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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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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에서 ‘연대’로

지배·착취, 빈곤·불평등 덮는 이데올로기적 장막이라 비판받는 다문화주의… 차이 인정 요구 넘어 ‘공동 행동’ 나서야할 때
등록 2012-04-26 06:48 수정 2020-05-02 19:26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며/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중에서)

근대 휴머니즘의 핵심은 소박하다. 인간은 피부색이나 장애 여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것. 국제 이주가 보편화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 소박한 평등주의는 이주노동과 국제결혼이란 현실을 경유하며 다문화주의라는 관용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 다문화주의는 20세기 후반을 거치며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이들의 보편적인 윤리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그것의 핵심은 인종적·문화적 타자에 대한 존중이다.

다문화주의, 지배와 착취 덮는 ‘장막’

거주 외국인 수가 150만 명에 근접해가는 한국 사회에서도 다문화주의는 교육받고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내면화하고 있어야 할 시민적 덕목으로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조선족 하층민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선 범죄의 엽기성을 적나라하게 부각하며 배외주의적 혐오감을 조장했던 류의 보수신문들이, 이자스민 한나라당 비례대표 당선자에 대한 일부 네티즌의 언어테러에는 정색을 하고 그 우매함과 폭력성을 꾸짖는 현실에서도 확인된다.

문제는 여타의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다문화주의도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사실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다문화주의를 일러 “지구적 자본주의의 공간적 통합이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교의”로 규정한다. 그가 볼 때 다문화주의는 어떤 현상이나 윤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라기보다 후기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요구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보편성 대신 차이를 앞세우는 다문화주의나, 타자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관용 담론이 세계 곳곳에 엄존하는 지배와 착취, 빈곤과 불평등을 덮어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장막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선 다문화주의 이론가인 캐나다 정치학자 윌 킴리카도 수긍한다. “시민권을 제공하지 않는 다문화주의는 배제를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시민권 없는 다문화주의가 문화상대주의로 귀결하거나, 인종·민족적 소수집단의 게토화를 초래할 위험성이 크다는 점에 대해선 많은 이론가들의 지적이 있었다. 특히 한국처럼 이주자들이 문화적 무시와 폭력뿐 아니라 착취와 경제적 주변화 때문에 고통받는 사회에선 다문화주의가 현실의 부정의를 해결하기보다 이주자들의 권리 문제를 탈정치화하고, 이들의 문화를 박제화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 한층 설득력을 갖기 마련이다.

대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왜 다문화주의라는 관용의 이데올로기를 ‘요청’하는가. 한 가지 대답은 경제적인 차원, 자본들 사이의 극심한 경쟁이다.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자본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편은 생산 단가를 낮춰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생산 단가를 낮추는 방법은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에 투입되는 비용(노동력)을 줄이거나,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거나, 둘 중 하나다. 20세기 중·후반 선호된 방법은 생산 설비를 임금이 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변부나 반주변부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비 이전은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고, 본국에는 일자리 축소와 산업 공동화를 유발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 위기를 가중했다. 대안으로 장려된 것이 노동력 이주였다.



한국처럼 이주자들이 문화적 무시와 폭력뿐 아니라 착취와 경제적 주변화 때문에 고통받는 사회에선 다문화주의가 현실의 부정의를 해결하기보다 이주자들의 권리 문제를 탈정치화하고, 이들의 문화를 박제화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 한층 설득력을 갖는다.

기존 지배와 우월성 보존하려는 시도

실제 이주노동은 국가에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하는 한편(내국인 노동자가 생산현장에 투입되기까지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보라), 기업엔 설비 이전 없이 값싼 인력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결과 지구촌 곳곳에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노동자가 모여 사는 ‘다문화 공간’이 출현한다.

문제는 이런 다문화 공간에는 인종·민족 간 마찰과 갈등 가능성이 상존하고, 그것이 언제든 심각한 사회·정치적 위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2006년 프랑스 파리의 교외지역(방리외)에서 일어난 소요사태, 2011년의 영국 런던 폭동을 상기해보면 한층 분명해진다. 따라서 다문화 공간은 내부의 갈등적 긴장을 조절·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요청하는데, 여기에 부응해 등장한 것이 20세기 후반의 다문화주의라는 게 비판적 사회연구자들의 시각이다.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현실의 견고한 권력관계 앞에서 문화적 차이와 타자성을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없이 무기력하다는 점이다. 현실은 시인 최승자가 이야기하듯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며, “콘크리트 벽”처럼 견고하다. 내국인과 동등한 안정적 체류와 자유로운 노동의 권리, 나아가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사회적 권리를 요구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다문화주의의 호소와 효력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차가운 철창 앞에서 멈춘다. 미국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은 오늘날의 관용 담론이 “(가변적이고 역사적 기원을 갖는) 사회적 차이를 그저 묵인하면서 이를 향한 적대 행위를 줄이고, 모든 차이를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동시에, 기존의 지배와 우월성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한 예로 그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가 당선된 것을 당시 미국의 주류 언론이 “관용의 승리”라고 찬양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이 관용의 이름으로 흑인의 종속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흑인들은 이 승리를 관용한 백인들의 미국에 다시 종속된다. 이때 관용은 불평등·배제·갈등을 탈정치화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질서를 보존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현실 바꾸는 건 연대와 행동

상황이 이렇다면, 중요한 것은 인종·계급·성의 차이에 기초한 사회적 배제를 해소하고, 다문화 공간을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해방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순치된 갈등의 정치성을 되살리는 작업이 필수적일 텐데, 그 출발점은 당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해 ‘인정하라’고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라, 차이를 가로지르는 운명의 보편성(모두가 ‘소수자’요, 모두가 ‘이주민’인)을 발견하고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톨레랑스(관용)의 윤리학을 넘어서는 이것을, 약자(소수자)의 연대에 기초한 ‘오클로스(뿌리 뽑힌 대중)의 정치학’이라고 명명해보는 건 어떨까. 시인의 통찰대로,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인 현실을 바꾸는 것은 ‘비유’(말과 선언)가 아닌, ‘바스라지는 주먹’(연대와 행동)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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