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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어낸 말이거나 위법한 공표거나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 NLL 포기 발언’ 의혹, 사실과 증언에 근거한 재확인… 녹취록인지 대화록인지 말바꾸기에 정상회담 배석자들 “사실 아니다” 반박, 사실이라도 법 위반 ‘국기문란’
등록 2012-10-23 11:59 수정 2020-05-02 19:27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왼족)이 지난 10월11일 ‘대북게이트 진상조사위원회’ 회의에서 통일부 간부와 대화하고 있다. 정 의원은 자신이 봤다는 기록이 ‘북에서 받은 녹취된 대화록’ ‘남쪽 배석자의 녹음 내용’ ’공식 대화록’ 가운데 무엇인지 밝히지 않은 채 말을 바꾸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왼족)이 지난 10월11일 ‘대북게이트 진상조사위원회’ 회의에서 통일부 간부와 대화하고 있다. 정 의원은 자신이 봤다는 기록이 ‘북에서 받은 녹취된 대화록’ ‘남쪽 배석자의 녹음 내용’ ’공식 대화록’ 가운데 무엇인지 밝히지 않은 채 말을 바꾸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다시 ‘북한 변수’가 돌아왔다. 지난 10월8일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의혹을 들고나왔다. 대선과 맞물려, 거의 모든 언론은 NLL 이슈를 여야의 공방으로 중계 보도한다. 유권자들은 마당에 흩뿌려진 쌀과 보리를 골라 나눠야 하는 머슴처럼, 사실과 주장이 섞인 공방 앞에서 지친다. 이 NLL과 관련한 팩트를 하나하나 체크해봤다.

비밀회담이 있었다?

2007년 10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자 그대로 두 정상이 배석자 없이 만나는 ‘비밀회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 의원은 10월8일 열린 통일부 국정감사장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정 의원) 2007년 10월3일 오후 3시 백화원초대소에서 남북 정상은 단독회담을 가졌습니다. 당시 회담 내용은 북한 통전부, 통일전선부가 녹음을 하였고 통전부는 녹취된 대화록이 비밀합의 사항이라며 우리 측 비선라인과 공유하였습니다. 그 대화록은 현재 전 정권의 폐기 지시에도 불구하고 통일부와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록에 대해 장관 보시거나 들으신 적 있습니까?” “(류우익 통일부 장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정 의원) 이 대화록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께선 김정일에게, 인용하겠습니다, 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따먹기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곳에서 공동어로 활동을 하면 NLL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 따옴표하겠습니다, 이라며 구두 약속을 하였습니다.”

배석자 없는 정상회담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문헌 의원이 의혹을 제기한 10월3일 단독회담도 마찬가지다. 2007년 10월4일치를 보면, ‘ ‘단독 정상회담’ 배석자 누구?’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이때 언론이 사용한 단독회담이란 용어는 ‘극소수만 배석한 회담’이라는 의미다. 당시 남쪽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외에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 권오규 경제부총리, 조명균 청와대 외교안보정책조정비서관 등 5명이 배석했다.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단독회담에서도 배석자가 있었다.

녹취록이 있나?

정 의원이 국감 때 주장한 ‘녹취한 대화록’, 즉 녹취록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대화록은 존재한다. 당시 배석자인 김만복 전 국정원장,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은 지난 10월10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별도의 어떤 단독회담도 없었고 비밀합의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노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당시 회담 관련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당시 배석했던 조명균 비서관이 디지털 녹음기로 회담을 녹음했으나 녹음 상태가 불량해 군데군데 녹음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부는 녹음된 내용과 김만복 전 원장이 손으로 쓴 메모를 종합해 ‘대화록’을 2부 만들었다. 정상회담 대화록은 국가 (일급비밀) 기록으로 각각 청와대와 국정원에 보관됐다가 그대로 이명박 정부에 이관됐다. 김만복 전 원장은 “녹음 내용과 메모 둘 다에 정 의원이 주장하는 발언이 정말 없느냐”고 기자가 묻자 “수기로 (메모)한 게 또 있으니까”라며 “정 의원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우리 쪽 녹음 내용, 수기 메모, 그 둘을 토대로 만든 대화록 셋중 어디에도 NLL 포기 발언이 없다는 취지다.

남은 시나리오는 하나다. 정 의원은 애초 국감 때 북한으로부터 녹취록을 받은 주체에 대해 ‘우리 측 비선라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의미의 중첩으로 어법상 잘못된 표현이다. ‘비선’(秘線)이란 ‘몰래 어떤 인물이나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 의원의 국감에서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참여정부 고위 공직자가 공식 대화록 외에 북쪽에서 제공한 녹취된 대화록, 즉 녹취록을 제공받았고, 그 고위 공직자는 대통령의 폐기 지시를 거부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말이 된다. 국회 기자회견을 연 당시 배석자 3명은 남쪽이 북쪽과 공유한 녹취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문재인 후보 캠프는 지난 10월14일 정 의원을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정 의원은 논란이 일자 말을 바꾸고 있다. 정 의원은 지난 10월11일 채널A에서 사회자가 “(공식) 대화록이죠? 녹취록은 아니지요?”라고 묻자 “그런 얘깁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봤다는 문서가 ‘북한이 제공한 녹취한 대화록’인지 ‘조명균 비서관의 녹음 내용’인지 ‘정상회담 대화록’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말을 거듭 바꾸고 있다.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녹음 내용과 메모 둘 다에 정 의원이 주장하는 발언이 정말 없느냐”고 기자가 묻자 “수기로 (메모)한 게 또 있으니까”라며 “정 의원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우리 쪽 녹음 내용, 수기 메모, 그 둘을 토대로 만든 대화록 셋중 어디에도 NLL 포기 발언이 없다는 취지다.

NLL 포기 제안이 있었을까?

정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정황이 있다. 두 정상은 10월3일 오전과 오후로 나눠 3시간52분간 두 차례 회담을 진행했다. 정 의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회담 중간 어떤 시각에’ 김만복 전 원장 등이 배석한 상태에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에게 NLL 포기 발언을 했고 북쪽은 이를 구두 약속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정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정확히 이날 몇 시에 포기 발언을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정 의원이 국감 때 밝히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두 정상이 회담을 마치자마자 10월3일 저녁 남북의 고위 참모들이 회담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이때 남쪽 인사들은 서해 남북공동어로구역 논의를 하며 NLL을 기준으로 남북 등거리의 수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NLL이 경계선이라는 의견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당시 남북 협의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과 전화통화에서 “그날(10월3일) 저녁 실무회의를 했다”며 이렇게 밝혔다. “마지막까지 (합의) 안 된 게 공동어로구역인데, 우리가 ‘대통령 지침에 따라서 NLL을 지침선으로 등거리·등면적으로 같은 면적의 바다를 공동어로수역으로 만들자고 했더니 북측에서 반대하며 ‘NLL 바로 밑 남쪽 수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하자’고 해 우리 측에서 거부했다. 그래서 당시 서해 공동어로구역에 대한 합의에 NLL 언급 없이 ‘공동어로구역’으로만 나와 있는 것이다. 정 의원 말대로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면 (실무회의에서) 북측 주장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NLL은 영토선?

‘포기’라는 단어에는 NLL이 영토선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제가 잘못됐다. NLL은 국제법상 공인된 영토선(해상경계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1953년 유엔군 사령관이던 미국 클라크 대장이 동·서해에서 남쪽 해군·공군의 초계 활동을 한정하고 어선을 보호하려고 일방적으로 NLL을 발표했다. 선의 이름이 ‘북방한계선’인 이유다.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 정전협정엔 서해 쪽 해상경계선이 명시돼 있지 않다. 당시 해군력이 월등한 유엔군은 압록강 입구까지 초계 활동을 했다. 계속 그럴 수 없었다. 서해안 섬 몇 개를 포기하며 NLL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북쪽은 해군력이 전무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대부터 국제법을 근거로 ‘12해리’ 주장을 내놓으며 NLL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문제삼기 시작했다. 현재 사실상의 해상경계선이지만 그렇다고 국제법상 영토선도 아니다. 양면적이다. 이런 양면성을 보수 정권인 민자당도 인정했다. 민자당 정부 시절인 1992년 남북합의서 부속합의서 3장 10조는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서술한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공동대표가 당시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 겸 대변인으로 참여해 합의서 작성에 관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3일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3일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화록, 공개해도 되나?

정 의원이 봤다는 문서가 공식 대화록이라면,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정 의원의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정 의원은 기록을 언제 봤는지 시점을 밝히지 않았다. 2009년부터 약 2년간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근무하며 대화록을 본 것 아니냐는 추측이 많다. 민간인 신분으로는 아예 대화록에 접근할 수도 없다. 정상회담 대화록은 30년간 봉인된 일급비밀 기록이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행정관·비서관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일개 청와대 비서관은 어떤 경우에도 전 정부의 정상회담 기록을 볼 수 없다. (대화록을 본 것)그 자체가 불법행위”라고 설명했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공동대표도 NLL 포기 의혹을 밝혀야 한다면서도 “정문헌 의원이 합법적으로 (공개)했느냐 문제는 관련법에 의해 다뤄질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자는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속 또는 소속되었던 기관의 장의 승인 없이 비밀을 공개하지 못한다”는 ‘대통령령 보안업무규정’,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죄’(형법 127조) 등이 근거로 거론된다. ‘국기 문란’이라는 격렬한 비판도 나온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는 지난 10월16일치 기고에서 “정상회담 대화록은 일급비밀이고, 허가를 받아 봤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다. 따라서 외교의 기초도 없고 국정의 기본을 허무는 언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간 우리 대통령의 발언을 마구 공개해도 된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건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국기 문란”이라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세계적으로도 국가 간 정상회담 대화록을 외교문서 비밀 해제 시한(통상 30년)을 넘기기 전에 공개한 전례가 없다.

북풍, 영향력은?

중요한 선거 때마다 ‘북풍’이 있었다. 이번엔 NLL이다. 북풍은 늘 보수에 유리했다. 다만 2010년 6·2 지방선거를 계기로 북풍의 영향력이 작아졌다는 분석이 많다. 뉴라이트싱크넷에서 활동했던 보수적 학자인 홍성걸 국민대 교수는 지난 10월15일 TV조선에서 “영향은 준다고 본다. 그러나 (영향) 폭이 그렇게 크지 않은 이유는 삼자 대결이어서 부동층이 줄어든 상태”라고 말했다. 다만 홍 교수는 막판 지지층 결집 효과가 클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윤희웅 조사분석실장도 지난 10월18일 CBS 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NLL 논란이 외려 안철수 후보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놨다. 윤 실장은 박근혜·문재인 후보는 다소 하락하고 안철수 후보는 약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 한국갤럽 최근 여론 통계를 거론했다. 그는 “(NLL과 정수장학회 논쟁이) 오히려 과도한 정쟁으로 비쳐 정치권 내, 정당 내 소속 후보들에게 부정적 효과를 주었고, 장외에 있는 비정치권 출신인 안철수 후보에게는 반사 효과를 일정 부분 준 것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턴트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도 10월16일 MBN에서 같은 의견을 내놨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도 “여론은 NLL 이슈 자체보다 (그 이슈와 관련해) 누가 더 합리적이냐 무능하냐는 기준으로 판단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NLL 논란이 새누리당에 득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새누리당이) 합리적이지 않고 유능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한 연구위원은 “(새누리당) 지지층 결집 효과는 있겠지만 지금은 지지층 결집보다 외연을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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