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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병원이 뭔지는 아니?

OECD 국가들, 효율성보다 공공성 위해 공공병원 비중 35~100% 유지… 공공의료 걸음마 한국, 설립 목적부터 재설계해야
등록 2013-03-23 06:13 수정 2020-05-02 19:27

진주의료원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폐업하기로 했단다. 신중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공공기관의 문을 닫는데 가벼이 생각했을 리 없다. 그런데 정말 신중했을까. 홍준표 경남도지사 혼자 결정할 리야 없을 것이다. 전문가 그룹의 자문과 공무원의 보고를 받은 뒤 판단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공공병원(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을 35% 수준에서 100%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 비중이 가장 낮은 국가는 미국과 일본인데, 우리나라는 1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몇 년 전 영국이 공공병원을 민영화한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이는 “우리도 공공병원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은 비중을 100%에서 겨우 몇%포인트 줄인 것에 불과하다. 선진국들은 왜 그토록 공공병원을 유지하고 있을까. 지방의료원 원장으로 13년을 근무하면서 내린 나름의 답은 다음과 같다.

공공병원은 민간병원과 달리 수익성만을 추구하기보다는 국민에게 꼭 필요한 공공의료를 담당해왔다.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전염병이 돌았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치료한 것도 공공병원이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공공병원은 민간병원과 달리 수익성만을 추구하기보다는 국민에게 꼭 필요한 공공의료를 담당해왔다.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전염병이 돌았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치료한 것도 공공병원이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 목표 흑자 아냐

공공병원의 대표인 지방의료원이 민간병원과 무엇이 다른지 일단 살펴보자. 한 조사에 따르면 지방의료원에 근무하는 봉직의사(군복무 대신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사를 제외한 모든 의사들)의 절반 정도는 “소신 진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지방의료원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민간병원은 비영리법인이나 개인이 세운 병원이다. 그래서 투자 대비 수익을 내야 한다. 수익을 올리려면 병원 경영자는 내과나 정형외과처럼 돈이 되는 진료 과목 중심으로 병원을 운영하게 된다. 의사들에게 성과급을 주면서 과잉 진료를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의 목표는 흑자가 아니다. 환자를 비싸게 치료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지방의료원은 검사 건수를 늘리거나 비급여 진료의 비중을 확대해 진료비를 올리지 않는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회계법인에 의뢰해 전국 34개 지방의료원을 평가한 자료를 보면, 입원 환자 기준으로 지방의료원의 하루당 진료비는 같은 규모인 민간병원의 80%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저소득 의료 취약계층이 지방의료원을 찾는 이유다. 흔히들 공공병원의 존재 가치를 저소득 계층의 진료에 두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지방의료원은 원래 취약계층 진료를 위해 세워진 병원이 아니라 이렇게 적정 진료를 통해 진료비 부담을 낮추다보니 취약계층이 절로 지방의료원을 찾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진료비가 민간병원보다 훨씬 저렴하다보니 대부분의 지방의료원들은 적자에 시달린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공공병원이 민간병원의 경영 효율성을 본받으면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효율성이 높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를 들어 맹장 수술을 했다고 치자. 지방의료원과 민간병원의 진료비가 각각 80만원과 100만원이라면, 전문가들은 투자 대비 수익 면에서 민간병원의 효율성이 더 높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맹장 수술 환자를 완치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얼마나 투입됐는지를 따진다면 지방의료원의 효율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지방의료원은 애초에 효율성을 추구하는 게 불가능하다. 지방의료원에는 수익과 상관없이 지역의 필수진료과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가까운 지역에 소아과 진료를 위한 입원실이 갖춰진 의원급 병원이 없다면, 지방의료원은 소아과 병실을 운영해야 한다.

2003년 SARS 진료 공공병원 도맡아

더군다나 지방의료원은 애초에 효율성을 추구하는 게 불가능하다. 지방의료원에선 수익과 상관없이 지역의 필수진료과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가까운 지역에 소아과 진료를 위한 입원실이 갖춰진 의원급 병원이 없다면, 지방의료원은 소아과 병실을 운영해야 한다. 그러려면 소아과 의사를 둬야 한다. 만약 소아과를 운영해 얻는 수익이 진료실을 유지하는 데 미치지 못한다면 소아과를 폐쇄하는 게 옳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지역 주민들에게 헌법이 부여하는 기본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한때 흑자를 냈다던 지방의료원들도 진료비에서 수익이 난 게 아니라 대부분 장례식장이나 검진센터 운영 같은 부수입 덕택이었다. 그래서 지방의료원 원장들은 병동 못지않게 환자 진료와 직접적 상관이 없는 장례식장이나 검진센터를 확장하는 데 신경 쓴다. ‘장례식장의 부속병원’ ‘검진센터의 부속병원’이라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사람을 살리는 진료가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상대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몸부림이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방의료원이 민간병원처럼 수익을 내려는 목적으로 운영된다고 가정해보자. 공공병원이 민간병원과 똑같아진다면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의료원을 운영할 명분은 사라진다. 환자를 적정하게 치료하고 부대 수입보다는 환자에게 꼭 필요한 진료과를 운영하는 지방의료원을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없애버린다면, 이것이 지방의료원을 민영화하자는 주장과 무엇이 다를까.

지방의료원이 강제 폐업 위기에 내몰린 일차적 원인은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의료원을 운영하는 목표가 불분명한 데 있다. 내가 근무했던 삼척의료원만 하더라도 상급기관인 강원도가 제시한 목표는 ‘환자를 몇 명 진료하라’ ‘수익을 얼마 내라’는 식이었다. 그들에겐 공공병원에 대한 성찰은 없고 오로지 경영 적자에 대한 두려움밖에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공공병원 의료진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공공 기능을 수행해왔다. 2003년 중국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라는 전염병이 우리나라에 밀어닥쳤다. 당시 민간병원은 단 한 곳도 환자를 진료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목숨을 걸고 무시무시한 전염병을 진료하는 건 대다수 의료진에게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위험한 일을 해낸 건 결국 지방의료원 같은 공공병원이었다. 당시 보건복지부 담당자도 “공공병원 아니면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정부는 공공의료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민간병원도 공공의료 기능을 수행하면서 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공직관이 없는 민간 의료진이 돈 몇 푼에 목숨을 걸고 진료를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병원 이사회에 지역 주민들 참여해야

더 늦기 전에 지방의료원의 설립 목적을 공공의료 정신에 맞게 재설계해야 한다. 그에 따라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 뒤 지방의료원에 적절한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 또 병원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에 지역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주민들의 눈으로 지방의료원을 감시·감독한다면 의료 취약계층에 대한 진료는 더 보강되고 인근 병원들에 대한 진료비 견제 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공공병원인 만큼 여기에 들어가는 재원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절반씩 부담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지방의료원이 주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공공병원이 되기를 바란다.

박찬병 전 수원의료원·삼척의료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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