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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건으로 넓히고 복지로 다진다

경전철·무상보육 논쟁은 ‘박원순 대망론’의 리트머스시험지… 문재인·안철수와 차별화된 ‘유능한 개혁가’ 이미지 키워갈 듯
등록 2013-09-11 05:20 수정 2020-05-02 19:27
박원순 서울시장이 24일 오후 서울 시청 기자실에서 ‘서울시 도시철도 종합발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박원순 서울시장이 24일 오후 서울 시청 기자실에서 ‘서울시 도시철도 종합발전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과로사가 꿈”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다더니 과연 일중독자의 공간다웠다. 지난 9월3일 찾은 서울시청 6층의 박원순 서울시장 집무실 책상 위에는 시정과 관련한 문서 자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벽면 한쪽에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쪽지가 빼곡히 붙었다. 창가 쪽에는 두 단으로 이뤄진 상자 텃밭이 마련됐다. 채광과 송풍을 위한 조명 장치와 소형 선풍기가 달린 텃밭에선 배추, 상추, 고추, 케일, 가지, 당귀 등 2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도시농업 활성화를 위한 연구용 샘플”이라고 설명했다.

집무실 창가에는 ‘연구용’ 상자 텃밭

다른 쪽 벽면을 채운 책장에는 각종 정책과 관련한 서류철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독특한 구조였다. 좌우로 기울어진 책장을 다른 책장이 지탱하고 있었다. 집무실 디자인을 맡은 윤성근씨의 작품이다. 윤씨는 작가인 동시에 서울시 응암동 골목길에 위치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이다. 박 시장은 “저 책장 사진을 꼭 찍어달라”고 말했다. “경사진 책장은 우리 사회의 이념·지역·세대 간의 갈등을 상징해요. 서울시장에 취임하면서 양쪽을 잘 조절하는 중간자적 존재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선언한 박 시장의 목표는 그의 말처럼 ‘유능한 행정가’ 쪽에 일단 맞춰져 있다. 취임 2주년을 바라보는 시점의 ‘시정 성적표’는 어떨까. 서울시가 지난 8월 발표한 ‘2013년 상반기 공약 이행 사항 점검 결과’(지난 5월 기준)에 따르면, 박 시장은 자신이 제시한 327개 공약 가운데 162개를 이미 완료했거나 이행 뒤 계속 추진하고 있다. 이행률로 보면 49.5%다. 핵심 사업인 ‘임대주택 8만 호 공급’은 5만2766호를 공급해 66%를 완료했다. 분야별로 보면 ‘박원순표 시정’의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리더십 측면에서 내부의 평가도 나쁘지 않다. 서울시 관계자는 “박 시장의 업무 방식은 실무자들이 좋아한다. 실무자를 배석시켜 구체적 숫자와 실무에 대한 부연 설명을 듣지 않고, 그것을 실·국장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민참여 행정’ 분야가 86%의 이행률로 가장 높았다. 시정 정보 공개를 위한 ‘열린 데이터 광장’을 확대·개편했고, 문서 공개 시스템 구축도 추진하고 있다. 구체적 생활 지표를 담은 시민보고서 발간 사업과 자치구별 현장 시장실로 운영하고 있다. 정책의 입안과 추진 과정을 ‘밀실’이 아니라 ‘광장’에서 이뤄지게 하겠다는 것은 박 시장의 지론이기도 했다. 역시 박 시장의 역점 사업으로 꼽히는 ‘마을공동체’ 분야의 이행률은 56%였다. 반면 ‘도시재생’ 분야의 이행률은 7%에 그쳤다. 정보는 공개하고, 시민 참여는 확대하고,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건설·토목 사업은 자제해왔다는 의미다. 취임 이전 격화됐던 각종 뉴타운 사업과 관련된 논란을 비교적 무난하게 연착륙시킨 대목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리더십 측면에서 서울시청 내부의 평가도 나쁘지 않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박 시장의 업무 추진 방식은 실장, 국장보다 그 아래 실무자들이 좋아한다. 전임 시장들은 실·국장들로부터 보고를 받을 때 항상 실무자를 배석시켜 구체적인 숫자와 실무에 대한 부연 설명을 들었지만 박 시장은 그것을 실·국장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국장들은 업무가 엄청나게 늘었지만 실무자의 업무는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9월4일 열린 실·국장 간담회에서 “취임 초부터 지금까지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보좌진들의 역할을 많이 요구했다면 이제는 정책의 실질적 책임자인 실·국장이 앞장서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팀·과장 등 실무자들이 더 좋아해”

그렇다면 잠재적 대선 주자로서의 위상은 어떨까? 여야의 다른 ‘잠룡’들에 비해 반대 진영의 비토 정서가 상대적으로 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보수층 전반이 일방적 배제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박원순 시장의 장점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지난 대선에서 야권의 후보 자리를 두고 격돌했던 문재인·안철수 의원이 각각 안고 있는, ‘노무현 시대의 2인자’나 ‘반정치의 정치를 앞세우는 아마추어’라는 부정적 이미지에서도 박 시장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혼돈의 시기를 경과하고 있는 야권 전반에서 ‘박원순 대망론’을 거론하는 이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소통’은 방법론일 뿐, 콘텐츠가 아니다. 서울시정의 ‘무난한 순항’은 역설적으로 박원순의 대표 브랜드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달라졌다. 취임 첫해 동안의 시정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기보다는 봉합하는 쪽으로 이뤄져왔다면, 올해 하반기에 들어와선 박 시장이 직접 각종 논란의 전면에 나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7월24일 발표한 ‘서울시 도시철도 종합 발전 방안’이 대표적 사례다. 2025년까지 총비용 8조5천억원을 들여 서울시 곳곳을 가로지르는 10개 노선의 경전철 건설을 추진한다는 서울시의 계획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미 경기도 용인, 부산 김해 등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경전철 사업이 이용객 및 경제효과 부풀리기와 부실 시공 논란 끝에 애물단지로 전락한 뒤의 일이었다. “재선을 노리는 박원순 시장이 토건족의 논리에 포섭당했다” “경전철은 박원순표 4대강 사업이 될 것”이라는 등 날선 비판은 박 시장의 든든한 우군인 시민사회에서 주로 제기됐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은 “예비비에서 5천억원, 차량구입비에서 2천억원, 민자사업자 보조금에서 2조7천억원 등 모두 3조5천억원의 비용이 축소, 은폐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박 시장은 ‘교통 복지’ 차원에서 경전철은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반박한다. 박 시장은 “과거 서울 지하철 9개 노선이 건설될 때도 재정적 부담과 위험이 있었지만, 현재 완성된 지하철은 하루 700만 명의 서울 시민이 이용하고 있다. 지하철 이용에서 소외된 서울 시내 약 37% 지역에 해당하는 시민들의 발을 만드는 게 경전철 사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전철은 반드시 추진해야 할 사업”이라는 말도 했다.

경전철 프로젝트, 일단 숨고르기

여러 측면에서 경전철 사업은 ‘박원순표 시정’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많다. 전임자들의 ‘토목 위주 시정’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며 당선된 박 시장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마련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가 배제된 대목도 논란거리다. 한 정치평론가는 “토목사업이므로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의 외부 비판이나, 무조건 필요한 사업이라는 서울시의 반박이나 아직까지는 모두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관건은 결국 박 시장이 논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얼마큼 합리적 리더십을 보여주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서왕진 서울시 비서실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추진 과정에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데 각 구청장이라든지, 지역구 정치인들의 요구 사안이 워낙 강해서 그 내용을 드러내놓고 논의하지 못한 측면은 있다. 막판에 시민단체에 계획의 얼개를 거칠게 설명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2025년까지 8조5천억원을 들여 10개 노선의 경전철 건설을 추진한다는 서울시 계획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박 시장이 토건족의 논리에 포섭당했다” “박원순표 4대강 사업이 될 것”이란 비판이 ‘우군’인 시민사회에서 제기됐다.
11일 오후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과 정홍원 총리 등이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 뒤편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인다. (2013 0311 청와대사진기자단/국민-이동희기자)

11일 오후 청와대 세종실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과 정홍원 총리 등이 회의장에 입장하고 있다. 뒤편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인다. (2013 0311 청와대사진기자단/국민-이동희기자)

논쟁이 진행되면서 서울시도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은 9월4일 녹색교통·공공교통네트워크·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관계자 15명과 정책 간담회를 열고 경전철 사업에 대한 우려를 경청했다고 한다. 서왕진 실장은 “앞으로 박 시장과 시민사회는 경전철 문제를 둘러싼 아주 길고 충분한 토론을 거치게 될 것이다. 모든 정보를 공개해놓고 토론을 통해 결정해나가겠다”고 말했다. 또 서울시는 민간 사업자와의 조율을 거쳐 경제적 타당성과 주민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일부 노선의 건설을 우선 추진한다는 방침을 강조하며 진화에 나섰다. 서울시 핵심 관계자는 “거칠게 예상하자면 여의도와 신림동을 잇는 신림선, 왕십리부터 상계동에 이르는 동북선이 우선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10개 노선 계획이 한꺼번에 발표되면서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대규모 토건사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각인됐다는 판단에서다.

새누리 서울시당 “고단위 꼼수에 아연실색”

경전철 사업이 주로 지지층 내부의 논란을 불렀다면, 무상보육 논란은 박근혜 대통령과 박 시장이 정면 충돌하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0~5살 100% 무상보육’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대선 과정에서도, 당선 직후에도 박 대통령은 “복지사업은 전적으로 중앙정부가 담당하는 등 국고 보조 사업을 조정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서울시와 시의회는 이에 따라 올해 예산안을 짰다. 하지만 재원 마련 방식이 생략된 채, 그것도 ‘증세 없는 복지’를 내걸었던 박근혜 정부의 입장은 곧 후퇴했고, 서울시가 무상보육을 위한 추경예산을 편성하지 않으면 기존에 책정한 보육예산 1355억원을 집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존 국고 기준보조율을 ‘중앙정부 20%, 서울시 80%’에서 ‘중앙정부 40%, 서울시 60%’로 조정하는 방안을 골자로 한 ‘영유아 보육법’도 여전히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몇 차례 공방이 이어지면서 결국 서울시는 정부 요구대로 2천억원 규모의 지방채를 발행하기로 했다. 박 시장은 9월5일 기자회견에서 “서울시는 중앙정부와 대통령의 약속을 천금같이 믿고 예산 편성을 했다. 추경을 하면 돈을 주겠다는 중앙정부의 태도에 서울시는 커다란 절망의 벽을 느꼈다. 어렵고 힘들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결단했다. 중앙정부가 국민 앞에 드렸던 무상보육 약속을 서울시가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공약 후퇴’에 따른 재정 부담을 서울시가 감수하더라도 무상보육 정책을 지켜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서울시 고위 관계자는 “일부 지역에선 당장 며칠 안에 보육비 지급이 중단될 판이었다. 서울시 살림이 아무리 절박해도 무상보육을 구멍나게 할 수는 없으니 일단 우리가 부담을 안고 가자는 판단을 했다”고 부연했다.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영·유아 보육법이 처리되지 않는 한 논란은 내년에도 반복될 것이다. 역으로 보면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복지국가’라는 화두로 박 시장이 자신의 비전을 펼쳐 보일 공간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무상보육 논란은 정책 영역에서 지난 대선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박원순 시장의 첫 격돌이라는 측면에서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새누리당 서울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성태 의원은 “고뇌에 찬 마지막 방법으로 지방채권을 발행하겠다는 박 시장의 고단위 꼼수와 정치쇼를 보는 내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며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 인간이나 할 수 있는 ‘무상보육 쇼’를 본 것 같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반면 민주당의 서울시장위원장인 오영식 의원은 “중앙정부의 무리한 재정 지출 요구를 박 시장이 수용한 만큼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무상보육 대선 공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구체적인 정책과 재정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고 반격을 가했다.

“경전철, 중도·장노년층 구애 전략”

논쟁의 중심에 뛰어들고 있는 박 시장의 행보는 ‘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상보육과 경전철 논란의 방점이 서로 반대되는 지점을 향하고 있는 까닭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박근혜 대통령과 선을 긋고 무상보육의 수호자를 자처한 대목은 기존의 지지층 결집을, 경전철 사업은 이념적 중도층인 중·장년과 노년층으로의 지지층 확대라는 각각 다른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각각의 정책 이슈가 그려낼 원심력과 구심력의 크기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것을 견주는 첫 번째 무대는 다름 아닌 내년 지방선거가 될 터다. ‘서울시장 박원순’은 어쩌면 자신의 기나긴 정치 여정의 출발점에, 이제야 비로소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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