 지역 비정부기구(NGO)들은 당국으로부터 ‘방문 불가’ 방침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어렵사리 한 NGO와 협의한 캠프 동행 계획은 일단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폭력 사태’라는 취재 과제가 하나 더 보태졌으니 캠프 안으로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3"><font color="#666666"> 지난해 반무슬림 폭동 이후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여전히 통행금지다. 한때 시트웨 인구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무슬림은 이제 거리에 얼씬거릴 수 없다. 300여개의 중앙시장 무슬림 상점도 모조리 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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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지난해에 발생한 폭동은 수백 명의 사상자와 14만 명이라는 피란민을 양산했다. 이중 라카잉 불교도 난민들은 한 달 전부터 살라자 구역에 새로 지은 캠프에 모여 살았다. 깔끔한 방갈로촌을 연상시키는 마을엔 주정부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다. 이동하는 데 제약이 없고, 시내를 오가며 근근이 경제활동도 하고 있다. “무슬림은 꼴도 보기 싫다”는 마웅테인르윈(38)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반면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로힝야 무슬림 캠프. 같은 이름의 ‘마을’과 ‘캠프’가 나란히 위치한 이곳은 10만여 명이 머무는 거대한 무슬림 게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사람’이나 ‘바깥사람’ 모두 출입을 통제받고 있으며 언론, 특히 외국 언론은 버마 정보부로부터 받은 ‘여행허가증’(TA)이 필요한 여행 제한 구역이기도 하다.
“그거 없어도 된다. 이 나라 어디든 여행할 수 있으니 언론 자유를 맘껏 누려라.”
캠프 취재를 위해 여행허가증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정보부 민초 국장의 답변은 교묘하게 뜬구름을 잡았다. 언론의 자유가 대폭 풀린 것은 사실이지만 반 로힝야 무슬림 폭동과 연관된 취재, 특히 외국 언론이라면 문제는 달랐다. 허가증을 빌미로 직간접적 제약이 가해졌고, 스파이의 대명사인 특별지부(SP)의 활동도 여전했다. 지난 4월 시트웨의 유일한 무슬림 구역 ‘아웅밍갈라’ 안 모스크를 방문하다 라카잉 불교도들의 물리적 제지를 받은 미국 거주 사진 기자 2명은 최근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 ‘치안 불안’ 이유로 구호단체 활동마저 막아</font></font>다음날, 거의 종일 장대비가 쏟아졌다. 덕분에 검문소의 검문이 무기력해져 캠프 안 진입과 접선은 오전 10시께 별 탈 없이 이루어졌다. 우선, 병원이다.
말레이시아 자선단체 ‘머시 말레이시아’(Mercy Malasia)의 기부로 세워졌다는 병원 ‘다파잉 클리닉’. 상주하는 의사는 없지만 지역민과 난민에게 유용한 캠프 내 최대 병원이다. 병동 안에는 폭력 사태 이전에 입원한 환자들과 전날의 폭력 사태로 입원한 환자 5명으로 12개 침대가 다 채워져 있었다. 전날 발생한 부상자들은 어깨, 가슴, 허벅지, 다리 등 골고루 총상을 입었다. 온투지 캠프에서 발생한 1차 총격의 부상자들은 바로 옆 보두바 캠프로 이송돼 면허 없는 ‘현지 의사’의 응급처치를 받다가 밤에 군의 도움을 받아 이곳으로 이송됐단다. 그러나 여전히 의사는 없다.
병원 뜰에 주차된 한 트럭에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환자가 속수무책으로 누워 있었다. 상처는 선명했고 심각해 보였다. 전날 늦은 오후에 2차 총격이 발생한 보두바 캠프의 희생자다. 시내에 위치한 ‘시트웨종합병원’까지는 앰뷸런스로 10여 분 거리지만 환자 긴급 후송을 담당한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보이지 않았다. ‘치안 불안’. 이 네 글자는 구호단체들의 활동 보류를, 외부인에 대한 정부의 불가 방침을 합리화해온 단골 무기였다.
“정부는 신경도 안 쓰고, ICRC는 정부와의 협조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게토 내 다파잉 마을에 거주하며 로힝야 난민들의 입 노릇을 해온 아웅윈(57)은 자신의 연락을 받고 유엔난민기구(UNHCR) 관계자가 전날 잠시 다녀갔다고 했다. 보도에 따르면, 유엔난민기구는 사망자의 주검 검안을 원했지만 경찰의 거부로 되돌아갔다. 아라칸주 대변인 윈미양인은 이날 지역 언론에 ‘사망자는 없다’고 했다가, 사건 발생 3일째인 지난 8월11일 시내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의 죽음이 명백해지자 ‘1명 사망’이라고 했다.
“그 벵갈리들은(‘벵갈리’는 로힝야 무슬림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이주자라는 인식을 담은 경멸적 호칭이다. 버마 현지 언론을 포함해 버마 전역에서 흔하게 사용된다. 로힝야 무슬림뿐만 아니라 다른 무슬림 커뮤니티에도 적용하는 경우가 적잖다.) (유엔인권대사) 토마스 콴타나의 방문이 임박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꼭 그런 말썽을 일으킨다.” 사건 발생 4일 뒤 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이쯤에서 경찰의 총격이 어떤 상황에서 발생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건의 진원지 온투지 캠프는 접근이 불가해, 극히 제한된 출구로부터 긁어모은 증언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8월9일 이른 아침, 주검 하나가 온투지 캠프 인근 냇가에 떠오르면서 상황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아웅윈에 따르면, 주검은 그 전날 캠프 주둔 경찰이 로힝야 여성과 ‘밤을 보낸’ 걸 목격하고 주민들에게 그 사실을 폭로한 인물이다. 그의 ‘입질’에 화가 난 경찰은 이 남성을 불러 심한 구타를 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주검을 가져간 경찰에게 난민들은 시체 이양을 요구했고 이에 경찰은 총격을 가했다. 아웅윈이 당일 확인한 사망자만 최소 2명이고, 부상자는 10명 정도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경찰 초소 방화 건은 난민들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경찰의 명분쌓기용 소행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총격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웃 캠프 보두바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보두바 캠프 난민들은 경찰이 일부 부상자를 이송 중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경찰 차량을 저지했다. 부상자가 경찰 손에 있다가는 살해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보두바에서 2차 총격 발생. 사상자 수는 묘연하다. 다만 캠프로 들어간 8월10일 사망한 나시르 압둘라(25)의 죽음 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나시르는 시위 참가자가 아니다. 그는 이웃 마을의 시장에 다녀오며 길을 건너다 등에 총을 맞은 뒤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 시장 다녀오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font></font>오전 11시.
2차 폭력의 발생지 보두바 캠프로 향하는 길에 석연찮은 한 무리가 지나갔다. 쏟아지는 비에 거의 노출된 채 트라쇼(세발자전거로 된 버마의 대중교통 수단)를 둘러싸고 이동 중이었다. 차를 멈추고 다가가니 트라쇼에 앉은 이가 비닐 덮개를 열어젖혔다. 가슴에 총상을 입은 젊은이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무거운 침묵과 분노에 찬 눈빛들. 전날의 폭력 사태로 발생한 부상자는 하루가 지난 뒤에야 자전거로 병원에 실려갈 수 있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3"><font color="#666666"> 자말은 부상당한 지 3일째되던 날 사망했다. 타키퓐 병원의 의료진이 수술하기를 원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 시트웨 종합병원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수술대에 오르지 못한 배경에 대해서는 단언도 추측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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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이내 또 한 명의 부상자가 유사한 방식으로 이동 중이라는 급보가 전해졌다. 방향을 파악할 겨를 없이 논두렁을 가르고 달려 만난 부상자 자말은 허리 아랫부분에 총상을 입었다. 들것에 실려가는 그는 타키퓐 캠프 국경없는의사회(MSF)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시테마지 캠프에서 3시간이 걸려 왔다는데 병원까지는 약 15분을 더 가야 했다. 시테마지는 길이 나빠 차량으로 가도 1시간은 족히 걸리는 지역이지만 폭력 사태가 발생한 구역은 아니었다.
이후 파악된 자말의 사연은 이랬다. 8월9일 오전 자말은 시테마지와 온투지 캠프의 경계에서 가축떼를 몰고 이동하다 총을 맞았다. 경찰은 이 부상자를 초소 안에 가두고는 밤이 되어서야 가족에게 넘겨줬다.
“지난밤 자말의 아내가 전화를 걸어와 남편이 거의 죽어간다고 했다. 지금쯤이면 사망한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니….”
아웅윈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자말은 다음날, 그러니까 부상당한 지 3일째인 8월11일 결국 사망했다. 타키퓐 병원의 MSF 의료진이 수술하기를 원했으나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시트웨 종합병원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목숨을 거뒀다. 그가 시트웨 종합병원에서도 수술대에 오르지 못한 배경에 대해서는 단언도 추측도 어렵다.
다만 라카잉족 사이에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라카잉 극우민족주의, 반로힝야 인종주의가 ‘일단 살리고 보자’는 최소한의 동정마저 마비시켜버린 아라칸주의 보편적 현실이 절감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반로힝야 정서로 똘똘 무장한 라카잉 여인 티다(22·가명)가 어린이 구호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국제기구 직원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보아넘길 사안이 아니다. 티다는 아라칸주에서 흔한 라카잉 불교도 중 한 명일 뿐이지만 말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 총상자 초소에 두고 방치한 경찰</font></font>부상자를 초소에 두고 방치한 경찰의 경악스러운 행태에 대한 의문은, 온투지 구역을 포함한 일부 구역의 경찰들이 불과 얼마 전에 해체된 국경수비대 ‘나사카’(NaSaKa)의 후신이라는 점에서 답이 나온다. 나사카는 지난 20년간 방글라데시 국경과 인접한 로힝야 주류의 마웅도와 부티동, 두 타운십 중심으로 존재해왔다. 악명 높은 인권침해의 주범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동허가서, 결혼허가서, ‘두 아이 제한 정책’에 기반한 출생신고서(로힝야가 주류로 거주하는 마웅도·부티동 두 타운십에만 적용되는 ‘두 아이 제한 정책’은 2005년부터 실시됐고, 극단주의 승려들과 지난해 폭력 사태의 정부 쪽 진상조사단을 중심으로 산아제한 정책의 강화를 주문하고 있다) 등 로힝야에게만 적용돼온 차별 정책의 집행자가 바로 나사카였다.
그러나 ‘나사카 해체’를 요구해온 국제사회를 의식해서인지 테인세인 버마 대통령은 지난 7월 유럽 순방길에 나사카 해체를 공언했다. 9월2일 현재 아라칸주 정부는 로힝야의 결혼·출산·이동과 관련한 각종 ‘인·허가’ 업무를 마을행정관(한국의 동사무소 격)이 담당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공무원은 물론 라캉잉족이다.
이제 나사카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라진 것은 없다. 버마 군부가 민간복으로 갈아입었듯, 나사카도 일부 경찰복으로 갈아입고 로힝야 무슬림 게토의 일부 지역에 들어와 앉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로힝야 업무’ 중이다. 캠프 난민들이 (버마족 중심의) 군보다는 (라카잉족 중심의) 경찰에 대해 강한 비판과 거부감을 표현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군인들은 가끔 도와줄 때도 있다. 하지만 경찰은 우리 목숨을 하나둘 앗아가고 있다. 국제사회가 이 점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난민 아웅조(가명)가 또박또박 내뱉었다.
취재지원 리영희재단시트웨·랑군(버마)=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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