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께서 지시하신 거니까” “작년에 3천 했는데 올해는 2천만 하죠” “지검장은 들어 있을 테니까 연말에 또 하고”.
1997년 9월께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다. 2005년 옛 안전기획부의 도청테이프(X파일) 녹취록이 공개돼 세상에 알려졌다. X파일 사건의 본질은 재벌·정치권·검찰·언론의 검은 유착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X파일의 ‘내용’은 외면하고, ‘불법 도청’에만 열을 올렸다. 도청 등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독수독과’ 이론을 내세웠다. ‘독이 있는 나무의 열매에도 독이 있다’는 논리였다. 증거는 되지 못해도 수사의 단서는 될 수 있다는 반론에는 귀를 막았다. 범죄에 가담한 사람은 모조리 면죄부를 받았다.
범죄를 고발한 자의 고통
형벌은 엉뚱한 데 떨어졌다.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던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이다. 노 전 의원은 2005년 8월18일 X파일을 입수해 분석한 내용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자신의 누리집에 올렸다. 삼성에서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폭로했다. “이번에 부산에서 올라온 내 1년 선배인 (서울지검) 2차장은 연말에나 하고, 지검장은 들어 있을 테니까 연말에 또 하고…”라는 홍석현 사장의 발언을 토대로 추적한 것이다.
범죄를 고발한 자의 고통이 시작됐다. 검찰은 그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고, ‘2차장’과 ‘지검장’으로 지목된 김정환·안강민 변호사는 각각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형사재판에서 1심 유죄가 2심 무죄로 뒤바뀌어 ‘정의’가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지난 5월13일 원심을 깨고 일부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명예훼손은 무죄지만, 불법 도청 내용을 공개하는 걸 금지한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10월28일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이 선고됐다.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노 전 의원은 내년 4월 총선에 출마할 수 없다.
“무릎 꿇지 않고, 사법정의 실현을 위해 재상고하겠다”고 밝힌 노 전 의원에게 12월9일 반가운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서울고등법원 제13민사부(재판장 문용선)가 진행한 민사재판 2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재판부, “보도자료 허위로 볼 수 없어”
재판부는 X파일 녹음 내용을 살펴봤을 때 노 전 의원의 보도자료 내용을 허위라고 볼 수 없으며, 검찰 직무수행의 청렴성과 공정성에 의문을 갖고 제기한 내용이므로 공익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X파일에 나타난 홍석현과 이학수의 대화는 검사들에 대한 1997년 추석 무렵의 금품 전달 계획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년에 3천 했는데 올해는 2천만 하죠’와 같은 부분은 삼성의 검사들에 대한 금품 전달이 위 대화 전에도 이뤄졌고, 그 후에도 이뤄질 것이라는 점에 대해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 X파일에는 당시 검찰 간부들의 실명이나 실명을 알 수 있는 표현이 기재되어 있다”며 피고인 노회찬의 손을 들어줬다.
민사재판은 형사재판 결과와 별개지만, 노 전 의원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이번 판결은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 부합하는 것”이라며 “대법원도 새로운 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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