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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형, 당신은 우리의 라틴아메리카 선생님

등록 2012-08-15 17:25 수정 2020-05-03 04:26
아카데미에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연구자·저술가로서 이성형의 역량에 대한 평가는 주류 강단의 어느 학자에 비해서도 좋았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아카데미에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연구자·저술가로서 이성형의 역량에 대한 평가는 주류 강단의 어느 학자에 비해서도 좋았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불운했다. 그가 가졌던 직함들 대부분엔 ‘초빙’이나 ‘객원’ 같은 표지가 따라붙었다. 서울대 국제지역원 초빙교수,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위원, 외교안보연구원 객원교수. 실력이 얕거나 경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1990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지난 20년 새 10권에 가까운 단독 저서와 4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다. 멕시코 대학에서 현지 학생들에게 스페인어로 강의할 만큼 어학 실력도 출중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들은 그에게 교수직 하나 내주는 데 극히 인색했다. 부르는 곳은 많았지만, 가는 데마다 어정쩡한 ‘객’ 신세였다.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이성형의 고독

이 불운했던 사내의 운명은 그가 사랑한 라틴아메리카의 슬픈 역사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말했다. “우리가 직면한 중대 문제는 우리 삶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인식시킬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고독의 핵심입니다.”(1982년 노벨상 수상 연설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국 중심주의란 학문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채 학벌 카스트의 배타적 직위 분배 시스템에 안주해온 한국 대학의 지배 엘리트들 앞에서, 지방대 출신으로 미국도 아닌 국내 대학원에서 제3세계 정치·경제를 전공한 그에겐 애초부터 능력과 자질을 입증할 수단 자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이름은 이성형이다. 느지막이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에 HK(인문한국) 교수 자리를 얻어 열정적 연구 활동을 재개했지만, 지난 8월1일 대장암으로 53살의 일기를 마감했다.

부고가 전해지자 많은 지인과 연구자들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1990년대 중반 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현 국제지역원)에 몸담았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학자로서의 탁월함과 실무적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를 교수로 받아주지 않았던 전공 교수들과 서울대”의 순혈주의적 폐쇄성을 꼬집었다. 라틴아메리카 학계의 선후배들도 지방대 출신의 국내 박사가 겪었을 차별과 고통에 공분을 표시했다. 서성철 부산외국어대 연구교수는 기고에서 “연구실적과 강의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대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을 보면 우리의 대학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야비하고 비열한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아카데미에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연구자·저술가로서 이성형의 역량에 대한 평가는 주류 강단의 어느 학자들보다 우호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학회장 송기도 전북대 교수(정치학)는 “신자유주의 문제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정치·경제와 관련해 누구보다 연구를 많이 한 학자”라고 했다. 김현균 서울대 교수(서반아어학)는 “정치학을 하면서도 문학과 음악, 미술, 건축까지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었던, 그 누구로도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빼어난 연구자”라고 극찬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성형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해온 도서출판 까치의 박종만 대표 말도 비슷했다. “어학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전공 분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저술가로서 문필 능력까지 갖춘 보기 드문 학자였다.”

박 대표는 천부적인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어학에 대한 재능과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은 타고났거나 유복했던 환경 덕이라기보다, 치열한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었다. 실제 그의 유년과 청년기는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거나 문학과 예술을 취미로 즐길 만큼 여유 있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성형은 1959년 부산에서 4남3녀 가운데 6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경남 양산에서 목장 관리인으로 일했다. 식구는 많고 가계는 어려우니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형 근형씨는 “집에서 부업으로 산양을 다섯 마리 키웠는데, 새벽에는 어머니가 짠 산양유를 배달하고 학교를 마치면 수영천변으로 양을 몰고 가 풀을 먹이다 해가 진 뒤 돌아오곤 했다”고 회상했다.

유연한 현실 감각, 용기 있는 선택

부산 중앙중을 마칠 즈음 부산상고(현 개성고) 원서를 썼다. 담임교사가 집까지 찾아와 인문계 진학을 권유했지만 가정 형편상 다른 길이 없었다. 상고에 진학해서도 대학입시반이 아닌 취업반에 들어가 부지런히 주산과 부기를 익혔다. 성적이 뛰어나 졸업을 앞두고 한국은행 업무부에 취직할 수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 1년간 은행에서 일한 뒤 1977년 부산대 회계학과에 특차로 들어갔다. 형 근형씨는 “한국은행 있으면서 상고 나온 촌놈의 비애를 절감한 것 같았다”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학교 앞 독서실에 잠자리를 마련해놓고 외국어와 문학, 사회과학 공부만 파고들었다”고 전했다. 이성형도 2002년 과의 인터뷰에서 “어학 공부를 겸해 보들레르나 랭보에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 작품까지 문학책을 원서로 읽었다”고 했다. 당시 그는 프랑스어 외에도 방송통신대학 강의를 통해 스페인어를 초급부터 고급까지 혼자 마스터했다.

부산대를 졸업한 뒤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학부 시절 정치학과 수업을 청강하며 학문적 흥미를 느낀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지만, 3학년 때 체험한 부마항쟁의 영향도 컸다. 대학원에 입학해선 본업인 정치학보다 대학원 동료들과의 마르크스주의 세미나에 몰입했다.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조절이론을 거쳐 레닌주의와 유럽 공산주의까지 섭렵했다. 박정희 정권의 사채 동결 조처(8·3 조치)를 계급분파론의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으로 1985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불운했던 사내의 운명은 그가 사랑한 라틴아메리카의 슬픈 역사를 묘하게 닮아 있다. 1974년 부산 중앙중 졸업 당시(왼쪽)와 2000년대 중반 멕시코의 디에로 리베라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가운데), 그리고 2008년 이화여대의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뒤 복직투쟁을 벌일 당시의 이성형. 고 이성형 선생 유가족 제공

이 불운했던 사내의 운명은 그가 사랑한 라틴아메리카의 슬픈 역사를 묘하게 닮아 있다. 1974년 부산 중앙중 졸업 당시(왼쪽)와 2000년대 중반 멕시코의 디에로 리베라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가운데), 그리고 2008년 이화여대의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뒤 복직투쟁을 벌일 당시의 이성형. 고 이성형 선생 유가족 제공

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엔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연구자로 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1988년 사회과학 무크지 2호에 쓴 ‘신식민지 파시즘론의 이론구조’는 당시 학계를 달군 사회구성체 논쟁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한 논문이다. 신식민지 파시즘론은 1980년대 한국의 국가성격에 대한 강단 민중민주(PD)파의 공식 담론이었던 셈인데, 1930년대 코민테른의 경제환원론적 파시즘 해석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현실 정합성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성형의 파시즘 분석은 강단 PD의 주류 입장과는 달랐다. 1930년대 남유럽 파시즘과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 군부독재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근거해 한국의 억압적 통치체제가 지닌 특수하고 과도기적인 성격에 주목하면서 한결 유연한 현실 대응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가 다른 강단 좌파들보다 유연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교과서적 이념이 아닌 살아 있는 역사를 매개로 사회변혁의 구체적 경로를 찾으려 했던 그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와의 만남도 이런 실천적 고민과 탐색의 과정에서 ‘운명처럼’ 이뤄졌다. 임현진 서울대 교수(사회학)의 회고다. “1980년대 중반 내가 진행하는 사회학과 대학원 세미나에 이성형이 들어왔다. 뛰어난 스페인어 실력에 감탄해 라틴아메리카를 본격적으로 연구해보라고 권했다.”

마침 조교로 일해온 연구소에서 해외여행 기회가 주어졌다. 멕시코에 3주간 체류하며 스페인어 서적과 라틴음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듬해인 1988년 조교 장학금을 털어 다시 멕시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사 논문의 방향을 라틴아메리카 연구로 정한 뒤였기에 여행의 목적의식도 뚜렷했다. 논문 주제를 정하는 데는 당시 국내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군 사회구성체 논쟁의 영향이 컸다. 1990년 ‘라틴아메리카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무리 급진주의가 대학사회를 풍미하고 있었다지만, 석사도 아닌 박사 논문 주제로 동시대 제3세계 좌파들의 사회변혁 논쟁을 다루는 데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뛰어난 성취, 외면한 대학

당시 서강대에서 이성형의 수업을 수강한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80년대 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이성형은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로 각인돼 있다”며 “그가 진행한 ‘한국 정치이념 논쟁사’라는 교양강의에는 학내에서 이론 공부 좀 했다는 운동권 학생들이 몰려들어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1991년 여름 소련이 붕괴하고, 국내 진보학계는 마르크스주의 위기 논쟁에 휩싸였다. 이성형은 이즈음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로 연구 방향을 전환한다. 당시 상황을 이성형은 2009년 펴낸 한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돌이켰다. “1992년 2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하면서 나의 신자유주의 연구는 시작됐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메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의 기수로 인기가 있었다. …미국발 워싱턴 컨센서스는 개방과 민영화만이 대안이라고 설파하며 남미 전역에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1993년 계간 에 쓴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와 이듬해 계간 에 기고한 ‘콜레라 시대의 라틴아메리카’는 그의 신자유주의 연구의 첫 결실이었다. 이 작업을 계기로 이론과 사상 차원에서 진행되던 한국의 신자유주의 논의는 본격적인 현실 분석의 차원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성형의 학문적 분투는 <imf>(서울대출판부·1998)와 (한길사·1999), (역사비평사·2002)를 거쳐 2009년 (그린비)에 이르러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했다.
그사이 한국은 외환위기(1997년)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국면(2006~2007년)을 거치며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폭풍의 한복판으로 진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성형의 연구가 끼친 사회·정치적 영향력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의 실험실’이던 라틴아메리카를 반면교사 삼아 급진적인 시장화의 부작용과 폐해에 대해 부단한 경고음을 울림으로써 정책 입안자들에겐 사전 교정의 기회를, 운동 진영엔 비판과 저항의 논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 시절 이성형은 탁월한 저술가로서 잠재된 역량을 한껏 꽃피웠다. 중남미 여행기 (창작과비평사·2001)와 역사칼럼집 (까치·2003)을 통해 역사·정치·사상·예술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지식과 맛깔스런 문장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 것이다. 는 여행자의 감상이나 이색적인 풍물 소개에 그치던 해외여행기를 고급 인문서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지금까지 9쇄를 찍으며 1만2천 부가 팔렸다.
하지만 이 시절은 이성형 개인에게 쓰라린 좌절의 시간이기도 했다. 설립 과정에서 실무를 전담하고 10년 가까이 연구 행정을 책임졌던 서울대 국제지역원의 교수 임용에서 잇따라 탈락하는 비운을 맛본 것이다. 두 번 모두 그의 정치 성향과 이력을 못마땅해 한 특정 학과 원로들이 비토를 놓았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불운은 어렵사리 교수직을 구해 정착한 이화여대에서도 이어졌다. 그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대학은 “학위 이력과 논문 수준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누가 봐도 억지였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던 페르난도처럼
이런 그를 2009년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가 HK교수로 채용한 건 세상이 이성형에게 베푼 처음이자 마지막 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생의 마지막 며칠까지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는데, 같은 연구소에 근무한 이은아 HK연구교수의 전언은 이렇다. “모든 에너지를 책 읽고 강의하고 논문 쓰는 데로 집중했던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만났을 때도 예술사를 매개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쓰려는 구상을 다듬고 있었다.”
이성형이 생전에 사용하던 전자우편 아이디는 ‘페르난도 리’(fernandorhee)다. 페르난도란 이름은 그가 대학 시절부터 즐겨 들었다는 스웨덴 혼성그룹 아바(Abba)의 노래 제목에서 빌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경쾌하고 감미로운 라틴풍의 곡조와 달리 이 노래의 가사는 결연함과 비장미로 가득한데, 여기엔 멕시코 전쟁(1846~48년) 당시 제국주의 침략군에 맞서 싸운 멕시코 청년들의 애잔한 사연이 담겨 있다. 곡을 쓴 아바의 기타리스트 비요른은 이 노래가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모든 자를 위한 노래”라고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한 이 고독했던 지식인을 떠나보내는 게 못내 아쉬운 독자라면, 그의 삶과 가르침을 떠올리며 ‘페르난도’의 가사 한 구절을 조용히 읊조려보는 것도 좋다.
“우리가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네/ 또 같은 일을 당한다면/ 친구, 난 다시 싸울 걸세, 페르난도.”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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