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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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와 퇴물은 ‘한 끗’ 차이
민망한 일이다. ‘원로’라 불리던 이들이 속절없이 추락한다. 원로란 본디 “나이나 지위, 덕망이 높은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이었다. 굳이 관직이 아니어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르는 게 가능해진 현대에 이르러선, 원뜻의 계급적·윤리적 차원이 탈각되고 개념의 외연도 확장됐다.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쯤을 이르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이제 법조인, 정치인, 교수 등 전통적 엘리트뿐 아니라 상공인, 교사 같은 통상의 직명 앞에도 원로라는 말이 붙는 게 어색하지 않다. 존숭받던 원로가 쉰내 나는 퇴물로 추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원로와 퇴물은 말 그대로 ‘한 끗’ 차이다.
김지하(72). 총칼 든 박정희와 맞짱 뜨며 저항의 1970년대를 선도했던 한 시절의 영웅이, 돌연 연민과 안타까움을 부르는 ‘보통 노인’으로 주저앉아버렸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그가 야당의 대선주자와 거물급 지식인을 겨냥해 쏟아낸 언어의 신랄함은 과거 ‘오적’에서 보여준 치열한 풍자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그것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으로 상징되는 동년배 우익들의 저잣거리 언어에 가까웠다.
여기저기 “비가 새는” 조짐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래서 “새 지붕을 얹듯” 그 또한 “사랑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나날이 희미해지는 세간의 인정(認定)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의 김지하를 만든 실존의 지반을 스스로 허문 꼴이 돼버렸다. 언론인 고종석은 “마음이 망가진 사람의 허튼소리”라 일축했지만, 몇몇 평론가들에게 이 사건은 “김지하의 평범화”(이택광)이자 “영웅주의의 무구한 타락”(황호덕)을 드러내는 비범한 표지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오죽하면 선임기자 최보식조차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우는 역할은 그와 같은 시인이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고 안타까워했을까.
그러나 말년의 행보가 논란을 빚은 경우는 비단 김지하뿐만이 아니다. 널찍한 사무실과 기사 딸린 관용차가 나오는 ‘한자리’를 노리고, 있는 인연 없는 연줄 다 동원해 이력서를 밀어넣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부 ‘진보 원로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시민사회 원로’라는 이름으로 정치권 외곽에 자리를 잡고 중요한 국면마다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해 두 차례의 선거 국면에서 보여준 ‘시민사회 원로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정파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은 때일수록, 난마같이 얽힌 상황을 정리하고 중재할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진영 내 다수 의견이었다. 하지만 양보를 압박받는 쪽에선 ‘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안 지려는 훈수정치’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시민사회 원로들로 구성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가 안철수 후보의 독자 행보에 거듭 제동을 걸자 친안철수 성향 트위터 이용자들 사이에선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교체되지도 않는 권력인 소위 ‘원로’라는 무리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kongheejun)는 격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하는 문제진보에 ‘원로’라는 집단이 존재하는 사실부터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현존 질서와 전통의 권위를 부단히 의심하고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진정한 전통(‘반전통의 전통’)이라 여기는 문화적 전위주의의 영향력이 여전한 탓이다. 실제 ‘축적된 지혜’의 역사적 집적물로 간주되는 ‘전통’이나, 그것의 인격적 구현체로 여겨지는 ‘원로’의 존재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해온 쪽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였다. 이 점은 ‘원로회의’ 성격의 자문(의결) 기구가 대체로 신분제적 질서가 잔존해 있거나 보수세력의 영향력이 뿌리 깊은 곳에서 발달해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반면 진보에게 ‘나이듦’이란 질병과 빈곤,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이 노년이 된 뒤에도 인간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보호망을 제공하는 일은 진보 정치세력의 중요한 임무였다. 노년층을 위한 보편적 연금과 의료, 돌봄 서비스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부 아래서 발달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 나라에서 노인 인구비의 증가는 산업구조 및 가족제도의 변화와 맞물려 20세기 중반부터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한국에서도 노년 세대뿐 아니라 모든 연령집단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나이듦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의 강도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물론 경제적 문제다. 국가의 복지 체계는 걸음마 단계인데, 가족의 돌봄과 부조 기능은 급격히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보면, 노인 가구 10가구 가운데 6가구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2012년 6월 기준).
노년기의 내리막이 가파르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는 막막함,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은 노년의 일상을 한층 황폐하게 만든다. 게다가 노년의 삶을 어떻게 가꿔갈지에 대해 별다른 학습이나 고민도 없이 황혼을 맞이했으니, 부딪히는 상황마다 실패와 난감함의 연속이다. 이런 어려움의 강도는 현역 시절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일수록 더하다. 어딜 가도 자신을 알아보고 대접해주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스스로 일상을 챙기는 일에 너무도 미숙한 탓이다.
이들 중엔 ‘왕년의 끗발’에 기대거나, 검증 안 된 ‘경륜’을 앞세워 한번 물러나온 무대를 기어이 다시 오르려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분별 없는 탐욕은 민폐를 낳는다.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여의도와 광화문의 유력 캠프에 줄을 대고 호시탐탐 입조(立朝) 기회를 노리는 ‘전직’들, 정권 교체기마다 공기업이나 정부투자기관 감사 자리 하나 얻어보려 이리저리 이력서를 들이미는 정·관·언론계 퇴직자들의 모습은 딱하고 처연하다. 요행히 몇몇은 중심가 사무실의 회전의자를 차지하고 2~3년쯤 풍족한 급여를 받으며 우아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위신을 지켜주느라 지출되는 비용은 공공부문에 20~30대를 위한 신규 일자리를 여럿 만들고도 남는 규모다.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결합하면 노추
그나마 대부분의 노년은 이런 자리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정년을 맞아 직업 전선에서 쓸쓸히 퇴역했지만, 집에만 눌러 있자니 가족들 눈치 보이고 나가자니 딱히 갈 곳도 없다. 이들 중엔 서푼어치 권위의식으로 가족들 위에 군림하려다 왕따를 당하거나, 드물게는 버릇 없는 ‘젊은 것들’과 자신을 방치하는 사회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다 극우의 행동 전위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물론 거개의 노인들은 집 안에서 TV를 끼고 외로움을 달래거나 무료 전철을 타고 도심 공원에 나가 또래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분별 없는 탐욕의 또 다른 귀착지는 노추(老醜)다. 김지하로 다시 돌아가면, 평론가 황호덕(성균관대 교수)은 그의 변신이 “노년의 외로움의 징표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묻는다.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노년이란 무엇일까.” 그에게 김지하 같은 “한때의 젊은 재능들”이 보여주는 납득할 수 없는 노년은 “오직 커다란 삶의 변곡과 전향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환기시킬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극적이다. 이어지는 고백은 이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노년에 대한 사유가 그간 얼마나 부재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작 두려워하는 건 누구라도 김지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근원에 자리잡은 인정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말한다.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신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자신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 없이는 당대의 고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은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데, 이런 인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을 일러 ‘속물’이라 한다. 속물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과정에서 과시와 협잡과 기만도 마다 않는다. 이런 행태의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만나면 노추가 된다.
1990년대 초 황지우가 남긴 ‘성요한병원’이란 시는 인정에 대한 사람들의 병적인 집착을 경쾌하게 조소한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처남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이 시를 썼다. “결국, 사람이란 자기 알아달라는 건데/ 그렇지 못하니까 미쳐버린 거다/ 권력도/ 부부싸움도 그렇다/ 자기 알아달라는 치정이다/ …/ 여자만 보면 자기의 자지를 꺼내 보인다는 목수 김씨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웃지 않고/ 나는 웃었다/ 병원을 나올 때에야/ 문 앞에 흰 석고 성자가 서 있었다”
노인과 약자에게 불친절한 이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리 만무하니, 당장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적절한 양생술(養生術)과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부단한 수행밖에 없는 것일까. 을 쓴 사회학자 홍승표(계명대 교수)는 “그렇다”고 말한다. 문화인류학자 김찬호(성공회대 교수)가 제안하는 노년의 삶도 비슷하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반쯤은 저 세상에 이미 가서 살고 있는 영혼, 현실의 속물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정하고 투명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 영욕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생애의 고결하고도 황홀한 기쁨을 빚어내는 내공…. 그러한 위상에서 노인의 권위도 되살아날 수 있다.”(김찬호 ‘노년, 무를 향한 정진’ 중에서)
처자들 앞에서 바지춤 풀어헤치는 짓만은
이쯤이면 군자를 넘어 성자의 경지다. 여기저기 비 새는 범부들 처지에선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아무나 노력해 도달할 수 있으면 그것이 왜 군자의 도, 성자의 삶이겠나. 그러니 지레 겁먹거나 낙담하진 말 일이다. 군자나 성자가 못 되어도, 외롭다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목수 김씨처럼 애먼 처자들 앞에서 바지춤 풀어헤치는 짓만은 피할 일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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