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보기관이 나서 우리의 자유와 민주를 짓밟은 것이다.”(2005년 11월17일 국회운영위원회 회의)
“국정원이 도청이나 정치 사찰 등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 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국익을 우선시하고 국제 이슈를 중심으로 나갈 수 있도록 국정원의 기능 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2005년 8월24일 부산 방문 중)
누구의 말일까? 놀랍게도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발언들이다.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로 있던 2005년 당시 정국은 ‘안기부 X파일’ 파문으로 들끓고 있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은 국가 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1997년 9월 벌인 도청 내용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이학수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과 홍석현 회장이 나눈 대화에는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대선 후보와 검 찰의 고위 인사들이 삼성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과 떡값을 받은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가히 ‘삼성공화국의 민낯’이라 할 만했다.
내용보다 절차의 불법성 문제 삼았던 2005년 박근혜2005년의 한나라당은 이미 ‘박근혜의 당’이었지만, 이회창 전 후보가 삼성에서 받은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핵폭탄급 이슈였다. 한나라당과 ‘대표 박근혜’는 대화 내용에 등장하는 정권·재벌·언론의 충격적인 유착보다 ‘도청의 불법성’을 부각시키는 전략에 당력을 집중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김무성, 전략기획위원장은 권영세였다. 김무성 의원은 “불법 도 청을 지시하고 집행한 사람은 응당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불법 도청에 의한 내용을 갖고 검찰에 서 수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불법 도청 자료는 증거로 삼을 수 없는 것 이 아닌가”라며 방어막을 쳤다. 대선자금이라는 ‘내용’은 놔두고, 불법 도 청만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랬던 김 의원은 2012년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 서 불법적으로 입수한 ‘북방한계선(NLL) 대화록’의 내용을, 그것도 왜곡 된 형태로 공개하며 ‘종북몰이’를 주도했다.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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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세 주중대사의 당시 발언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2005년 8월10일 MBC 라디오 에 출연해 이런 주장을 편다. “일반인 이 생각하는 막연성과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하는 막연성은 다르다. 삼 성과 연관된 대선자금, 홍석현 대사(당시 주미대사)와 연관된 부분이 (대 통령 보고에) 당연히 포함됐으리라고 생각되고, 그 사항들이 포함됐다면 국정원 기준의 막연한 내용이더라도 대통령께 당연히 보고될 만한 내용 이 담겨져 있었고, 또 따라서 대통령께도 보고됐다고 생각한다.” ‘안기부 X파일’의 핵심적 내용이 당연히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그것이 공개되는 과정에도 청와대가 관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논 리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NLL 대화록’을 박근혜 캠프가 광범위하 게 활용했다는 의혹, 남재준 국정원장의 대화록 무단 공개가 박 대 통령의 결재, 최소한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의혹 등과 관련 해 현재 여권이 취하는 태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지 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종합상황실장을 지낸 권 대사는 “우리가 집권하면 (대화록을) 까면 되고…”라는 등 ‘NLL 정국’에 깊 숙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국민이 믿을 때까지 증명해 보이라”던 야당 대표이같은 ‘표리부동’의 중심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그는 ‘X파일’에 드러난 기득권의 유착에는 깨끗 하게 눈감았다. 대신 박근혜 대표는 “정부나 국정원이 무슨 말을 한 들 국민이 믿겠느냐”며 사태를 ‘도청의 불법성’ 프레임에 가뒀고, 김 대중·노무현 정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현재는 도청이 행해지고 있 지 않다고 하지만 누가 알 수 있겠나.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국 정원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동시에 국정원법 개정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하는 등 ‘국정원 개혁론’을 거세게 제기했 다. 당 차원에서 국정원 개혁 방안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꾸리기도 했다.
지난해 대선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일련의 ‘국정원 사태’와 관련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정반대다. 대선 전부터 이미 ‘NLL 대화록’을 하 나의 정치적 무기로 활용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0월19일 서울 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서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다른 어떤 것보 다도 진실이다. 진실이 무엇인가 그것만 밝혀지면 된다고 생각한다. NLL은 수많은 우리 장병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곳으로 누구도 함부 로 변경할 수 없다. 도대체 2007년 정상회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 갔다는 건가”라며 상대 후보와 야당을 몰아세웠다.
지난해 10월24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EBS 본사를 방문한 자리 에선 “(NLL 문제는) 노무현 정권에서 책임을 졌던 사람들이 명확히 밝히면 될 것인데 국민에게 의구심만 증폭시키고 있다. 역사를 잊어 버리는 사람이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고까지 했다. 국 정원 여직원의 댓글 공작 현장이 발각되자 박 대통령은 12월14일 기 자회견을 자청해 역공을 편다. 기자회견의 형식을 빌렸지만 질의응 답은 받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반복했다. 그는 “선거가 무엇이고 권 력이 무엇이길래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로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급 기야는 한 여성을 집에 가둬놓고 부모님도 못 만나게 하고 심지어 물 도 밥도 끊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 참담하기만 하다”고 했다. 국정원 여직원을 ‘피해자’로 둔갑시킨 선동은 대선 투표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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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박 대통령은 이런 말도 했다. “민주당과 문재인 캠프가 주장 하는 것은 바로 이 나라 국정원이 문재인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정 치공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국정원이 박근혜를 당선 시키기 위해 정치공작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렇게 엄청 난 일을 벌이면서 민주당과 캠프는 제보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단 한 가지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증거가 전 혀 없는 것이 아니냐. (중략) 저는 오늘 이 순간부터 흑색선전과의 전 면전을 선언한다. 흑색선전으로 국민을 속여서 소중한 표를 앗아가 는 것은 나라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앗아가는 것이다.” 이같은 주 장의 전제인 ‘국정원의 문재인 낙선 공작’은 이미 사실로 드러났다. 원 세훈 전 국정원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 은 ‘야당의 흑색선전 시나리오’라며 자신이 직접 언급한 그 전제의 논 리적 귀결, 즉 ‘국정원의 박근혜 당선 공작’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는 다. 대신 NLL과 관련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상의 영토 포기’ 라는 주장을 반복하며 논점을 흐리고 있다. 좋게 표현해야 물타기고, 정확하게 말하면 악질적인 선동에 가깝다.
오랜 침묵을 깨고 박 대통령은 지난 6 월24일에야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국정원이 왜 그 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 원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도 않았다” 는 입장을, 그것도 이정현 홍보수석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밝힌다. 대신 하루 뒤인 6월25일에는 “우리의 NLL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키고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 다”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은 정권의 정당성 문제로까지 번질 수밖에 없는 이슈다. 다른 한편으로 ‘NLL 논란’의 확산은 보수층 결집과 야권에 대한 역공에 용이한 프레임이다. 2005년 안기부 X파일 파문에 대해서도, 지난해부터 불거진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에 대 해서도 ‘정치인 박근혜’를 움직인 판단의 준거는 오로지 자 신의 ‘정치적 유불리’뿐이라는 얘기다.
“국민이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국정원 스스로 증명해 보이 라”는 2005년 박 대통령의 주문은 2013년에 와선 ‘국정원의 셀프 개혁론’으로 쪼그라든다. 박 대통령은 7월8일 수석비 서관회의에서 “국정원도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정원은 국가와 국민의 안전보장을 위한 업무를 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한다. 국정원은 그 본연의 업무인 남북 대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대북정보 기능 강화와 사이버테러 등 에 대응하고 경제안보를 지키는 데 전념하도록 국정원 개혁 에 박차를 가하고,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해주기를 바란다” 고 했다. 믿음을 줄 때까지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2005년의 요구와, 남재준 국정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스스로’ 조직 개 혁안을 마련하라는 최근의 지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 거 대한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 대통령의 발언을 남 원장 체제의 국정원은 일종의 ‘재신임’으로 받아들인다. 국 정원은 곧바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NLL 포기’라 고 주장하며 다시 여론전의 중심에 뛰어들었다.
‘셀프 개혁론’과 남재준의 재도발X파일 파문의 한가운데에서 정국 경색의 부담을 안고 정보기관의 도청 사실 공개를 지시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8월8일 청와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모르는 진실을 파헤치지 않을 순 있지만 터져나 와버린 진실을 덮어버릴 수는 없고, 앞에 부닥친 진실을 비 켜갈 수도 없다. 적어도 내가 부닥친 이상 최선을 다해서 진 상을 밝혀야 한다. 그것밖에 없다.” 반면 박 대통령은 모르 는 진실을 파헤치기는커녕 이미 터져나와버린 진실을 덮어 버리는 동시에 부닥친 진실을,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비켜가 고 있다. “나는 몰랐다”라고? 정치적 무능의 고백이거나, 거 짓말이다. 과연 어느 쪽일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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