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 삼성그룹 핵심 경영진 2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51살 이건희 회장은 ‘질 위주의 경영’을 선포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1987년 11월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뒤 아버지를 이어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이 6년간 그룹의 문제점과 한계를 연구한 뒤 밝힌 경영철학이다. 이 회장은 1997년에 발간한 에세이집 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내가 모든 걸 짊어져야 하는데 세계경제는 저성장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고 국내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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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꿀 대상은 ‘나’였다. 1993년 9월에 펴낸 에서 이 회장은 “나부터 변해야 한다”고 밝혔다. “뭐든지 좋다. 자기 자신이 양심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남한테 해롭다’ 하는 것을 다 없애보자. 그런 뜻에서 우선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인간미와 도덕성 회복이다. 이제 개인의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를 없애보자.”
20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강제로 바꾼 ‘7·4제’(아침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가 신호탄이었다. 사회 통념을 깬 새로운 규범으로 신선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또 생산라인을 중단시키더라도 불량률을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고, 한 품목만이라도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1995년엔 이른바 ‘불량제품 화형식’도 열었다. 그해 3월9일 경북 구미사업장에서 삼성전자 임직원 2천 명이 모인 가운데 휴대전화·팩시밀리 등 시가 500억원 상당의 제품을 망치로 부수고 태워버렸다. 질 경영을 내세운 신경영은 이후 10년간 강도 높게 추진됐고 그 결과 삼성은 반도체를 비롯해 TV와 휴대전화 분야에서 눈부신 외적 성장을 기록한다.
1993년 30조원에 못 미치던 매출은 2012년 380조원으로 13배, 그룹 시가총액은 같은 기간 8조원에서 338조원으로 44배나 불어났다. 그룹 총자산도 435조원으로, 세전이익도 39조1천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1991년부터 1997년까지 한솔그룹과 새한그룹, CJ(옛 제일제당), 신세계그룹, 보광그룹이 잇따라 계열 분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표다. 취임 때 현대그룹(당시) 등에 밀리던 재계 순위도 독보적인 1위로 굳혔고, 무엇보다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가 세계 9위에 올라섰다. 브랜드컨설팅그룹 ‘인터브랜드’의 집계를 보면, 2012년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329억달러(약 36조원)로 전년(234억달러)에 견줘 8단계 상승했다. 오랜 경쟁 상대인 소니·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을 크게 앞지른 결과다. 새로운 경쟁자도 눌렀다. 애플이 스마트폰을 선보이면서 휴대전화의 절대강자였던 노키아는 재기 불능의 늪에 빠졌지만 삼성전자는 반대로 애플을 제쳤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발표한 2013년 1분기 글로벌 휴대전화 판매량 집계를 보면,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30.8%의 점유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했다. 피처폰을 포함한 전체 휴대전화 시장에서도 23.6%를 기록했다. 2위는 18.2%에 그친 애플이었다. 삼성전자의 1분기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52조8700억원, 8조7800억원이다. 2분기에는 갤럭시S4와 갤럭시노트8.0 덕분에 영업이익이 11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2011년 7월 에 ‘삼성 성공의 패러독스’라는 논문을 내어 삼성의 성공 요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삼성은 전통적인 일본식 경영 시스템을 받아들였으나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도입한 이후 미국식 경영을 적극 접목하면서 두 가지 경영의 장점을 결합한 특유의 삼성식 경영을 만들어냈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도 “반도체나 스마트폰 같은 천문학적 투자가 필요한 사업 분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오너’가 신속하고 과감하게 의사결정을 내렸다”며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빼고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절대적 영향력과 리더십은 동시에 치명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업 실패의 부담이 계열사에 돌아가는 대신 성공과 과실은 총수가 갖는 ‘비용·이익 불이치’가 존재”(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하기 때문이다. 삼성자동차의 경영 실패가 그랬다. 이 회장은 자동차 수집광이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자동차에 심취해 1년6개월 동안 자동차를 뜯고 조립해서 되팔아 자동차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다고 한다. 1987년 취임 초에 이 회장은 비서실에 승용차 사업 진출 방안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삼성생명을 통해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다 실패하고 1995년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을 제휴해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공장 설비와 자동차 부품을 일본에서 수입해 조립하고 1998년부터 중형차 SM5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손실은 2조4500억원에 달했다.
1999년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내놓으면서 손실보전을 약속했고 2000년 말까지 현금화가 되지 않을 경우 31개 계열사가 공동 책임지기로 합의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기한이 넘어갔고 채권단이 이 회장과 삼성 계열사를 상대로 소송(소송액 4조7830억원)을 냈다. 2008년 1월과 2011년 1월 1·2심 재판부는 합의서의 효력을 포괄적으로 인정하며 채권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이 회장이 내놓은 삼성생명 주식을 팔아도 채권단의 손실이 보전되지 않을 경우, 나머지 손실의 원금과 지연이자는 모두 계열사가 떠맡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박근용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당시 합의서는 그룹 구조조정본부 차원에서 이건희 회장의 책임을 면하고자 계열사의 팔을 비틀어 지급보증을 하게 한 것”이라며 “원금 부족분과 지연이자는 당연히 이 회장이 추가로 개인 재산을 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법 앞의 평등’ 원칙도 이건희 회장은 가볍게 비껴간다. ‘삼성 X파일’과 삼성 비자금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5년 6월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보여주는 ‘삼성 X파일’이 공개됐다. 1997년 9월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삼성전자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회장이 나눈 사적 대화를 불법으로 녹음한 파일인데,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였다. 하지만 삼성 일가는 검찰에서 끝내 무혐의 처분을 받은 반면, 삼성의 ‘떡값 검사’를 공개한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만 되레 명예훼손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 전 의원은 2013년 2월 결국 의원직을 잃었다.
2007년 10월29일 김용철 전 삼성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변호사)의 양심고백을 계기로 떠오른 삼성 비자금 사건에서도 레퍼토리는 똑같았다. 김 변호사는 삼성이 자기도 모르게 차명계좌를 개설해 50억원가량의 현금을 입출금했다고 밝혔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여론에 밀려 비자금 사건의 책임을 지고 2008년 4월 경영 퇴진을 선언했다. 삼성특검은 이 회장이 임직원 명의의 1199개 차명계좌로 4조5천억원에 이르는 비자금을 운영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고 이병철 회장이 물려준 미신고 재산이라는 삼성의 변명을 그대로 수용했다. 결국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만 이 회장을 기소하고 정작 중요한 비자금의 조성과 사용처에 대한 수사는 깨끗하게 덮었다.
재벌그룹의 한 임원은 비자금 사건이 삼성에 오히려 득이 됐다고 평가했다. “4조원 넘는 차명재산이 약간의 세금과 벌금만 내고 양성화되는데, 3세로의 경영권 세습도 사실상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았느냐.” ‘나쁜 선례’는 꼬리를 이었다. 이후 CJ와 신세계, 한화그룹에서도 총수가 차명계좌를 이용해 상속·증여세를 탈루하거나 개인 자금을 운영한 사실이 드러났으나, 삼성과 똑같이 선대 회장의 상속재산이라는 논리로 법망을 교묘히 피해갔다.
2009년 12월 이건희 회장은 유례없는 단독 사면을 받고 2년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 명분은 ‘위기론’이었다. “삼성의 대표 제품들도 10년 내 모두 사라질 수 있다.” ‘오너경영 예찬론’을 펼치며 대부분의 언론도 적극 지원 사격에 나섰다. 2012년 경제매거진 가 쓴 기사의 일부를 보자. “2년간 독립 경영에 나선 삼성은 지지부진했다. 무엇보다 그룹 전체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게 문제였다. 삼성 내부에선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불안이 커졌지만 책임질 만한 사람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립 경영 2년간 삼성은 ‘망망대해를 나침반 없이 떠다니는 배’로 전락했다는 내부 평가가 팽배했다.”
하지만 돌아온 이건희 회장은 예전보다 더 강해진 절대 권한을 거머쥐었고 2012년 4월에는 거침없는 발언으로 외신의 주목을 받는다. 이 회장의 맏형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등이 유산 관련 소송을 제기하자 형 맹희씨 등을 ‘수준 이하’라고 표현하며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한 것. 이에 맹희씨가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건희는 형제간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고 비난하자, 이 회장은 다시 ‘퇴출된 양반’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격정적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이맹희씨는 감히 나를 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다.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맹희씨를)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미국의 는 “평소 말을 아끼기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이 요즘 완전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며 삼성가의 재산 분쟁이 TV 통속극처럼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와 도 “막장 연속극 수준”이라거나 “추악한 다툼”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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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의 거침없는 발언을 자제시키거나 거를 수 있는 시스템이 삼성 내부에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게 사실은 더 큰 문제란 지적이 많다. 삼성 신경영에서 ‘헌법’이라 규정한 △인간미 △도덕성 △에티켓이란 윤리강령은 이건희 회장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김병권 부원장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라고 신경영을 선언했지만 지난 20년간 경영권 세습이나 황제 경영 등은 더욱 강화됐다”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데 삼성은 글로벌 추세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삼성의 절대 독주는 국민경제 시스템에도 위험신호로 읽힌다. 1987년 범삼성그룹의 자산은 국내총생산(GDP)의 5.7%였으나, 2010년에는 무려 20%로 증가했다. 그중 CJ·신세계를 제외한 삼성 단독으로도 GDP 대비 17.4%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총설비투자에서의 점유 비중도 마찬가지다. 2010년의 경우 범삼성그룹은 우리나라 총설비투자의 16.9%, 삼성그룹 단독으로도 15.3%를 담당하고 있다. 이 수치들은 삼성생명 등 10개 금융계열사는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김상조 교수는 에서 “재벌공화국을 넘어 삼성공화국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렵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어느 정권이 이들의 요구, 특히 삼성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진보정권조차도 재벌과 타협하기 십상일 것이다.” 특히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길을 막고 있다면, 국민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선순환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고 했다. 안철수 의원(무소속)도 2011년 3월 카이스트 석좌교수 시절 관훈클럽 초청 포럼에서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이 국가경제에 악순환을 불러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신생 업체는 삼성이나 LG, SK 등 대기업에 납품하기 위해 불공정 독점 계약을 울며 겨자 먹기로 맺게 되는데 그 순간 삼성동물원, LG동물원, SK동물원에 갇히게 된다. 결국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하지 못한 채 동물원에서 죽어야만 빠져나갈 수 있다.”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 전반에까지 삼성의 신경영이 영향을 미친다고 홍성태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설명한다. “삼성의 힘은 (삼성그룹 산하) 삼성경제연구소가 객관적 연구 결과로 전환해 발표·확산시키는 ‘삼성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다. 핵심 내용은 ‘삼성이 최고이며, 삼성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순전히 능력과 노력 덕분이라는 생각’이다. 반대로 부당 내부거래, 불법 상속, 노조 탄압, 정경유착 등은 철저히 감춘다. 엄청난 잘못을 저질러도 많은 사람이 ‘역시 삼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삼성공화국의 지식정치 사령부이며, 지식정치의 출발점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1986년 세워진 삼성경제연구소는 1990년대 초부터 서울시의 ‘시정개혁 프로젝트’ 등 공공부문에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키웠다. 규모 면에서도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을 웃돌고 연구인력, 투자액, 홈페이지 방문자 수, 유료 회원 수, 언론 보도 횟수 등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다. 이광근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와 이경환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지난 4월27일 열린 2013년 비판사회학회 봄철학술대회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출범 당시 기업환경 분석부터 시작해 90년대 초반 한국 자본의 위기감 고조 속에서 등장한 신경영 전략의 고안과 다른 기업 컨설팅을 넘어서 국가의 정책 형성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수준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특정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아닌 매년 한국 경제 전망을 예측하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자리매김해 삼성경제연구소의 시민사회 장악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논문 ‘스마트 통치의 등장: 삼성경제연구소의 등장과 영향력 강화’)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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